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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작성자iris|작성시간03.04.11|조회수189 목록 댓글 0
589년에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그간
남조와 북조, 북방의 유연(柔然) 및 돌궐(突厥),
그리고 고구려 사이의 세력균형에 의해서 유지되어 오던 국제질서는
급격히 와해되어 가고, 주변 제국들은 아연 긴장하게 되었다.
고구려 역시
남북조의 분열 구조 속에서 북계(北界)의 안정을 추구해 왔던
이제까지의 외교전략을 전면 개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먼저 고구려는 수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수의 군사 압력에 대처하는 한편,
신라에 압박을 가해 옛 세력권을 회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행위를
수는
자신들 중심의 세계제국 건설에 대한 노골적 반발로 인식하여
외교 경로를 통해 통렬한 비난과 협박을 하였다.
두 나라 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598년에 고구려 영양왕은
1만의 말갈병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함으로써,
양국 사이의 본격적인 대결국면에 불을 당겼다.
이 선제 공격은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요서지역 거란과 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수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나라의 문제는 이에 분노하여
수륙 30만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정벌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홍수와 전염병과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만을 남긴 채 실패하고
성과없이 끝났다.
문제는 더 이상 고구려 정벌의 엄두를 내지 못한채 사망하였다.




그 아들 양제가 즉위하여 고구려 정벌을 위한 준비를 진행해 갔다.
고구려는 수의 1차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요서지역으로 세력을 지속하여 확대하여감으로써
수를 극도로 자극하였다.
마침내 수 양제는 611년 2월에 전국에 군사 동원령을 내리고,
612년 1월에 고구려를 비난하는 장문의 조서를 선포하고
고구려 정벌을 개시하였다.
이 때 동원된 수의 군대는 113만 3,800여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차례로 출발하는 데만도 무려 40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 규모는 가히 천문을 헤아렸다.

수의 대군은 요하를 건너 1차 관문인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5개월이 지나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양제는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宇仲文)에게 30만 5천의 별동대를 주어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고,
내호아(來護兒) 등에겐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 어구로 상륙하여
육군에 대한 전쟁 물자를 조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내호아의 수군은 일찌감치 대패하고 말았으며,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육군은 장거리의 진군으로 지쳐 있었고
전쟁 물자마저 보급받지 못하여 사기는 저하될대로 저하되었다.

고구려의 총사령관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러한 적의 실상을 간파하고,
거짓 패주하는 체 하면서
수나라군을 평양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깊숙히 유인하였다.

급속한 행군으로 고구려군을 추격하면서 피로에 찌들린 수의 별동대는
평양성의 완벽한 방어태세에 기가 질린데다
군량의 보급마저 오래 끊겨 사기가 최악에 이르렀다.
이 때 을지문덕은
유명한 오언시(五言詩)를 지어 적장 우문술에게 보내고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이는 적을 희롱하면서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깊은 심리전술이었다.



을지문덕이 의도한 대로
과연 수나라군은 고구려의 거짓 항복을 구실로 즉각 퇴각하기 시작했다.
퇴로를 열어주면서 기회를 엿보던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이 살수(薩水)[청천강]를 건널 즈음에 집중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30만을 상회하던 수나라 별동대 중에서 압록강을 건너 살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하였다 한다.

이것이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수 양제는 전쟁에서 실추된 대국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
곧바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여,
그 이듬해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전쟁 초반에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고 판단한
양제는
공성(攻城) 무기를 총동원하여 요동성 공략에 몰입하였으나,
20여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 때 후방에서 군량 수송의 책임을 맡고 있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가 날아들어,
수나라군은 급히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침략과 그 실패로 인한 수나라의 폐해는 엄청났다.
양현감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권력층 간의 갈등은 더욱 격심하게 치달았고,
패전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정황에서도 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집요하게 도모하여,
614년에 또 한차례 대규모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다.
고구려는 그간 쉴 사이없이 계속되는 수의 공격에 국력이 소잔해져
더이상 정면으로 대결하기가 힘겨워
수나라에 영양왕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수 역시 내부 분란에 휩싸여 있어 조그만 승리에 만족하면서
고구려의 강화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군대를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수는 극도의 전쟁 폐해에 시달리다가
617년 양제가 살해되면서 건국 38년만에 왕조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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