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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국역사바로알기

故滿洲와 고구리의 정체

작성자무명 저고리|작성시간17.01.27|조회수383 목록 댓글 2

동아시아 고대사는 五胡十六國 時代 이전과 이후에 의해

엄청난 변화를 보이는데 바로 이 부분이 우리 고대사를 해석하는데 착각을 일으킨다.


隨는 오호십육국을 평정하고 고구리와 대치를 한다.


명실 상부한 帝國으로서의 위용을 확립하기 위해 수는 고구리에게 君臣 관계를 요구 한다.


고구리는 광개토태왕과 그의 아들 건흥제의 전성기를 지나 제국으로사의 위용을 잃고

속국이었던 돌궐이 고구리의 서토에서 독립을 하고 또 다른 속국이었던 신라마져

고구리를 막보면서 고구리 영토를 500여리나 침탈을 하지만 속수 무책이었다.


백제와 동맹으로 근근히 유지하기는 했지만 한때는 동아시아 전체를 호령하던 자존심이

수양제에게 쉽게 머리를 조아릴수는 없었다.


하지만 華南과 江南 지역을 손에 넣으면서

이 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배경으로 隨는 강하게 고구리를 압박 한다.


고구리는 겉으로는 수에게 머리를 숙이는척 했지만 遼西를 공격하여 취해 버린다.


요서는 소위 東胡의 절대 영토 였다.


동호란 선비와 고구리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딜레마는 隨나 唐을 우리 역사와는 다른

중국의 정통 역사로 간주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수와 당의 지배 계층은 拓跋鮮卑라고 한다.


선비족은 크게 6부족으로 나뉘는데 동아시아 역사에서 제일 먼저 역사에 등장하는 부족이

모용연의 모용선비이며 그 다음이 수와 당의 탁발 선비이며 훗날 거란으로 불리우는 우문 선비다.


선비를 더듬어 보자.


선비족에 관한 아랫글은 중국 역사학자가 쓴 글임을 밝힌다.


관련 이미지鮮卑族의 뿌리와 역사

고대 선비족은 조선족의 일부분이었다.


선비족은 山戎에서 나왔으며 홍산문명을 창조한 사람들이다.


山戎,又稱為無終氏,中國春秋时期的游牧民族

生活於今中華人民共和國的遼寧省西北部與河北省東北部

즉 산융은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에서 부터 하북과 산동성 북부에 걸쳐져서

형성 되어 잇는 춘추시대 종족의 이름인 것이다.


필자주-<사기>의 흉노열전에서는 산융을 당우 시대에 부르는 흉노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녕성에서 부터 하북과 산동에 국한된 산융은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위만 조선은 흉노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산융은 燕나라와 朝鮮과 遼東을 구성하고 있던 나람들을 지칭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古代 東北 3大 部族은 東胡, 夫餘, 靺鞨이며 東胡가 다스렸다.


東胡는 鮮卑와 柔然 고구리로 분류 되며

고대 고구리는 東胡 가운데에서도 伯夷에 속했으며 戎狄이며 胡虜라 불리운다.


필자주-동호는 胡虜 索虜 魏虜로 분류 되는데 남조의 국가들은 北魏를 魏虜라고도 불럿다.

즉 북위와 고구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가 같은 다른 부족이었던 것이다.

東胡는 동쪽 흉노를 말하는 것이며 고구리를 호로라고 부르는 것은 東를 말하는 것이다.


탁발선비족은 몽골족에서 나왔다.


고조선은 檀君 壇石槐 의해 東漢(後漢 25~220) 때 잠시 부활 했다.


당시 단군 단석괴 조선의 강역은 동쪽으로는 遼東에서

서쪽으로는 甘肅省을 지나 오도로스 평원 까지 였다.


흉노의 옛 故地를 모두 점하였으며 북흉노 사람들을 鮮卑라 하엿다.


이랫던 대제국 단군 단석괴 조선은 瓦解 되는데, 拓跋 鮮卑는 中原에서 北魏를 건립하고

북흉노의 핵심 부족인 돌궐인들은 柔然을 건립하고, 요동에서는 고구리가 굴기 하였다.


이것에 따라서 고구리와 유연과 북위로 3分 되었던 것이다.

柔然,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柔然(유연)

柔然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突厥(돌궐/투르크)


단군 단석괴(檀石槐)는 선비족의 출신으로 보인다.


그의 탄생 설화를 더듬어 보면. 후한의 환제(재위 146~167)의 시대에 아버지 투톡후(投鹿侯)

3년간 남흉노와의 전쟁에 나간 사이에, 그의 처는 남자 아이를 출산 햇다.


투툭후가 아이를 죽이려 하자 처가 말하기를  "일찍이 낮에 길을 가다 천둥 벼락소리가 들려

하늘을 올려다 보았는데, 번쩍이는 빛(電)이 입 안으로 들어와 이를 삼켰습니다.


그 후, 임신하여 출산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奇異)한 점이 있으며, 장차 크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투록후가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자, 처는 친정집에 말해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했다.


단석괴라 이름지었는데, 長大하고 勇健하며, 智略이 남보다 뛰어났다.


여기 까지는 주몽등과 같은 북방 민족의 탄생 설화와 아주 흡사 하다.     

 

나이 14~15세 때에 다른 部 (선비는 6부로 나뉜다)의 대인 복분읍(蔔賁邑)이

단석괴 외가의 소와 양을 약탈하자 단석괴가 이를 추격했다.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고, 잃어 버렸던 것을 모두 되찾아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부락(部落)이 외복(畏服)했고, 법금을 시행하면 옳고 그른 일을 공평하게 가렸으므로,

감히 이를 어기는 자가 없었으니, 마침내 그를 대인으로 추대했다. 

        

단석괴가 즉위한 후 고류(高柳) 북쪽 3백여 리 되는 곳의 彈汗山과 啜仇水가에 정(庭)을 두자,

동부와 서부의 대인들이 모두 귀부했다. 

        

兵馬가 매우 번성하여 남쪽으로 한나라 변경을 침략하고 북쪽으로 丁令에 맞서고,

동쪽으로 夫餘를 물리쳤으며, 서쪽으로 烏孫을 공격해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점거했다. 


156년 가을 단석과 단군은 3~4천기를 이끌고 운중을 공격하여 취했다.

158년 선비는 한의 북쪽 변경을 공격 하엿다.

그해 겨울 흉노의 사신 장환은 남흉노 이릉 선우를 을 이끌고 새를 나와 공격 해서 200여급을 베엇다.

159년 鴈門(안문)에 침입 하여 수백명을 죽이고 크게 크게 노략질 햇다.


163년 여름, 천여기를 이끌고 요동 속국을 노략질 햇다.


166년 여름 선비는 남흉노 오환을 합병하고 수만기를 나누어

연변 9군에 침입 해서 관리들을 죽였다.


이에 한나라 조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햇지만 단석괴는 거부했다


단석괴는 자신의 영토를 동 중 서로 삼분할 하여 다스리는데

이것은 단군 조선의 3한과 같은 것이다.


우북평 부터 동쪽은 요동의 부여 및 예맥과 20여 읍의 동부 지역과

우북평 부터 서쪽으로 상곡에 이르는 10여 읍루와

상곡에서 서쪽으로 돈황과 오손에 이르는 20여 읍을 서부로 하고

각기 칸으로 하여 통치하게 햇다.

167년~189년) 선비는 幽州幷州涼州의 3주가 번창 할 때 약탈하지 않는다.


국경지대의 모든 고을은 선비로 부터해마다 많은 손해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엇다.


174년 겨울 선비는 北地郡에 침입했는데 태수 하육은 休著屠各을 이끌고 이를 격퇴 했다.


이 공로로 하육은 호오환교위가 되엇다.


176년 선비는 유주를 침략 햇다.


177년 선비는 삼변을 침략 햇다.


이에 한나라 조정은 하육을 급파했고 하육은

남흉노의 선우의 군과 협력하여 雁門塞에서 부터 長城 바깥으로 나와

셋으로 나누어 진격하는데 2천여리를 돌파하여 나아 갔다.

이때 단석괴는 자신의 지배아래 있는 부족들을 지휘 했고 그것을 맞이 하여격파 했다.


양주 자사 장민은 패주 했고 무사히 귀환 했지만 병마는 1/10에 불과 했다.


그해 겨울 선비는 遼西를 공략 했다.

178년 鮮卑は酒泉을 공략 했다.


그에 따라서 선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 했는데

농경과 목축 수렵을 하던 부족들을 모두 흡수 함으로서

식량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 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단석괴 단군의 영역은 동서로 12,000여 리, 남북으로 7,000여 리에 이르니

山川과 水澤(황하 하구), 鹽池(카스피해를 망라하여 매우 넓어, 漢이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단군 단석괴의 제국은 단석괴가 죽자 북위와 유연

그리고 고구리로 나뉘어 지며 짧은 수명을 다하는 것이며

이것을 역사로 정확하게 기록하면 後朝鮮 쯤으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거란은 우문 선비다.


훗날 廣開土太王 永樂帝는 거란을 토벌하면서 그들은 "卑麗"라고 표현을 한다.


선비의 卑는 낮다 비천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작은"이라는 뜻으로서

鮮卑란 "작은 朝鮮"이라는 뜻인 것이며 같은 맥락으로 卑麗란 "작은 高句麗"라는 뜻인 것이다.


거란은 조선의 옛 땅으로 부터 유래 했다라는 것으로도

그들은 우리 역사이며 우리 조상인 것이다.


北魏->隨->唐으로 내려 오는 탁발 선비가 누구의 역사인가는 독자들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당은 호한융합의 정책으로 숫자가 많은 한족으로 동화돼 버리고 만다,


이런 과정을 반면 교사로 삼은 거란과 아이신구룬(金) 몽골 그리고 다이칭구룬(淸)은

철저하게 漢族과 분리 정책으로 일관하는 것이며 무자비한 한족 살육전을 펼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동아시아 역사 학자들은 고구리를 만주에 존재햇다고 믿는 것인가?


관련 이미지滿洲 기록

이제 부터 고대 만주의 흔적의 기록을 찿아 떠나 보자.


고대에 쓰여진 사서들은 난해 하다.


이런 관계로 한문학 하시는 한학자들, 한의원들과 같이 漢文에 박식한 분들이

역사 기록들을 번역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역사적 사실은 도외시 한채

문장을 직역하여 해석하고 번역함으로서 많은 오류를 범하는 역사서가 창조 되었던 것이다.


같은 글자라도 그 글자가 쓰여지는 시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漢字다.


또 전혀 다른 글자라도 같은 지역명, 같은 종족을 뜻하는 것이 중국 사서들이다.


예를 들자면, 肅愼, 夫餘, 勿吉, 靺鞨, 邑樓 女眞이라는 용어는 모두 만주(文殊)족을

시대에 따라 달리 불러 온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우리가 지금의 만주 지역을 滿洲라고는 하지만 만주족을  滿洲族으로 表記(표기)하면 안된다.


"文殊"가 맞는 것이며 문수를 그대로 읽으면 문수겠지만 文殊라는 한자를 만주 사람 사람들은

"만쥬"로 읽기 때문에  우리 역시 만주로 읽어도 문제가 없지만 우리가 민쥬인들을 지칭하면서

"滿洲人"이라고 표기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카라키탄을 奚丹 또는 契丹이라고 표기 하지만 중국식 표기인 遼라 하는 것과

아이신구룬이라는 여진인 사람들이 스스로 부르던 이름 대신 金나라라 부르는 것은

이들의 민족 정체성을 중국화 시켜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이들을 중국 역사로 밀어 넣는 결과를 초래 하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의 만주 벌판을 "滿洲"라고 표기 하는 것은 상관 없겠지만

그 땅에 살던 종족을 "滿洲人"이라고 표기해서는 안될 일이다.


한중일 삼국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연구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는 것을 알앗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과 일본이 알아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스스로 축소 시켜 주는데

궂이 자신들이 알아서 역사의 본 모습을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中原에서 일어난 역사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장 잘 알것 같지만

정작 중화인민공화국 역사가들에 의한 중원 역사 연구는 백지에 가갑다.


아마도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漢族의 시각으로는

中原에서 명멸해간 고대 국가들이 자신들의 나라 역사일수는 있겠지만

漢族의 역사일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 역사 학자들에 의해 역사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 되지만

그 프레임은 반도 사관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역사의 눈 높이가 한반도인 우리는 역사의 지평을 한반도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특히 우리 고대사는 한반도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고대사를 모두 한반도로 축약 시켜 바라 본다.


그러니 이상할 수 밖에...,


20여년을 역사에 매달려 오면서 지금 까지 풀지 못한 초기 고구리의 본류가 甘肅省(감숙성)이엇으며

평양성의 위치가 태행 산백 하단부에 있을 것라는 것을 100%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있어 왔다.

감숙성


분명히 고구리 초기 역사는

지금의 둔황을 중심으로 하는 감숙성으로 보이는데 명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소위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었다.


그런데 <신당서>에 나타나는 滿洲(만주)라는 이름으로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滿洲란 어디를 말하는 것이며 그 이름의 유래는 무엇인가?


만주란 여진의 후예인 만주인들이 청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자신들을

文殊(문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淸나라로 부터 독립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만주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되는이름인 것이다.


文殊는 지금의 랴오허 동서쪽 즉 발해 지역만을 지칭 햇었으나



 


현재의 滿州


지금은 북쪽 흑룡강을 비롯한 북만주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滿洲라는 이름으로의 역사는 불과 100년도 안된다.


우리 재야 사학은 바로 100년도 안된 滿洲라는 이름과 遼史에 등장하는 遼河하는 이름에 의하여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모든 역사가 지금의 랴오허 유역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의 본래 이름은 滿殊(만수), 曼殊(만수), 文殊(문수)이다.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이릉릉 사용하게 되는데

그 이름이 滿殊(만수), 曼殊(만수), 文殊(문수)인 것이다.


이것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滿로 바꾸면서 역사 전체가 뒤틀려 버리는 계기가 된다.


즉 이름 하나를 고치면서 동북아 고대사가 통채로 바뀌는 결과를 초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 등장하는滿州라는 이름은 전혀 엉뚱한데서 나타난다.


그것이 <新唐書>다.


고구리의 서쪽 경계 엿다는 "營州"를 통해서 滿洲와 고구리의 위치를 알아 보자.


乃移師征兀良哈洪武二十二年, 元族屬故遼王阿裏失禮等內附, 因置三衛以授之,
曰朵顏 · 泰寧 · 福余, 統名曰兀良哈, 故營州北境地也..

위 기록을 살펴 보면 명나라 주원장 즉, 홍무 22년에 군사를 풀어 울량합을 정벌햇는데

타안(朵顏) · 태녕(泰寧) · 복여(福余)등의 이름들을 합하여 "울량합"이라고 부르며

이곳에 최초에 살던 족속은 옛 요나라 왕 아율보기가 다스리다 잃은 역참 즉 역마을이며

울랼합은 옛 영주의 북쪽 경계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타안(朵顏) · 태녕(泰寧) · 복여(福余)의 이름은 滿洲지역에 나타나는 地名들이지만

그 곳은 원래 현재의 청해성(靑海省)의 토곡혼(吐谷渾)의 지명이라는 것이며

토곡혼은 전형적이 흉노의 근거지이며 초기 고구리가 있던 감숙성이다.


울량합의 역사적 위치를 보자.


洪武三年〔一三七零年〕,元顺帝死于应昌〔今内蒙古多伦东北〕,蒙古各部
族大致分裂成三部:鞑靼、瓦剌和兀良哈。
    兀良哈在黑龙江南,鱼阳塞北,今西辽河、老哈河一带,春秋时为山戎,秦时
为辽西北境,汉时为鲜卑,唐时为吐谷浑,宋时为契丹,元时为大宁路北境。

 

즉 올량합은 지금의 흑룡강 상류로 부터 감숙성 서쪽과 토곡혼 까지엿다는 것이다.


즉 滿洲는 지금의 만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엿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지금의 흑룡강 남쪽에서 부터 내몽골을 포함하고 서요하를 건너서 토곡혼

즉 지금의 청해성을 포함하는 것이란다.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구리를 비롯한 부여 예맥 옥저등의 원래의 위치가

올량합이라는 만주에 존재 햇다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河와 遼河 그리고 湟水가 어디 까지 였느냐를 정확하게 지목할 수는 없지만

4600km가 넘는 황하는 下流"河"라 했고 中流 지역을 "遼河"라 했으며

上流 지역을 "湟水"라 했던 것이다.


또한 "河"가 황하의 下流를 표현하는 고유한 글자라면

"湟" 역시 토욕혼 또는 청해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흘러 드는 하천의 고유한 이름인 것이다.


고구리와 당나라가 존재 하던 시기에는 영주가 있던 이 지역을 吐谷渾이라 햇으며

이 지역이 吐谷渾 또는 靑海라는 사실 역시 누구도 부인을 할수가 없는 지명이다.



아래 두개의 지도를 보자


湟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漢 壤平城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湟水                                             營州




그런데 이곳 영주 까지 옛 지명으로는 滿洲라 햇던 것이다.

 

<新唐書>의 기록 역시 영주(營州)의 북쪽에는 황수(湟水)가 있다고 했다.

 

그 황수(湟水)는 현 청해성(靑海省)의 동북부에 흐르는 유역 지대를 가리키는 곳인데..

토곡혼(吐谷渾)이라고 불렀던 옛 만주(滿州) 남쪽 경계에는 영주(營州)가 위치하고 있다.

 

장령부(長嶺府)는 부여(夫餘)의 옛 지역이라고 했고, 본시 부여부(夫餘府)이기도 하는데,

그 부여(夫餘)는 변음하면서 토곡혼(吐谷渾)의 복여(福余)로 바뀌게 되는 지명이다..

 

※ 吐谷渾은 현 靑海省 東部에서 현 甘肅省 西南部와 현 寧夏省 中部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이후로는 명나라(明)의 올량합(兀良哈) 지역에 속하여 이 모든 지역을 통합하여 滿洲라 했던 것이다.


지금의 滿洲는 청나라 때에 文殊로 불리던 것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슬쩍 滿州로 바꿔 버린 것이다.


滿洲와 文(滿)殊는 전혀 틀린 말이다.


다만 "文殊(문수)를 만주인들이 읽으면 "만쥬"로 발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의 하북 하남의 북부, 섬서성, 산서성, 감숙성과 토욕혼으로 이어지는

고구리의 영토가 반도사관에 의해서는 지금의 압록강 변으로, 재야 사학에 의해서는

지금의 랴오허로 비정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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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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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음만큼 | 작성시간 17.01.29 고견 감사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무명 저고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1.29 읽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글에 포함된 스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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