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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및 묵상

(사복음서/마태복음 9:27-34,13:53-58) 예수를 믿음과 믿지 않음의 다른 결과

작성자정요한|작성시간26.06.19|조회수51 목록 댓글 0
예수를 믿음과 믿지 않음의 다른 결과
(사복음서연대기27 / 마태복음 9장 27-34절,13장 53-58절)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13: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의 제2차 갈릴리 공생애 사역이 마무리되는 내용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신 4가지의 이적 사건을 통해서(막4:35-5:43,눅8:22-56,마8:23-34,9:18-26), 자신이 누구인가를 계시하신 사건에 이어지는 두 이적 사건과, 다시금 고향을 찾은 예수를 배척하는 사건입니다. 이적 사건은 단지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곧 자연과 영적 세계와 질병과 죽음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언합니다. 이러한 이적의 증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로써 “천국”의 임재를 나타내 보여주는 계시이자,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으로 오셨음에 대한 선포입니다. 같은 예수를 만나도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른 것은, 단순히 규범적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신앙생활이 아닌, 우리 삶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 앞에서, 항상 ‘믿음과 배척’이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놀라운 기적과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지만, 반대로 끝까지 거부한 ‘불신’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결과입니다.
 
1. 예수께서 요구하신 믿음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삶을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5-7장) 선포에 이어서, 그 “나라”의 임재로서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9가지 이적 사건(8-9장)을 증언하는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눅5:25)를 치유하시고 “회당장…야이로”의 “어린 딸”(눅5:22-23)을 살리신 사건(마9:20-25)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9:27)라며 이 두 사건의 현장을 떠날 때, 마태복음에만 증언되는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이적 사건이 발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덟 번째 이적 사건의 배경을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9:27)라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에 대한 호칭으로, 당시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실 메시아를 지칭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만왕의 왕이라는 저들의 고백으로, 예수께 대한 전적인 신뢰 가운데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는 열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곧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공동번역)라고 호소했습니다. 예수께서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 대한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9:26)고 했지만, 예수께로부터 은총을 받고자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맹인” 곧 눈먼 자들만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소망임을 확신했기에 주님을 향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9:28)이라며, 예수님이 가시는 그곳까지 끝까지 나아갔다고 증언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9:28)라는 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저들에게 기적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 대한 전적인 신뢰 곧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 목소리로, “주여, 그러하오이다.”(9:28)라고 답변합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항상 강조하신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단순히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이나 지식적인 동의의 믿음(believe)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실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인격적으로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faith)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9:29-30)고 증언합니다. “눈을 만지시며”가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방법론이었던 것이 아니라, 평생 세상과 사람을 보지 못하는 불편과 사람들의 비하 속에 시달려왔을 저들에 대한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연민과 관심의 태도로서의 인격적인 접촉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방식은 다양했습니다. 사람들은 방법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바리새인들”처럼 규격화 규범화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9:30)다고 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작은 일 하나도 자신을 더 크게 알리려고 애를 썼을 텐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결과가 얼마나 왜곡될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며, 이로써 자신의 사역이 방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고침 받은 “두 맹인”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9:31)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불순종의 사람들이라고 정죄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 자신들이 받은바 은혜가 컸기에 침묵할 수 없었던 찬양의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두 맹인”이 치유를 받고 “집”을 나서는 순간에 발생된 아홉 번째 이적 사건의 배경을,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9:32)라고 증언합니다. 누가 어떻게 데려왔는지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9:33)이라며, 믿음에 대한 검증 없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인격적으로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믿음의 검증은 사실 불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에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9:33)라고 했다고 증언합니다. 당시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처럼 권능 있는 이적은 보지 못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참된 믿음은, 단순히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며 그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2.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베푸시는 치유 이적의 은혜를 입은 “두 맹인”은, 예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자신들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이 행해지는 현장마다, 항상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이적 사건에도 그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에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9:33) 또 “다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12:23)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의 시각과 입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들은 “무리”들과 달리, 오히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9:34)라고 폄하하고 왜곡시켰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역사냐 아니냐보다, 모든 사건의 해석에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범당하냐 아니냐는 이권 추구가 우선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율법적 교리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말씀과 이적 행위를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무덤덤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일상처럼 벌어지는 일로 당연시했는지도 모릅니다. 또 당시에도 병을 치유한다거나 “귀신”들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에, 예수님도 그러한 능력을 행하시는 분의 한 분으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졌던 이러한 선입견이 무너지는 한 사건을, 지난주에 증언한바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비유”(마13장) 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막5:1)으로 향하던 도중에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막4:37)오는 바람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눅8:23)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비록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었지만, 자기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치닫자, 예수께 다급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39)고 했습니다. 자연 만물조차 순종하는 예수님의 권위적 사건에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눅8:25), 비로소 “그가 누구이기에”(4:41,눅8:25) 곧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마8:27)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께서 단순히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는 수준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말씀과 이적 앞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오실 메시아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놀랍게 여겨”, 과연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다소의 관심을 가졌을지 몰라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제2차 갈릴리 공생애 사역을 마치면서 “고향”을 다시금 방문하신 사건을,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막6:1-2)라고 증언합니다. “고향”은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2:23)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 역시 예수를 배척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13:54) 곧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막6:2)라고 함으로써, 최소한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정했습니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의 반감과는 다소 달랐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권위의 근거를 “귀신의 왕” 곧 사탄에게 돌렸던 것처럼, “고향” 사람들은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13:55) 곧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막6:3)라며 예수님의 육체적 신분에 갇혀버렸습니다. 동서양에 ‘친밀함은 경멸함을 낳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존경하기 힘들다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저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지켜보았고 그러한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13:55-56)라며,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던진 질문은,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13:56)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고, 그러한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 예수님을 가두어 버린 결과로 주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의 육체적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도,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5)고 증언할 정도로, 예수의 메시아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그가 미쳤다”(막3:21) 곧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막3:30)는 헛소문을 냄으로써,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막3:21)라고 했던 이들이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막3:31)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주의 형제 야고보”(갈1:19)가 되어 수사도인 베드로를 잇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야고보서를 쓴 저자로서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1:1)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다” 역시도 훗날 유다서를 쓴 저자로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유1:1)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형제인 “요셉, 시몬”도 초대 교회 일군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어찌되었든 “고향”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지혜”와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이 때문에 “예수를 배척한지라”(13:57,막6:3)고 증언합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29)고 찬탄을 쏟아내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첫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눅4:16) 가셔서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눅4:22) 감탄해마지 않으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4:22)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4:24)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6:4)는 탄식을 남기고 “고향” 사람들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아셨지만(요4:44),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향” 사람들을 다시 찾으셨지만 역시나였습니다. 마음이 닫힌 상태에서는 그 어떤 증거가 나타나도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이나 “고향”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단지 “목수의 아들”이었고 “마리아의 아들”이었을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인간적인 배경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곧 “지혜”와 “능력”을 보고 놀라면서도, 그 근원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6)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3. 예수를 믿지 않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로 믿지 못한 이유는, 첫째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그 익숙함이 그들의 믿음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다보니, 그들은 가장 예수 곁에 가까이 있었지만 가장 멀리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이 그들의 믿음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그 선입견에 갇혀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어 역사하신다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만 보면서 자신을 낮추지 않은 교만이 그들의 믿음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은, 습관화된 신앙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거나, 자기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아니면 겸손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13:58)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13:58)고 증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는 불신앙에 아무런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지만, 불신앙은 은혜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거대한 장벽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6:5-6) 곧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새번역) 또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공동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어느 자리나 모든 사람이 불신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믿음을 가진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 “능력”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이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를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들은 주님이 베풀고자 하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걸림돌’로 여기면서,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치유의 기회를 잃고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음과 믿지 않음의 결과’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께서 치유하신 두 종류의 병자 곧 “두 맹인”(9:27)과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9:32)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에 닫혔던 눈과 입이 열리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이들과 달리 “바리새인들”이나 “고향” 사람들은 모든 것이 멀쩡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께서 행하신 “지혜”와 “능력”을 보고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지도 깨닫지도 못했고,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은혜는 모든 사람 앞에 열려 있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혜가 있어도 누리지 못하고 놓치게 됩니다. 한쪽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믿음의 눈이 열려 있었고, 다른 한쪽은 육신의 눈은 멀쩡했지만 영적인 눈이 닫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축복을 거절하는 영적인 완고함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탄식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눈먼 자들은 눈을 뜨고 찬송하는 인생으로 변화되었으나, “바리새인들”이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구원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습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없이 그들의 믿지 않음을 뒤로하고 다른 마을로 전도하러 떠나십니다. 이로써, 제3차 갈릴리 공생애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막6:5-6)는 증언으로 “고향”인 나사렛 방문을 마무리합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의 “배척”과 거부가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기회가 된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켜서,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11:7)며, “그러므로…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롬11:11-12)었다고 증언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것이, 반드시 믿음이 깊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익숙해지고, 기도가 습관이 되고, 말씀이 상식이 될 때, 그런 익숙함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의 나사렛 “고향” 사람들처럼,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편견과 교만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겸허히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체험하는 치유와 회복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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