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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국역사바로알기

평양성 조건의 논리

작성자무명 저고리|작성시간17.01.26|조회수535 목록 댓글 0

관련 이미지隨煬帝 大水路의 위치로 보는 平壤城

五胡十六國 時代는 우리 북방민족이 동북아시아 전체를 요동치게 만들었고

北魏가 南北朝를 통일하면서 隨를 건국하게 된다.


북위는 고구리와 종족과 언어 풍습이 같은 관계라서 였는지

고구리의 절대적인 힘 앞에 북위가 머리를 조아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북위와 고구리가 다툰 흔적이 없다.


그러나 북위가 南北朝를 통일하고 華南지방의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자리 매김하자 隨는 고구리에게

君臣 관계를 요구하기 시작 한다.


이 대목에서 동아시아 역사의 기존 사고 방식은 고구리는 북위에게

왕권을 부여 받는 종속적 관게라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 인식이다.


별 볼일 없엇던 북위에게도 머리를 조아리고 왕으를 부여 받던 고구리가

어찌하여 남북조를 통일하고 명실상부하게 동아시아 최강자엿던

隨에게 고구리는 엉겨 붇는 것일까?


더구나 이 시기의 고구리는 고구리가 신라에게도 500여리의 국토가 침탈 되어도

신라를 어찌 못하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 했던 고구리 였다.


北魏 시절에는 고구리에게 조정을 점령당하는 등의

북위가 속국적 위치에 있었던 정황의 기록이 존재 한다.


하지만 북위가 고구리를 능가하는 힘을 갖추자 자세가 역전 되는 것이다.


더구나 고구리는 새로이 떠오르는 신라와의 갈등마져 완벽하게 제압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고 고구리의 속국에 불과하던 두르크(돌궐)와 신라등이

고구리에게 등을 돌리고 隨에게 조공을 하기 시작한다.


고구리는 투르크와 신라에게 으름장을 놓자 수양제는 고구리에게

이들 나라에게 눈 부라리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고구리는 이직 만만한 상대가 아니엇다.


오히려 고구리는 隨의 遼西를 공격하여 취해 버린다.


북위에게도 왕권을 하사 받았다던 고구리는 어쩌자고 남북조를 통일한

수 영토 였던 요서를 공격 까지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고구리의 행동은 수와 전면전을 하겟다는 일종의 선전 포고다.


관련 이미지遼西=晉平

요동과 요서는 북위 때  구분 되는 地名이라고 한다.


山西省 汾河의 서쪽은 春秋戰國時代에는 晉의 영토 였으며

이에 따라서 이곳은 北魏에 의해 晉나라가 다스렷다는 의미의

晉平이라 명명되었던 것이다.

中國 汾河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山西省과 汾河


<宋書>의 기록을 보자.

<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백제는 본래 고려와 같은 류로 요동 천리에 있었으나

其後<高驪>略有<遼東>, < 百濟>略有<遼西>.

그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 했는데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가 다스리는 요서는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최초의 백제는 고구리와 함께 요동 천리에 있었다는 것이며

고려가 요동을 다 차지 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때가 고구리는 고국원왕(331년~371년) 때이며

백제는근초고왕 (346년~375년) 때의 일이다.


지금의 동양 역사학계는 요서를 지금의 랴오허 서쪽이라고 해석을 한다.


그렇다고 치자.


요서를 백제의 근초고왕이 잠시나마 점령햇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팩트다.


그렇다면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백제의 영역이 한반도 서남부 엿다면

도데체 백제는 어떤 경로로 요서에 원정을 하여

故國原王을 죽이고 요서를 차지 할 수 잇엇을까?


이 부분을 우리 국사는 백제의 요서 진출이라고 설명을 한다.


한반도 백제가 어찌하여 어떤 경로를 거쳐서 요서를 공격할 수 있엇을까?


우리 국사의 설명대로 고구리가 만주에 존재 하는 나라라면

그야말로 고구리의 후방에서 고국원왕이 죽임을 당햇다는 말이며

이때 고구리는 "서쪽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요서는 고구리의 서쪽 영토 아니던가?


국토의 서쪽이 왕이 戰死할 정도로 유린 되엇는데 고구리가 서쪽으로 가다니?


고구리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라 하지 않았던가?


또한 비슷한 시기에 백제는 북위와 80만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존재 한다.


한반도 백제가 80만을 동원 하여 대륙의 한가운데에 있는 북위와

전쟁을 햇다는 기록을 논리적으로 설명이 어렵자

"아마도 고구려의 오기일 것이다."라고 기록의 誤記(오기)로 얼버무린다.


자신들과 논리가 도저히 맞지 않으면 기록의 오기로 치부하고 유물의 근거가 없으면

훗날 언젠가는 유물이 출토 될 것이라는 것이 식민반도사관의 실체다.


요서를 두고 故國原王과 近肖古王이 전투를 벌이다가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고구리는 요서는 물론 요동에서도 물러나며 戎(고구리의 故國)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진평군의 晉平이라 함은 지금의 山西省 汾河 서쪽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晉나라는 중국의 기록에서도 山西省을 벗어난 적이 없는 나라다.


따라서 진평은 절대로 진나라의 영역을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며

진평은 지금의 산서성 일대를 벗아 날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진평이군은 절대로 지금의 요동 반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동양 역사의 허구를 명백하게 나타내는 대목인 것이다.

File:春秋诸侯大国简图.png

중국 위키 백과의 春秋戰國時代 지도

말 그대로 晉나라가 다스리던(平) 곳을 晉平이라 하는 것이다.


위 지도에서도 보듯이 晉나라의 위치는 山西省 태행산맥 서쪽에 존재 하고 있다.


晉平은 소위 말하는 遼西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隋煬帝(605년~618년)의 大運河(대운하)로 돌아가 보자


고구리로서는 隨보다 힘의 열세에 있기에 隨에게 머리를 숙이는 척 했지만

내심으로는 한판 떠보자는 것이었다.


결국 수양제는 수나라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리와 생사를 건 전쟁에 돌입을 한다.


고구리와의 전쟁 수행의 일환으로 수월한 보급로 확보를 위해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한다.


이 대운하를 건설하는 대목을 자세히 살펴 보자.

大運河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위 지도는 대운하가 지나가는 자리를 표시한 것이다.


항주에서 북경 까지를 남북으로 水路를 연결한 것이다.


우리는 이 대운하를 수양제가 고구리를 공격하기 위해 水路를 건설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위 지도의 水路는 수양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수로다.


만리장성이 중국의 왕조들이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 쌓고

그 장성을 연결한 것이 만리장성이듯이

대수로 역시 중국의 왕조들이 시기별로 만든 것을 이은 것이 대수로이다.


隨(581~619)의 존속 기간 38년의 짧은 역사는

이렇게 거대한 토목공사를 펼칠만한 시간이 없엇다.


隨가 위와 같은 대수로를 건설햇다는 주장은 허구라고 단정해야 하는 것이다.

大運河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隨의 都邑地는 長安이다,


위 지도를 보면 수양제가 건설한 장안에서 부터 건설된 운하는

그야말로 고구리 만을 공격하기 위해 보급로로서의 역할만을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운하인 것이다.


동양 역사학은 고구리가 지금의 동북지방인 滿洲에 있었다는 믿음으로

지금의 남북으로 연결된 대운하를 수양제의 대운하 라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남북으로 연걸된 대운하는 중원의 왕조들이 조금 씩 힘을 보태 오랜 세월 완성된 운하이다.


長安으로 부터 고구리의 평양성 근처 까지 연결되었던

수양제의 운하의 끝 지점이 고구리의 長安城(평양성)이 있엇던 위치인 것이며

그 위치는 지금의 山西省 太行山脈 남쪽 지점인 영락궁터인 것이다.


지 지점은 <史記>가 전하는 平壤城이 있었다는 遼河인 三水가 모이는 지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遼東은 지금의 河北과 河南 일대 였다.


즉 隨가 건설한 운하는 장안에서 부터 고구리의 長安城이 있었던 곳을 의미 할것이며

결국 운하가 끝나는 지점에서 가까운 곳이 장안성인 것이다.


관련 이미지樂宮

바로 이곳에 아주 묘하게도 광개토태왕의 묘호인 영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락궁이 있는 곳이다,

Location of Yuncheng Prefecture within Shanxi (China).png永樂宮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영락궁이 있는 运城

중국 역사에서 永樂이라는 묘호를 사용하는 황제는 明나라 주원장의 아들인

永樂帝 밖에는 없다.


그러나 명의 영락제와 지금의 영락궁과의 관련은 전무 하다.


지금의 영락궁이 어떤 이유로 영락이라는 이름을 가졌는지는 알길이 없다.


다만 영락궁이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존재 한다는 것과

永樂이라는 이름은 광개토태왕의 묘호라는 것이다.


隨가 공격한 평양성은 태행 산맥 하단부와 황하가 만난는 지점인 것이다.


관련 이미지<新唐書>平壤城

<新唐書> 권043의 기록을 통해서 평양성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

 

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 其西奚, 其東契丹.

營州에서 서북쪽 100리에는 松陘嶺이 있고, 그 서쪽에는 奚가 위치하며,

그 동쪽에는 契丹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학계는 를 거란과 같은 이류동종으로 추정을 한다.


즉 영주의 서북쪽 100리에 송경령이 있고 그 서쪽에 해가 위치하고

그 동쪽에 거란이 있다는 말이다,.

湟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漢 壤平城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湟水                                             營州



이렇게 옛 영주의 위치를 위의 지도로 비정을 하는 근거는


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

영주 북쪽 400여리 거리에 황수에 다다른다.

라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이제 부터 영주를 중심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지명을 유추해 보자


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燕郡城에 다다른다.

연군성이란 옛 연나라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又經汝羅守捉, 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

府, 故漢襄平城也.

또, 여라수착(汝羅守捉)을 지나가고, 遼水를 건너

安東都護府에 이르기 까지 500리이며 옛날 漢의 襄平城이다.

안동도호부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장안의 동쪽에 위치하여 "安東"이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安北都護府는 장안의 북쪽 都護府이다.


그러나 동북아 역사 학자들은 고구리는 지금의 만주에 존재 하며

안동도호부의 치소는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어림 없는 주장이다.


고구리 마지막 평양성은 장안성이다.


지금 북한 평양이 어떻게 장안성이 될 수 있는가.

관련 이미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지금의 만주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어찌 하여 장안의 동쪽이 될 수 있으며

안동 도호부는 평양성에 설치 했다고 하는데 영주에서 지금의 북한 평양이 어떻게

500여리 일수 있는가?


東南至平壤城八百里 ;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 西至建安城三百里, 故中郭縣也..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 故安平縣也.

동남쪽으로 平壤城에 이르기까지 800리 이며
서남쪽으로 都里海口에 이르기까지 600리 이며
서쪽으로 建安城에 이르기까지 300리가 되니, 옛 中郭縣이고
남쪽으로 鴨淥江 북쪽의 泊汋城에 이르기까지 700 리이며,

옛 安平縣이다.

Location of Hengshui Prefecture within Hebei (China).png

安平县位于中国河北省中南部,是河北省衡水市下辖的一个县


압록강 북쪽에 박작성이 있는데 박작성의 東漢때의 안평현이며

안평현은 오늘날의 하북성 최남단인 황하와 만나는 충수시 일대이다.


즉 옛 박작성이며 오늘날의 황하가 鴨綠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하는 것이다.


영주의 동남쪽 800여리 정도에 平壤城이라는 것이다.

관련 이미지


自都護雰北經古蓋牟 · 新城, 又經渤海長嶺府, 千五百里至渤海王城, 城臨忽汗海,

도호부가 다스리는 북쪽 경계는 옛 개모성과 신성이며

또 발해 장령부는 1천5백리를 지나면 발해 왕성이며, 다스리는 성은 홀간해라고 하며

즉, 도호부의 북쪽에 개모성과 신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 국사가 주장하는 것 처럼 지금의 평양이 안동도호부라면

평양의 북쪽에 개모성과 신성이 존재해야 하는데

개모성과 신성은 평안도 어디에 존재 하는가?


其西南三十里有古肅慎城, 其北經德理鎮, 至南黑水靺鞨千里.

그 서넘쪽으로 3천리를 가면 옛 숙신성이며, 그 북쪽 경계는 덕리진이며,

그 남쪽으로 1천여리를 가면 흑수말갈이다.



관련 이미지 壤平城


<隋書> 隋煬帝本紀에 “大業 3년(607년) 백만 명의 장정을 징발하여 

서쪽의 유림(榆林)으로부터 동쪽으로 자하(紫河)까지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열흘 만에 그만 두었으며 죽은 자가 열에 대여섯 명이었다

榆林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자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림의 위치는 위 지도이다.


이것은 隨는 고구리와 요서를 동쪽에 두고 마주 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고구리와 수와의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 나는지를 알수 있는 것이다.


또한 隨의 축성이 얼마나 힘든 일어였는지를 나타내는 표현의 기록이 있는데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라는 말은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와

같은 것으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이 문구는 요동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추정할 수 는 대목인 것이다.


즉 평양성=장안성임을 감안 하면 隨와 고구리의 전쟁은

山西省에서 이루어 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관련 이미지結論


平壤城이라는 말은 서울이라는 의미이며 建興帝는 제국 고구리를 완성하는 군주이며

제국의 수도를 國內城에서 遼東城으로 遷都를 하는 것이며

遼東城의 위치는 浿水 북쪽이다.


그러나 고구리 제국의 전성기는 100년을 고비로 끝나는 것이며

平原王은 고구리의 마지막 수도인 長安城으로 遷都하는 것이며

長安城의 위치는 영락궁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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