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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한국역사바로알기

[스크랩] 모자의 나라 조선

작성자길리성|작성시간20.04.07|조회수821 목록 댓글 0

 

"한국은 모자의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한국의 모자 패션은
파리인들이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를르 비리, <뜨르 두 몽드>, 1892-

조선시대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의관을 갖춰 입는 것에 포함 되었던 것으로, 의복생활에 있어 중요했던 부분이었다. 매우 다양하고 각기 다른 쓰임을 가진 모자가 있어 조선을 찾은 외국인이 ‘모자의 왕국’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자’는 신분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가지각색의 종류가 존재했다. 왕과 신하가 구분되고, 양반과 평민이 쓰는 모자가 달랐다. 결혼할 때와 상(喪)중에 농사를 지을 때나 수공업용이 있었고, 여름용 겨울용처럼 처한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모자의 종류가 각각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모자만 보고도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현재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1. ​양반의 모자 '갓'

조선시대 모자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갓’이 있다. 갓은 조선시대 남자가 외출시 쓰던 관모로 매우 다양한 종류가 있다. 사극에서 많이 만나는 검은색 갓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뉘었다.

양반의 모자는 '갓'을 ‘흑립(黑笠)’이라고 한다. 흑립은 '검을 흑(黑)'에 '삿갓 립(笠)'으로 글자 뜻 그대로 ‘검은색의 갓’을 뜻한다. 흑립은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의 관습을 타파하고 고유의 의관체제를 갖추기 위해 관모로 제정이 되었지만, 잘 쓰이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가서야 일반화 되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일생’에서는 크기가 상당히 큰 흑립을 볼 수 있는데, 한 때 양태가 매우 널따란 흑립이 쓰여 방에 사람 2명이 대각선으로 마주보고서야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는 말도 전해져 내려온다. 흑립은 정조 때에 이르러야 적정한 크기가 자리 잡다고 한다. 참고로 영화<군도>에서 조윤(강동원 分)도 쉽게 영화에서보던 흑립보다 큰 크기였다.


2. 소년이 쓰는 “초립(草笠)”

초립은 흑립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주로 쓰인 모자로 알려져 있다. 초립은 만드는 재료가 대나무이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 (經國大典)』에는 선비의 초립은 50죽, 서인의 초립은 30죽으로 서로 구별하여 쓰라고 명시하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 흑립을 쓰게 되면서, ‘초립’은 점차 관례를 치른 소년이 흑립을 쓸 때까지 관모로 쓰는 모자로 사용되게 되었다고 하며, 이에 ‘초립동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신윤복의 풍속도에서도 흑립을 쓴 양반들 사이에 초립동이를 찾을 수 있다.


3. 신분차별을 보여준 “패랭이”

패랭이는 다른 말로 ‘평량립’, ‘평량자’, ‘차양자’ 등으로 불리며 주로 천인계급이 쓴 모자이다. 딱 보았을 때 모양이 흑립과 많이 닮았는데, 이는 갓의 발달과정에서 패랭이가 흑립으로 가기 전 단계의 갓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흑립이 점차 선비의 관모로 정착함에 따라, 패랭이는 상(喪)을 치르는 기간 외에는 선비들은 잘 쓰지 않고, 역졸이나 보부상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다. 역졸은 패랭이를 검게 칠해 사용했고, 보부상은 큼직한 목화송이 양쪽 두 덩어리를 얹어서 썼다.

이 처럼 패랭이는 주로 천인계급이 쓰던 모자로, 길거리에서 양반을 만나면 패랭이를 벗고 엎드리는 풍속이 있었다. 이렇게 모자를 통해 신분이 구별되었기 때문에 1895년 갑오 농민 운동기에는 ‘백정이 쓰는 평량립을 없앤다.’라는 요구사항이 나오기도 했다.


4. 집안에서 쓰는 일상 모자들..

방립형 갓은 가운데인 ‘대우’와 테를 두른 ‘양태’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양태가 있어 실내나 가정에서는 번거로움이 있어 이를 대신해 쓰는 모자들이 따로 있었다..


4-1. 5천원에서 보는 “정자관(程子冠)” ..

지폐 5천원에 율곡 이이가 쓴 모자가 정자관이다. 원래 정자관은 중국의 관모 중에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정자관’ 이외에도 소동파가 썼던 관이라는 ‘동파관(東坡冠)’, 사면이 네모난 ‘사방관(四方冠)’, ‘충정관(冲正冠)’ 등이 있어 각자 원하는 대로 실내용 모자로 사용하였다. 재료는 말총을 사용하였고, 산(山) 모양의 단을 덧대어 2겹이나, 3겹의 층을 이루는 정자관도 널리 쓰였다.


4-2. 관직자만 쓸 수 있는 “탕건(宕巾)”

탕건은 오직 ‘관리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속칭 ‘감투’라고도 하는데, 탕건은 얼핏 보기에 감투와 비슷하지만, 감투는 탕건과 달리 턱이 없는 모양을 하고 있어 형태상에 차이를 보인다. 원래 독립된 하나의 관모였으나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는데, 즉 집 안에서는 탕건만 쓰고 있다가 외출을 할 때에는 탕건 위에 갓을 썼던 것이다. 벼슬을 하거나 지금도 어떤 직책을 맡으면 ‘감투쓴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감투는 관직의 표상인 ‘탕건’을 뜻하는 것이었다.


4-3. 탕건과 비슷하게 생긴 “감투”

일반 평민 중, 집안 재력이 넉넉했던 사람들이 쓰던 모자로는 ‘감투’가 일반적이었다. 감투는 말총이나 가죽, 헝겊 등으로 차양 없이 만든 모자다. 다른 모자들과 달리 넓다란 챙이 없다 보니 실내에서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낮은 계급이 착용하던 모자로, 조선시대에는 평민들이 사용했다. 조선 후기에는 겨울에 솜을 넣어 방한의 기능을 갖춘 감투가 쓰이기도 했고, 제주도에서는 동물의 털로 감투를 만들어 겨울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과 신하들의 모자

조선은 신분사회였고, 양반은 원칙적으로 관제상의 계층을 이른다. 왕을 중심으로 양반(문반과 무반)이 나라 일을 보는 체제였다. 따라서 왕과 관료들에겐 업무를 보는 조정에서 쓰는 모자가 있었다.


5. 왕과 세자의 “익선관(翼善冠)”

조선시대 왕은 상복인 곤룡포를 입을 때 익선관을 썼다. 익선관은 모체와 뒤에 매미날개의 모양이 달려있는데, 이름에 ‘익선’이 이것을 뜻한다. 매미처럼 청렴과 검소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6. 혼례복이 된 문무백관의 “사모(紗帽)”

세종에 이르러 문관과 무관은 평상복에 갓을 벗고, 사모를 착용하게 했다. 문무백관이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었다 하는데, 이는 단령포와 가슴에 붙인 흉배, 허리띠 협금화 그리고 ‘사모’를 갖추어 입는 것을 뜻한다. 그러던 것이 백성들의 혼례에도 허용되어 현재에도 전통혼례를 할 때에는 사모관대에 맞추어 의관을 갖춘다 것이다.


7. 군장에는 “전립(戰笠)”

‘싸울 전(戰)’에 ‘삿갓 립(笠)’라는 이름을 가진 전립은 군장에 속한다. 전립은 모립(毛笠)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전립을 만드는 재료가 짐승의 털이기 때문이다. 이 모자는 원래 북방 호족의 것으로, 조선에서는 중엽 이후에 군사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들 까지도 이 모자를 널리 통용했다.

사극에서 보면, 고위급 무관들은 이 모자에 화려한 장식을 더해 사용하고, 일반 포졸들은 평범한 전립을 착용하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품등이 높은 무관은 전립의 둥근 모자집 꼭대기에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으로 만든 장식을 달았고, 공작이나 꿩 같은 새들의 깃털을 달아 화려함을 더 했다.

* 전쟁에서 이용하는 장수의 모자로 “투구가 따로 있다.

8. 유생들의 특별한 “유건(儒巾)”

이 모자는 주로 성균관 유생들이 사용한 것이다. 유생들이 도포나 창의를 입을 때 함께 쓰이는 ‘실내용’관모로, 성균관 안이나 집안에서만 사용했고, 외출시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위에 소개한 모자는 남성들의 기본적인 모자들이다. 모자를 그냥 두면 망가질 수 있어 담아두는 보관함이 따로 있었다. 알면 알수록 조선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모자를 중요하게 여겼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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