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프랑스 외인부대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나
수많은 국적이 모인 부대 내에서 한국인의 특성이
묘사되는 부분도 있군요
프랑스 외인부대 꿈… 환상… 환멸!
(사진/한국인 외인부대원 백성호(왼쪽)씨가 훈련장에서 동료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한국주재 프랑스대사관은 요즘 프랑스 외인부대(레종 에트랑제)의 지원절차를 묻는 한국인들의 전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들어 늘어나기 시작한 문의전화가 연말을 지나 새해를 넘어서고도 하루에 30∼40통에 이르고 있다.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여름부터 엄청나게 늘었다. 주로 어떻게 하면 외인부대에 갈 수 있는가 하는 절차와 월급 수준에 대한 문의가 많다”고 설명한다. 대사관에는 문의전화와 함께 하루 7∼8명이 직접 찾아오고 있다. 대사관쪽은 밀려드는 외인부대 지원자들 때문에 일부러 지원양식을 만들어 수십부를 정문에 비치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며칠 지나지 않아 금세 동이 나고 만다. 지난 97년까지만 해도 외인부대에 대한 문의가 한달에 기껏해야 서너명에 그칠 정도로 미미했던 데 비하면 엄청난 열풍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에서 외인부대원은 흔히 ‘케피 블랑’이라고 불린다. 프랑스말로 ‘하얀 모자’를 뜻하는 케피 블랑은 외인부대원들의 모자가 흰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63년 독일에 광부로 파견되었던 2명의 한국인이 최초로 입대한 이래 최근 들어 케피 블랑이 되고자 하는 한국 젊은이들이 프랑스로 몰려들고 있다. 현재 전세계 138개국 출신 8500여명으로 구성돼 있는 외인부대에는 한국인이 100명 정도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숫자는 아시아에서는 중국 일본을 제치고 가장 많은 수치다. 40여명에 불과했던 한국인의 숫자가 1년 사이에 두배 이상 늘어났다. 무슨 까닭일까.
이러한 ‘외인부대 열풍’의 가장 큰 이유는 IMF로 상징되는 한국의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비교적 높다고 알려진 봉급과 5년간의 복무를 무사히 마치면 주어진다는 ‘프랑스 국적’이 한국 젊은이들을 외인부대에 불러들이는 커다란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세계최고의 강한 군대’로 알려진 외인부대에 도전하려는 모험형 지원자까지 가세하면서 외인부대 열풍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떠올랐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전해질 뿐이던 프랑스 외인부대가 먼 이국땅에서 숱한 한국 젊은이들의 뜨거운 가슴을 ‘돈과 명예’로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인부대 열풍’에는 무엇보다 언론과 출판의 영향이 컸다. ‘취업’이라는 화두를 안고사는 요즘 시대에, 몇몇 출판물로 알려지기 시작한 외인부대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취업대상으로 각광받았고, 이를 뒷받침하듯 외인부대를 소개하는 언론보도가 줄을 이었다. 당연히 취업하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외인부대는 높은 보수를 받으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6월 외인부대 출신인 이창형(35)씨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외인부대원 Lee>(한림미디어)라는 책을 펴냈을 때 그 반향은 대단했다. 게다가 이 책이 몇몇 중앙일간지를 통해 소개되면서 프랑스 외인부대는 절망에 빠진 이 땅의 20대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수 있는 탈출구로 다가섰다. 이어 지난해 말 ‘외인부대에 좀더 쉽게 입대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로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이라는 사설학원까지 생기자 외인부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사진사로 일하고 있는 임영석(24)씨는 전형적인 ‘IMF형 지원자’다. 대학 사진과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공부를 포기하고 군에 다녀온 임씨는 요즘 사진을 찍어 가족을 부양하고 있지만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외인부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특별한 동기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에서 학벌도, 배경도 없는 내가 인정받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외인부대만큼은 노력하는 만큼 대우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임씨는 외인부대에서 돈을 벌어 부모님께 집을 한채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알려져 있는 ‘외인부대’는 언론에 의해 그 실체가 다분히 부풀려진 측면이 적지 않다. 그동안 외인부대를 다룬 대부분의 언론보도가 ‘새로운 취업의 길’이라는 점에만 몰두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 전달하지 못한 탓이다. 특히 <외인부대원 Lee>의 경우 저자인 이씨의 경력이 상당부분 부풀려진 데다 내용까지 사실과 다른 측면이 많은데도 언론보도는 이씨와 외인부대를 ‘용기’와 ‘희망’ 등으로 묘사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의 설립자 역시 경력을 부풀리는가 하면 교육 내용이 부실함에도 한 스포츠신문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외인부대의 이상 열풍을 더욱 부추겼다.
프랑스 현지에서 외인부대의 실체를 접해본 많은 경험자들은 이러한 국내의 외인부대 열풍을 “환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돈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지 말 것을 당부한다. 실제 봉급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 물가가 비싸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적 취득의 경우 무사히 5년을 마치기도 어렵지만 마친다 해도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해야 그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는데, 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생활 5년으로는 어렵다고 이들은 전한다. 무엇보다 돈이나 명예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외인부대원의 생활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죄책감과 환멸로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 독립프로덕션 <다큐-인>의 비디오저널리스트 김도균씨가 프랑스 현지에서 ‘외인부대 안의 한국인들’을 만난 뒤 그 취재기를 <한겨레21>에 보내왔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외인부대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사람,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둔 사람, 5년을 넘기고도 계속 남아 있는 사람 등 외인부대 안 한국인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6mm 디지털비디오카메라에 담긴 이 내용은 곧 한 공중파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지금도 ‘취업의 대안’으로써, 또는 ‘최고의 남자’가 되기 위해 케피 블랑을 꿈꾸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 현지취재기는 프랑스 외인부대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거품 가득한 한국인 지원열풍의 내면
마르세유·아비뇽 현지 취재로 밝힌다
(사진/훈련소의 외인부대원들. 전세계 138개국 출신 8500명 중 한국인은 100명 정도다.)
98년 12월2일 월요일 저녁 8시 파리 리옹역. 마르세유나 니스 등 프랑스 남부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대합실 한켠에 건장한 청년 20여명이 줄을 서서 하얀 입김을 불어댔다. 여러 인종이 뒤섞인 이들을 인솔하는 이는 외인부대의 하얀 군모를 쓴 외인부대의 카프랄(병장)이었다. 스포츠점퍼나 러시아군의 야전점퍼 같은 것을 걸치고 배낭을 둘러멘 청년들의 대부분은 러시아나 폴란드 같은 동구권 사람들로 보였지만 흑인이나 아시아 사람도 여럿 섞여 있었다. 이들은 자뭇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다른 승객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역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훈련내용과 월급에 대부분 실망
오후 9시30분 인솔하는 병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청년들은 줄을 맞춰 열차의 2등칸에 마련된 객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날은 때마침 벌어진 프랑스 철도기관사들의 파업여파로 출발시간이 늦어졌지만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9시면 어김없이 외인부대원을 싣고 떠나는 열차였다.
(사진/알프스산맥 이탈리아 국경 바르셀로나트 훈련장에서의 분대단위 사격훈련)
11월16일 방문한 카스텔로다리(Castelnaudary)의 제4외인연대에는 20여명의 한국출신 대원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주로 지난해 7월부터 9월 사이에 입대한 이들은 7개의 각 훈련중대별로 고르게 퍼져 있었다. 부대와 당사자들의 양해를 얻어 다음날 한 내무반에서 , 한국에서 해병대원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경찰관 임용시험을 준비하다 온 진주현씨는 6명의 한국인 대원을 만났다.
이병기씨는 지난 96년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때 실전을 치른 적도 있는 공수특전단 중사출신이었다. 그는 지난해 5월 전역하고 특전사 동기인 이상진씨와 함께 지난해 7월 프랑스로 와서 나란히 입대했다. 4개월의 훈련을 거의 마치고 운전교육만 남겨놓고 있는 그는 훈련이 끝나면 아비뇽에 있는 제6외인공병연대를 지원하여 전문폭파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외인부대의 훈련과정은 그리 녹녹지 않게 느껴졌다. “제일 어려운 점은 역시 언어문제입니다. 4개월의 훈련기간을 통해 여러 시간의 불어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도 힘듭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안내장교가 훈련기간 동안 500개의 기본 불어단어를 암기하고 쓸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여기에 대부분의 한국인 훈련병들이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오기 때문에 20세 중반 이후라는 점도 적응을 고달프게 한다고 이씨는 말했다. 혈기왕성한 다른 나라 훈련병들을 따라가기가 체력적으로 벅찬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 훈련병들은 대부분 카스텔로다리에서 4개월의 훈련을 받으면서 한번쯤 실망하게 된다고 말했다. 람보들만 득실거리는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쯤으로 생각하고 지원했던 사람들은 한국군 신병교육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훈련강도와 내용에 실망하고, 돈을 목적으로 입대했던 사람들도 외인부대가 쉽게 돈 벌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입대 뒤 카스텔로다리에서 받게 되는 첫 월급은 약 5천프랑(125만원) 정도. 하지만 이 돈을 모두 저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의무복무를 하는 한국군과는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한국군에서는 그냥 지급되는 많은 보급품들을 이곳에서는 내가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치약이나 비누 같은 소모품부터 배낭이나 야전상의, 하다못해 행군을 가더라도 내가 먹을 것은 내 돈을 주고 준비해야죠. PX라고 해서 바깥세상보다 물건값이 싼 것도 아니구요.” 실제 이곳 외인부대 안 PX에서는 전투화를 780프랑, 고어텍스 소재로 된 위장파카를 1330프랑에 팔고 있었다. 누가 사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외인부대에서 근무하는 데 필수적인 장비들은 자신의 부담으로 사야 한다는 얘기였다.
코리아 마피아
외인부대 안에서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좀 별난 사람들이다. 다른 나라 출신 외인부대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온 지원자를 만나도 몇마디 말만 건네고 지나가는데 한국인 대원들 사이의 결속력은 대단하다. 한국인 지원자가 들어오면 몰래 담배를 건네고 캔맥주를 품에 넣고 담을 넘어서까지 후배 지원자들을 만나러 오기 때문이다. 카스텔로다리의 제4외인연대에서 만난 6명의 한국인 훈련병들도 모두 똑같은 시계를 차고 있었다.
“우리끼리 한 약속이 있었죠.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한국에 욕먹이는 일은 없게 하자구요. 여기 있는 우리들 가운데 다리나 무릎이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병원 갈 일이 있어도 꾹 참습니다. 덕분에 외인부대 안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은 편입니다.”
이런 결속력 때문인지 이곳 외인부대원들 사이에서 한국대원들은 흔히 코리아 마피아라고 불린다. 한국인 대원들의 소속도 주로 전투병이다. 특히 외인부대 중의 외인부대라고 불리우는 제2외인공수연대에는 20여명의 한국인 대원이 있다. 60여명 가량되는 중국인 대원들이 4∼5명을 제외하고는 주로 식당에서 근무하는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이곳에서는 동양인을 보면 시누아라고 부릅니다. 중국인이라는 뜻인데 조금은 경멸적인 뜻을 담고 있지요. 다른 아시아 출신 대원들은 이 말을 듣고도 그냥 지나가는데 비해 유독 한국 출신 대원들은 이 말을 견디지 못하지요. 나는 시누아가 아니라 코레앙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데 외인부대 안의 한국인들은 누구라도 한두번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한국인 대원들간에도 지켜야 할 불문율은 있다. 한국에서는 무엇을 했었는지, 어떤 사연으로 외인부대에 입대하게 되었는지, 개인의 신상에 대하여 묻는 것은 금기시돼 있다. 서로간의 호칭도 개인적으로 친해지기 전까지는 이름을 붙여 무슨 씨(氏)라고 존대해 부른다.
지난 11월19일 아비뇽 교외의 제6외인공병연대 본부를 거쳐 6시간 동안 차를 달려, 알프스산맥 속 작은 마을 바르셀로나트에서 겨울철 산악훈련을 받던 2명의 한국인 대원을 찾았다. 그들은 소속 중대의 동료 대원들과 함께 해발 2800m의 눈덮인 산에서 스키를 이용한 설상기동훈련과 암벽등반훈련을 받고 있었다.
낭만적인 생각을 버려라
(사진/96년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때 실전을 치르기도 했던 특전사 중사출신 이병기씨. 그뒤로 왼쪽부터 진주현, 권용만, 김동조씨)
“외인부대는 프랑스군의 핵심 기동전력입니다. 때문에 모든 훈련은 철저히 실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중대도 도시전투가 주임무지만 이렇게 산악훈련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전투를 치루어야 할 곳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산악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막이나 정글일 수도 있지요.”
중대장 야니크 블랑쉬(Yannick Blanche) 대위의 설명을 들으며 훈련중이던 2명의 한국인 대원들에게 다가갔다. 한 대원은 “이제 나는 프랑스 국적자”라며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다른 대원은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자 입을 열었다. “외인부대는 프로페셔널한 군대입니다. 겉보기에는 한국군 훈련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모든 훈련 스케줄은 철저히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한국군에서는 혹한기나 혹서기에는 기온이나 기상상태에 따라 훈련이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일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지요. 실제로 행군중에 아무 경고도 없이 수류탄을 던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항상 긴장해 있어야 하고, 모든 훈련에는 철저한 평가가 뒤따라서 만일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대원은 바로 영창을 가게 됩니다.” 그는 또 “이곳에선 상급자가 얼차려를 줄 때도 한국과는 달리 함께 한다”고 말했다. 상급자 스스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10일간의 외인부대 내 취재가 끝나고 파리로 돌아가기 전 마르세유의 한 베트남 음식점에서 ㅇ씨를 포함한 8명의 한국인 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A씨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 얼굴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급, 근무하고 있는 부대도 일절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부산출신으로 한국의 육군과 공군에서 10여년간 군 복무를 했고 외인부대에서는 6년째 생활하고 있다는 그는 외인부대 내 한국인 대원들에게는 맏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지금 맡고있는 일은.
“연대 저격병 훈련 프로그램의 교관을 맡고 있다.”
-언제부터 외인부대 안에 한국인들이 늘어났는가.
“100여명의 한국출신 대원들 가운데 반 이상은 최근 1년 사이에 입대한 사람들이다. 내가 입대하던 93년만 해도 한국인은 10여명에 불과했고 2∼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인과 일본인이 더 많았다.”
-한국인들이 늘어난 특별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돈 때문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외인부대에 지원한다면 그 사람은 배겨나지 못한다. 이곳에서 받는 월급으론 자기생활하는 것만도 빠듯하다. 목돈을 쥐려면 해외파견을 나가야 하는데 이것도 자신이 원한다고 아무때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불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고. 외인부대 안에는 언어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3년이고 4년이고 진급도 못하고 주방에서 허드렛일이나 사역만 하는 사람들이 숱하다. 실제 지난 4월에는 한 한국출신 대원이 집에 보내 달라고 연병장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손목동맥을 칼로 끊는 자해사건도 일어났다. 외인부대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절대로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외인부대 근무중 특별히 금지되는 일들이 있다는데.
“원칙적으로 5년의 근무기간중 휴가를 얻더라도 프랑스 바깥으로는 여행할 수 없다. 자동차나 집도 살 수 없고 결혼도 하지 못한다. 지지난해까지는 통장도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나처럼 본인이 원해 가명을 쓸 경우엔 5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즉 외인부대를 떠나기 전까지는 앞서 말한 어떤 일들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부대의 허가없이 인터뷰하는 것도 영창 들어갈 사유가 충분히 된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프랑스 사람들은 외인부대를 익명의 부대라고 부른다. 외인부대 정복에는 명찰이 없다. 외인부대원을 자신의 과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이유라고 들었다. 나도 동의한다.”
-외인부대 근무중 한국에 가본 적이 있는가.
“입대한 이후로 6년 동안 한번도 가지 못했다. 가고는 싶지만.”
“우리는 프로페셔널 군인”
ㅇ씨가 말문을 닫으려 할 즈음 한자리에 있던 백성호(28)씨가 거들고 나섰다. 백씨는 2년째 외인부대생활을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은 2년여의 군대생활도 따분해하고 견디기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나 자신이 좋아하지 않고 맞지 않는 일은 견디기 어렵지요. 이곳은 군대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외항선을 타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것도 철저히 이 일을 즐기고 미치지 않고는 5년간의 근무는 한마디로 시간낭비입니다.” 백씨는 “고참인 ㅇ씨만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세계 곳곳에 주문해 구한 탄도학, 총기에 관한 책들이 수십권 된다”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밤을 새워 연구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전했다.
“몇년 전 분대장으로 아프리카의 지부티에 근무할 때의 일인데 정찰을 나가면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찾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부대 내 PX에서는 GPS(위성위치관측시스템)를 500프랑에 팔고 있었죠. 물론 지도와 나침반을 쓴다고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GPS가 있으면 작전을 나가도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 곳이 외인부대입니다.”
백씨에게 혹시 인종차별이나 아시아인으로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는지 물어봤다. “외인부대에 입대하게 되면 누구나 외워야 하는 외인부대원의 수칙이 있습니다. 그중에 모든 외인부대원은 국적과 종교, 인종을 떠난 형제들이란 구절이 있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고, 아무래도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이다 보니 차별이나 불평등 같은 것이 없을 수는 없지요. 또 지금은 아무래도 폴란드나 체코 같은 동구권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텃세 같은 것도 있고…. 그래서 툭툭 머리를 친다거나 노골적으로 욕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고 넘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계속 그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지요. 그래서 저도 몇번 치고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싸움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싸움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귀국 뒤의 일에는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0대와 30대의 세월을 5년 이상 외국군대에서 보낸 자신들이 한국에 돌아갔을 때 극심한 경쟁사회 속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백씨는 5년의 복무를 마치면 벨기에의 용병회사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프랑스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외인부대에서는 큰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라 마르세즈>(프랑스국가)를 들을 수 없습니다. 외인부대 군가는 항상 연주되지만요. 또 우리는 프랑스 국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합니다. 하지만 눈길은 프랑스 국기가 아닌 외인부대 깃발을 향해 있지요. 우리는 프로페셔널 군인입니다.”
“내가 왜 세르비아군을 죽였는가”
괴로운 기억 속에 한동안 방황했던 황석규씨, 죄책감 씻을 새 길 준비
(사진/보스니아에서의 황석규씨. 이곳에서 6개월 전투를 치렀던 그는 중앙아프리카에서도 한달가량 실전에 투입됐다.)
서울 구기동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만난 황석규(31)씨는 지난 95년부터 97년 1월까지 외인부대원 생활을 했다. 그는 해병대에서 하사관으로 제대한 뒤 몇군데의 직장을 전전하다가 손댄 사업에 실패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배신 당해 죽을 곳을 찾는다는 심정으로” 프랑스로 가 외인부대에 입대했다고 했다.
“해병대 시절 동료에게 프랑스에 그런 부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외인부대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요. 물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에 외인부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외인부대에 입대하는 사람들 거의가 그만한 사연들은 다 가지고 있을 겁니다.”
외인부대원이 된 황씨의 병과는 폭파병. 입대한 해인 95년엔 보스니아에서 6개월, 이듬해엔 중앙아프리카에서 한달 가량 실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황씨의 지난 경험은 결코 남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기억이다.
“처음에는 내가 죽지만 않으면 전쟁도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었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더군요. 멀리서 사격할 때는 적이 누구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교전이 끝난 뒤 쓰러져 있는 적을 확인사살하는 일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옆 침대에서 한솥밥을 먹던 전우가 전사해도 막사로 돌아온 우리들은 캔맥주를 마시고 떠들어댔죠. 전투중에는 나무 뒤나 웅덩이에 머리를 쳐박고 숨어 있다가 교전이 끝나면 기어나와서 사살된 세르비아군의 주머니를 뒤지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도 보았습니다. 그래도 적의 죽음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었겠지만, 한국인인 내가 그 세르비아군들을 죽일 이유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그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많이 괴로워했었죠.”
황씨는 자신도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사라예보 시내에 ‘저격수 거리’라고 불리던 곳이 있었습니다. 제 보직이 폭파병이라 그 거리의 한 건물을 폭파하는 임무를 받았죠. 어느 날 그 건물에 들어가 폭약을 장치하고 기다리는데 나오라는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리다 이상해서 창문 너머를 보니 이미 아군은 철수하고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무전기에서 ‘철수’ 비슷한 말이 들렸던 것 같다는 생각이 나더군요. 황급히 달아나다가 하반신에 크레모아 파편 세례를 받았죠.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내가 ‘철수하라’는 불어를 못 알아들어 생긴 일이었습니다.”
황씨는 결국 누군가를 죽였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휴가 때 한국으로 돌아와 복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도 그에게 안식처가 되지는 못했다. “적응하기 힘들었죠. 술자리에서 사소한 싸움이 벌어져도 누군가를 죽이기 직전까지 갑니다. 얼마 동안 사귀던 여자도 내 전력을 알게되자 아무말 없이 떠나가더군요.”
한동안 방황하던 황씨는 지금 119 구급대원이나 경찰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황씨는 그게 자신이 죽여야 했던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인부대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갈 곳은 아닙니다.” 외인부대원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황씨의 충고다.
“한국출신 대원, 언어가 큰 문제”
인터뷰/베르투 외인부대 공보장교
오바뉴에 있는 외인부대 본부를 찾아 공보장교 베르투 대령을 만났다. 생시르(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그는 “한국인 대원의 질이 아주 우수하다”며 상당히 친절한 태도로 부대를 소개했다.
-외인부대의 편성은.
=현재 프랑스 외인부대는 육군 중장의 지휘를 받는 군단(LEGION)으로, 9개의 연대와 분견대로 편성되어 있다. 장교 450명, 하사관 1600여명을 포함해 8500여명이다. 장교의 10%, 하사관의 70%는 외인부대 사병으로 입대해서 승진한 사람들이다. 부대원의 출신 국가는 세계 138개국이며, 한국인 대원은 100여명쯤 된다.
-한국출신 대원에 대한 평가는.
=나를 포함한 외인부대 장교들은 한국인 대원들을 깊이 신뢰한다. 한국출신 대원들에게는 언어가 가장 큰 문제지만,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곧 한국인 가운데서도 장교가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5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난 뒤 혜택은.
=원칙적으로 외인부대에서 3년 이상 복무하면 프랑스 거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물론 신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근무기록 심사를 거쳐 대략 10% 정도에게 주어진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5년간의 복무를 마치면 거의 모든 대원들에게 프랑스 거주가 허용된다. 8년 이상 근무한 대원에게는 45개월치의 월급이 일시불로 지급되고, 15년 이상 근무했을 때에는 연금혜택도 있다.
-프랑스말고도 외인부대를 유지하는 나라가 있는가.
=프랑스와 영국뿐이다. 하지만 영국의 구르카군이 네팔인들로만 이루어진 데 비해 우리 외인부대는 말 그대로 전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 사람들로 구성되는 다국적 외인부대이다.
-지금도 프랑스가 외인부대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831년 외인부대가 생긴 이래 외인부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그 기회를 주고 있다. 지난 167년의 역사를 통하여 대략 60여만의 젊은이들이 외인부대의 군복을 입었다. 우리는 그 전통이 앞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프랑스가 외인부대를 유지하는 이유와 관련해선 베르투 대령의 의례적 답변과는 달리, 취재중에 만난 한 외인부대의 장교로부터 비교적 솔직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첫번째 이유는 자국민 보호이다. 약 23만명의 프랑스 육군은 대다수가 10개월의 짧은 의무복무를 하는 사병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외인부대는 그 수십배 이상의 보수를 받는 지원자들이다. 인명손실이 예상되는 분쟁지역에 프랑스 정규군을 투입했을 때의 정치적 부담은 상당히 클 것이다.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외인부대의 투입은 정규군을 투입했을 때의 부담에 비길 바가 아니다. 또다른 이유로는 외인부대 스스로가 지난 역사 동안 쌓아올린 우수한 전투집단으로서의 전통 때문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외인부대는 아주 효율적이고 기동성 있는 전투집단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외인부대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였다. 3년 뒤면 지금의 징병제가 지원병제로 전환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유럽통합의 추세와 프랑스의 높은 실업률을 감안한다면 지금과 같은 수준의 외인부대를 프랑스가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까다로운 신원조사, 빡빡한 훈련
‘케피 블랑’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사진/3차에 걸친 면접과 최종면담을 거쳐 입대가 허용되면 지원자는 비로소 머리를 깎고 군복을 맞춘다. 황석규씨의 신병 때 모습.)
외인부대에 지원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선 프랑스 전국에 산재한 외인부대 분견소를 찾아가거나, 입국한 공항에서 경비경찰에게 “I want kepi blanc”이라고 말하면 곧바로 외인부대 헌병을 연결해준다.
대부분의 한국인 지원자들은 샤를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해 파리 북동쪽 폴드노종에 있는 분견소를 찾아간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성곽에 있는 이 분견소에 도착해 정문 위병에게 외인부대 입대의사를 밝히면 간단한 심사를 한 뒤 3∼4일의 대기기간을 거쳐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근처 오바뉴에 있는 제1외인연대로 옮겨진다.
오바뉴의 제1외인연대에서는 체력테스트, IQ 및 인성테스트와 함께 지원자의 신상에 대한 엄격한 조사를 거치고 지원자에 따라서 짧게는 2∼3주, 길게는 2개월을 대기하게 된다. 지원자에 대한 신원조사는 인터폴과 출신국가의 경찰기관을 통한 신원조회, 본인의 프로필 진술 등 매우 까다롭다. 전과기록이 있으면 입대는 극히 힘들어진다. 범죄자의 입대는 불가능하다. 만약 범죄자임이 드러나고 출신국가와 범죄인 인도협정이라도 맺어져 있다면 외인부대에서 바로 출신국으로 강제송환되는 일도 있다. 3차에 걸친 면접과 최종면담을 거쳐 입대가 허용되면 지원자는 비로소 머리를 깎고 군복을 맞추고 피레네산맥 기슭, 인구 4천명의 소도시 카스텔로다리에 있는 제4외인연대로 보내어진다. 외인부대쪽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입대하는 인원은 연간 지원자 9천여명 가운데 1천명 미만이다.
제4외인연대는 외인부대의 훈련소격으로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4개월간의 신병훈련에 들어가게 되는데 첫 한달간은 훈련중대별로 마련된 농장에서 체력단련을 위주로 한 빡빡한 훈련을 받게 된다고 했다. 한달간의 훈련이 끝나갈 무렵 약 50Km의 행군을 마치게 되면 비로소 ‘캐피 블랑’이라고 불리우는 외인부대의 하얀 군모를 쓰는 의식을 갖게 된다. 고색창연한 중세의 성벽 아래서 주로 밤에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이루어지는 이 의식은 외인부대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건 뻥이야…”
프랑스 외인부대 가짜경력으로 한국에서 장사한 사람들
(사진/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 설립자 김씨는 경력이 문제가 되자 교육원에서 손을 뗐다. 정보교육원 내에 외인부대 주요보급품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11월 초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에 ‘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이라는 이름의 사무실이 문을 열었다. 당시 교육원은 프랑스 외인부대 입대를 위한 모든 정보를 지원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립취지를 내세웠다. 외인부대의 지원절차와 시험과목 등을 프랑스 현지와 똑같이 만들어놓고 지원자들이 좀더 쉽게, 탈락하지 않도록 교육한다고 교육원은 밝혔다.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외인부대 입대가 하나의 비즈니스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교육원 교육과정 과연 효과있을까
교육원을 세운 김아무개(29)씨는 설립 당시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인부대에서 6개월 동안 행정병으로 의무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며 “현지에서 외인부대를 찾지 못해 열흘을 헤맸을 정도로 정보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후배 지원자들을 위해 교육원을 차리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외인부대 지원자들에 대한 상담과 합격률 제고를 위해 현지의 선발과정을 그대로 재현한 특별과정을 3주과정으로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교육원은 ‘프랑스 외인부대 지원자 모집’이라는 광고를 생활정보신문에 대대적으로 실었다. 외인부대 평균 합격률이 10% 정도지만 교육원의 교육과정을 거칠 경우 합격률은 70%를 넘어선다는 광고도 빼놓지 않았다.
(사진/프랑스 외인부대 지원열풍에 기폭제가 됐던 이창형씨의 수기. 96년부터 13개월 근무했던 저자는 5년 근무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외인부대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사실상의 입시학원을 표방하고 나선 교육원의 교육과정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교육원쪽은 수시로 바뀌는 선발시험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한달에 한번씩 교육원의 직원을 외인부대에 지원시켜 최신정보를 교육과정에 반영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과정은 외인부대 선발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프랑스에 대한 소개나 외인부대의 계급체계와 봉급, 복지혜택에 대한 설명, 부대 내 식사이용과 내무반 이용, 불어교육 등이 교육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외인부대의 형식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IQ테스트나 인성테스트, 정신테스트 등에 대해서도 경험자들은 “연습을 해서 좋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비용도 지나치게 많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교육원에 찾아온 지원자들은 간단한 신체검사와 함께 상담을 할 경우 8600원만 내면 된다. 하지만 이후 3주간의 교육과 함께 자격증 번역, 여권발급 대행 수수료, 왕복항공료를 포함한 수속비용을 더하면 모두 187만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험자인 송아무개(26)씨는 “프랑스에서 외인부대에 접하는 방법은 다양하고도 쉬워 부대비용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며 “여행 비수기인 요즘 프랑스 왕복 비행기요금은 60만∼7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합격률 70%라는 수치에 대한 교육원의 설명도 어설프다. 교육원쪽은 설립자인 김씨 자신이 외인부대 선발과정에서 경험한 노하우를 지원자 5명에게 특별히 교육시켜 프랑스로 보낸 결과 4명이 합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교육원은 자체 제작해 1만원씩에 판매하던 자료책자에 합격률 70%를 명시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씨의 주장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김씨가 교육시켰다는 지원자가 프랑스에 있을 시기에, 외인부대에 합격한 ㅂ씨에 따르면 한국인 합격동기생 가운데 교육원 출신은 한명도 없었다. 올 들어 교육원의 자료에는 합격률 70% 부분은 삭제됐다. 하지만 전화상담에서는 여전히 70% 합격이라는 선전이 빠지지 않고 있다.
1년 경력이 5년 경력으로 둔갑
무엇보다도 설립자 김씨의 경력이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지난 98년 4월 외인부대에 입대해 훈련을 마친 뒤 같은 해 10월에 복무계약을 파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발간되는 한인 소식지 <한위클리> 10월2일자 독자투고란에 실린 ‘재불한인사회 왜 사기행각 계속되나?’라는 제목의 투고는 이러한 김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파리에서 LEEKS INTERNATIONAL이라는 업체를 운영하는 이아무개씨가 투고한 기사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해 5월 프랑스에 와서 외인부대에 지원했다가 오바뉴에서 탈락해 한달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김씨는 이씨를 찾아왔고, 이씨는 이런 김씨가 딱해 보여 아르바이트를 주었는데 같은 해 9월 이씨의 돈 1만2천프랑(약 300만원)을 가지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씨는 “김씨의 외인부대 경력은 모두 허위”라며 “한국의 스포츠신문에 실린 김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수소문 끝에 김씨의 연락처를 알아내 여러차례 돈을 갚을 것을 요구했지만 돈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씨의 경력이 문제가 되면서 그는 교육원에서 손을 뗐다. 애초 김씨와 손잡고 교육원을 운영해오던 김태환씨는 “아예 탈락한 것은 아니고 합격 뒤 곧바로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다른 것을 알고 교육원과의 인연을 끊도록 했다”고 말했다.
지난 12월 정보교육원을 통해 프랑스에 갔다가 입대에 실패하고 돌아온 신아무개(28)씨는 “교육원을 통해 알고 온 것과 현실이 너무나 달라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씨는 “누구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며 “대사관에서 배부하는 안내문에 나와 있듯이 지원에 따른 모든 책임은 결국 ‘지원자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지난해 6월 출간돼 외인부대 열풍의 기폭제가 됐던 <외인부대원 Lee>(한림미디어)의 저자 이창형씨의 경력도 과장됐기는 마찬가지다. 이씨는 책에서 자신은 지난 91년 외인부대에 입대해 5년 만기를 40일 앞두고 스스로 나와 귀국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씨는 지난 96년에 입대했고, 1년 조금 넘는 기간만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보다 두달 먼저 입대한 황아무개씨는 “지난 96년 오바뉴의 훈련소에서 신병으로 들어온 이씨를 처음 봤고, 이후로도 몇차례 서로 인사를 나눴다”고 밝혔다. 이씨의 책을 츨판한 <한림미디어> 발행인 김래남씨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 이씨가 원고를 가지고 와 검토해보고는 새로운 얘기라고 생각해 출판하게 됐다. 모든 원고는 이씨가 썼고, 출판사는 교정만 봤다. 그뒤 4개월 정도가 지난 98년 10월 말께 이씨의 경력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발행인 김씨가 설명하는 출판경위다. “글의 완결성을 위해 복무기간을 조금 부풀렸다. 그러나 책의 다른 부분은 모두 사실이다. 외인부대를 미화하려고 쓰지는 않았다. 고임금이니 프랑스 국적의 혜택이니 하는 것은 언론에서 입맛대로 재생산해낸 것이다.” 이씨 자신이 오히려 언론의 피해자라는 해명이다. 한림미디어 김씨는 “이씨의 경력이 허위로 드러난 뒤부터는 책에 대한 광고를 일체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인부대 열풍의 뿌리는 허상인가
이 책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실제로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외인부대에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 출국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책을 보고 마음을 결정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정보교육원쪽도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이 책을 보고 온다고 밝히고 있다. “책이 출간된 뒤 회사에 지원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 하루 30통 이상씩 걸려왔다. 하지만 문의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념이 없어보여 입대를 권유하지 않았다. 특히 돈만을 보고 가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말리기까지 했다.” 한림미디어 발행인 김씨의 설명이다.
우리 사회를 달궜던 외인부대 열풍은 사실상 상당부분 허상 속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셈이다.
국제전 ‘용병시대’
민족·종교 분쟁지역 활동 점차 확대…89년 유엔서 ‘금지조약’채택도
(사진/명확한 계약체계와 명령계통을 갖춘 용병은 프랑스 외인부대가 처음이다.)
세계사에서 순수 계약에 의한 외인용병의 역사는 사실상 프랑스 외인부대 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도 외인용병의 기록은 간간이 있었지만 명확한 계약체계와 명령계통을 갖춘, 제대로 된 의미의 용병은 프랑스 외인부대가 처음이다.
체첸 용병에 골치 썩인 러시아군
외인부대는 1831년 7월혁명 와중에 프랑스 국왕에 오른 루이 필립이 창설했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불안 해소와 북아프리카 식민지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주로 유럽 각지의 망명정객들로 구성된 외인부대는 지금까지 168년 동안 전세계에서 3만여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프랑스의 별동대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외인부대는 1832년 오랑항 전투를 시작으로 스페인전투(1835년), 크림전쟁(1854년), 멕시코 카메론전투(1863년) 등을 거치면서 강력한 전투부대로 성장했다. 20세기 들어서도 외인부대는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차드, 지부티, 사라예보 등의 전투에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프랑스 외인부대를 비롯한 외인용병의 모습은 국제사회의 다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양태로 나타났다. 완전한 계약관계 속에 국가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는 프랑스 외인부대와는 달리 종교적 민족적 신념에 따라 다른 나라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돈만 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프리랜서 용병들도 세력을 확장했다.
지난 95년 체첸 사태 때는 돈을 받고 출동한 3천여명의 외인용병들때문에 정예 러시아군이 골치를 썩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의 기갑부대 공수부대 등 특수부대들은 일당 500달러 정도를 받는 전문 용병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체첸 대통령궁 접수에 애를 먹었다. 이들 용병 가운데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출신 무자헤딘 전사들이 5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 출신도 100명 이상으로 전해졌다.
20세기 후반 냉전이 끝나면서 외인용병의 활동 영역은 개별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민족분규와 종교분쟁 격화지역으로 확대되는 특징을 보였다. 지난 93년의 보스니아 내전은 용병활동의 이런 민족적 종교적 특징과 함께 온갖 성격의 용병이 한자리에 모여 혈투를 벌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외인부대는 보스니아 내전 지역에 700명 정도 투입됐다. 외인부대는 사라예보시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을 24시간 감시하며, 세르비아의 기독교계와 보스니아의 회교도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대치 현장에서 완충 역할을 했다.
이란과 이집트 터키 말레이시아 등 세계 각국 회교도들은 회교계의 보스니아를 돕기 위해 ‘회교도 외인부대’를 조직해 지하드(성전)를 벌였다. 크로아티아는 독일 극우세력과 영국 미국 등의 지원을 받고 날아온 국제용병들의 도움을 받았다. 세르비아 역시 러시아와 옛 소련 공화국, 그리스 등 정교국가가 지원하는 러시아 용병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당시 몇개월간 단기계약으로 파견되던 러시아용병의 몸값은 한달 25만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국가적 동지에서 약탈자로 변할 수도
이들 세나라의 용병들은 나름대로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는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을 위해 세계를 전전하는 용병들의 문제는 그 이전부터 국제사회의 논란거리가 돼 왔다. 이미 지난 89년 유엔에서는 ‘용병모집·사용·자금제공·훈련 등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을 채택했다. 전쟁프로인 용병들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운영이나 지원을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효력발생을 위해 필요한 22개국의 비준을 얻지 못해 사실상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당시 유엔의 한 보고서는 용병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이들이 민족적 종교적 국가적 동지일 수도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한 약탈자로 돌변할 우려도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한겨레21 1999년 01월 21일 제242호
수많은 국적이 모인 부대 내에서 한국인의 특성이
묘사되는 부분도 있군요
프랑스 외인부대 꿈… 환상… 환멸!
(사진/한국인 외인부대원 백성호(왼쪽)씨가 훈련장에서 동료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한국주재 프랑스대사관은 요즘 프랑스 외인부대(레종 에트랑제)의 지원절차를 묻는 한국인들의 전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들어 늘어나기 시작한 문의전화가 연말을 지나 새해를 넘어서고도 하루에 30∼40통에 이르고 있다.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여름부터 엄청나게 늘었다. 주로 어떻게 하면 외인부대에 갈 수 있는가 하는 절차와 월급 수준에 대한 문의가 많다”고 설명한다. 대사관에는 문의전화와 함께 하루 7∼8명이 직접 찾아오고 있다. 대사관쪽은 밀려드는 외인부대 지원자들 때문에 일부러 지원양식을 만들어 수십부를 정문에 비치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며칠 지나지 않아 금세 동이 나고 만다. 지난 97년까지만 해도 외인부대에 대한 문의가 한달에 기껏해야 서너명에 그칠 정도로 미미했던 데 비하면 엄청난 열풍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에서 외인부대원은 흔히 ‘케피 블랑’이라고 불린다. 프랑스말로 ‘하얀 모자’를 뜻하는 케피 블랑은 외인부대원들의 모자가 흰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63년 독일에 광부로 파견되었던 2명의 한국인이 최초로 입대한 이래 최근 들어 케피 블랑이 되고자 하는 한국 젊은이들이 프랑스로 몰려들고 있다. 현재 전세계 138개국 출신 8500여명으로 구성돼 있는 외인부대에는 한국인이 100명 정도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숫자는 아시아에서는 중국 일본을 제치고 가장 많은 수치다. 40여명에 불과했던 한국인의 숫자가 1년 사이에 두배 이상 늘어났다. 무슨 까닭일까.
이러한 ‘외인부대 열풍’의 가장 큰 이유는 IMF로 상징되는 한국의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비교적 높다고 알려진 봉급과 5년간의 복무를 무사히 마치면 주어진다는 ‘프랑스 국적’이 한국 젊은이들을 외인부대에 불러들이는 커다란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세계최고의 강한 군대’로 알려진 외인부대에 도전하려는 모험형 지원자까지 가세하면서 외인부대 열풍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떠올랐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전해질 뿐이던 프랑스 외인부대가 먼 이국땅에서 숱한 한국 젊은이들의 뜨거운 가슴을 ‘돈과 명예’로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인부대 열풍’에는 무엇보다 언론과 출판의 영향이 컸다. ‘취업’이라는 화두를 안고사는 요즘 시대에, 몇몇 출판물로 알려지기 시작한 외인부대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취업대상으로 각광받았고, 이를 뒷받침하듯 외인부대를 소개하는 언론보도가 줄을 이었다. 당연히 취업하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외인부대는 높은 보수를 받으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6월 외인부대 출신인 이창형(35)씨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외인부대원 Lee>(한림미디어)라는 책을 펴냈을 때 그 반향은 대단했다. 게다가 이 책이 몇몇 중앙일간지를 통해 소개되면서 프랑스 외인부대는 절망에 빠진 이 땅의 20대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수 있는 탈출구로 다가섰다. 이어 지난해 말 ‘외인부대에 좀더 쉽게 입대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로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이라는 사설학원까지 생기자 외인부대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사진사로 일하고 있는 임영석(24)씨는 전형적인 ‘IMF형 지원자’다. 대학 사진과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공부를 포기하고 군에 다녀온 임씨는 요즘 사진을 찍어 가족을 부양하고 있지만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외인부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특별한 동기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에서 학벌도, 배경도 없는 내가 인정받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외인부대만큼은 노력하는 만큼 대우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임씨는 외인부대에서 돈을 벌어 부모님께 집을 한채 사드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알려져 있는 ‘외인부대’는 언론에 의해 그 실체가 다분히 부풀려진 측면이 적지 않다. 그동안 외인부대를 다룬 대부분의 언론보도가 ‘새로운 취업의 길’이라는 점에만 몰두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 전달하지 못한 탓이다. 특히 <외인부대원 Lee>의 경우 저자인 이씨의 경력이 상당부분 부풀려진 데다 내용까지 사실과 다른 측면이 많은데도 언론보도는 이씨와 외인부대를 ‘용기’와 ‘희망’ 등으로 묘사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의 설립자 역시 경력을 부풀리는가 하면 교육 내용이 부실함에도 한 스포츠신문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외인부대의 이상 열풍을 더욱 부추겼다.
프랑스 현지에서 외인부대의 실체를 접해본 많은 경험자들은 이러한 국내의 외인부대 열풍을 “환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돈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지 말 것을 당부한다. 실제 봉급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 물가가 비싸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적 취득의 경우 무사히 5년을 마치기도 어렵지만 마친다 해도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해야 그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는데, 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생활 5년으로는 어렵다고 이들은 전한다. 무엇보다 돈이나 명예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외인부대원의 생활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죄책감과 환멸로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 독립프로덕션 <다큐-인>의 비디오저널리스트 김도균씨가 프랑스 현지에서 ‘외인부대 안의 한국인들’을 만난 뒤 그 취재기를 <한겨레21>에 보내왔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외인부대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사람,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둔 사람, 5년을 넘기고도 계속 남아 있는 사람 등 외인부대 안 한국인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6mm 디지털비디오카메라에 담긴 이 내용은 곧 한 공중파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지금도 ‘취업의 대안’으로써, 또는 ‘최고의 남자’가 되기 위해 케피 블랑을 꿈꾸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 현지취재기는 프랑스 외인부대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거품 가득한 한국인 지원열풍의 내면
마르세유·아비뇽 현지 취재로 밝힌다
(사진/훈련소의 외인부대원들. 전세계 138개국 출신 8500명 중 한국인은 100명 정도다.)
98년 12월2일 월요일 저녁 8시 파리 리옹역. 마르세유나 니스 등 프랑스 남부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대합실 한켠에 건장한 청년 20여명이 줄을 서서 하얀 입김을 불어댔다. 여러 인종이 뒤섞인 이들을 인솔하는 이는 외인부대의 하얀 군모를 쓴 외인부대의 카프랄(병장)이었다. 스포츠점퍼나 러시아군의 야전점퍼 같은 것을 걸치고 배낭을 둘러멘 청년들의 대부분은 러시아나 폴란드 같은 동구권 사람들로 보였지만 흑인이나 아시아 사람도 여럿 섞여 있었다. 이들은 자뭇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다른 승객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역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훈련내용과 월급에 대부분 실망
오후 9시30분 인솔하는 병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청년들은 줄을 맞춰 열차의 2등칸에 마련된 객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날은 때마침 벌어진 프랑스 철도기관사들의 파업여파로 출발시간이 늦어졌지만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9시면 어김없이 외인부대원을 싣고 떠나는 열차였다.
(사진/알프스산맥 이탈리아 국경 바르셀로나트 훈련장에서의 분대단위 사격훈련)
11월16일 방문한 카스텔로다리(Castelnaudary)의 제4외인연대에는 20여명의 한국출신 대원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주로 지난해 7월부터 9월 사이에 입대한 이들은 7개의 각 훈련중대별로 고르게 퍼져 있었다. 부대와 당사자들의 양해를 얻어 다음날 한 내무반에서 , 한국에서 해병대원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경찰관 임용시험을 준비하다 온 진주현씨는 6명의 한국인 대원을 만났다.
이병기씨는 지난 96년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때 실전을 치른 적도 있는 공수특전단 중사출신이었다. 그는 지난해 5월 전역하고 특전사 동기인 이상진씨와 함께 지난해 7월 프랑스로 와서 나란히 입대했다. 4개월의 훈련을 거의 마치고 운전교육만 남겨놓고 있는 그는 훈련이 끝나면 아비뇽에 있는 제6외인공병연대를 지원하여 전문폭파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외인부대의 훈련과정은 그리 녹녹지 않게 느껴졌다. “제일 어려운 점은 역시 언어문제입니다. 4개월의 훈련기간을 통해 여러 시간의 불어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도 힘듭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안내장교가 훈련기간 동안 500개의 기본 불어단어를 암기하고 쓸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여기에 대부분의 한국인 훈련병들이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오기 때문에 20세 중반 이후라는 점도 적응을 고달프게 한다고 이씨는 말했다. 혈기왕성한 다른 나라 훈련병들을 따라가기가 체력적으로 벅찬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 훈련병들은 대부분 카스텔로다리에서 4개월의 훈련을 받으면서 한번쯤 실망하게 된다고 말했다. 람보들만 득실거리는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쯤으로 생각하고 지원했던 사람들은 한국군 신병교육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훈련강도와 내용에 실망하고, 돈을 목적으로 입대했던 사람들도 외인부대가 쉽게 돈 벌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입대 뒤 카스텔로다리에서 받게 되는 첫 월급은 약 5천프랑(125만원) 정도. 하지만 이 돈을 모두 저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은 의무복무를 하는 한국군과는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한국군에서는 그냥 지급되는 많은 보급품들을 이곳에서는 내가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치약이나 비누 같은 소모품부터 배낭이나 야전상의, 하다못해 행군을 가더라도 내가 먹을 것은 내 돈을 주고 준비해야죠. PX라고 해서 바깥세상보다 물건값이 싼 것도 아니구요.” 실제 이곳 외인부대 안 PX에서는 전투화를 780프랑, 고어텍스 소재로 된 위장파카를 1330프랑에 팔고 있었다. 누가 사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외인부대에서 근무하는 데 필수적인 장비들은 자신의 부담으로 사야 한다는 얘기였다.
코리아 마피아
외인부대 안에서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좀 별난 사람들이다. 다른 나라 출신 외인부대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온 지원자를 만나도 몇마디 말만 건네고 지나가는데 한국인 대원들 사이의 결속력은 대단하다. 한국인 지원자가 들어오면 몰래 담배를 건네고 캔맥주를 품에 넣고 담을 넘어서까지 후배 지원자들을 만나러 오기 때문이다. 카스텔로다리의 제4외인연대에서 만난 6명의 한국인 훈련병들도 모두 똑같은 시계를 차고 있었다.
“우리끼리 한 약속이 있었죠.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한국에 욕먹이는 일은 없게 하자구요. 여기 있는 우리들 가운데 다리나 무릎이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병원 갈 일이 있어도 꾹 참습니다. 덕분에 외인부대 안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은 편입니다.”
이런 결속력 때문인지 이곳 외인부대원들 사이에서 한국대원들은 흔히 코리아 마피아라고 불린다. 한국인 대원들의 소속도 주로 전투병이다. 특히 외인부대 중의 외인부대라고 불리우는 제2외인공수연대에는 20여명의 한국인 대원이 있다. 60여명 가량되는 중국인 대원들이 4∼5명을 제외하고는 주로 식당에서 근무하는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이곳에서는 동양인을 보면 시누아라고 부릅니다. 중국인이라는 뜻인데 조금은 경멸적인 뜻을 담고 있지요. 다른 아시아 출신 대원들은 이 말을 듣고도 그냥 지나가는데 비해 유독 한국 출신 대원들은 이 말을 견디지 못하지요. 나는 시누아가 아니라 코레앙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는데 외인부대 안의 한국인들은 누구라도 한두번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한국인 대원들간에도 지켜야 할 불문율은 있다. 한국에서는 무엇을 했었는지, 어떤 사연으로 외인부대에 입대하게 되었는지, 개인의 신상에 대하여 묻는 것은 금기시돼 있다. 서로간의 호칭도 개인적으로 친해지기 전까지는 이름을 붙여 무슨 씨(氏)라고 존대해 부른다.
지난 11월19일 아비뇽 교외의 제6외인공병연대 본부를 거쳐 6시간 동안 차를 달려, 알프스산맥 속 작은 마을 바르셀로나트에서 겨울철 산악훈련을 받던 2명의 한국인 대원을 찾았다. 그들은 소속 중대의 동료 대원들과 함께 해발 2800m의 눈덮인 산에서 스키를 이용한 설상기동훈련과 암벽등반훈련을 받고 있었다.
낭만적인 생각을 버려라
(사진/96년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 때 실전을 치르기도 했던 특전사 중사출신 이병기씨. 그뒤로 왼쪽부터 진주현, 권용만, 김동조씨)
“외인부대는 프랑스군의 핵심 기동전력입니다. 때문에 모든 훈련은 철저히 실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중대도 도시전투가 주임무지만 이렇게 산악훈련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전투를 치루어야 할 곳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산악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막이나 정글일 수도 있지요.”
중대장 야니크 블랑쉬(Yannick Blanche) 대위의 설명을 들으며 훈련중이던 2명의 한국인 대원들에게 다가갔다. 한 대원은 “이제 나는 프랑스 국적자”라며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다른 대원은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자 입을 열었다. “외인부대는 프로페셔널한 군대입니다. 겉보기에는 한국군 훈련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모든 훈련 스케줄은 철저히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한국군에서는 혹한기나 혹서기에는 기온이나 기상상태에 따라 훈련이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일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지요. 실제로 행군중에 아무 경고도 없이 수류탄을 던지기도 합니다. 때문에 항상 긴장해 있어야 하고, 모든 훈련에는 철저한 평가가 뒤따라서 만일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대원은 바로 영창을 가게 됩니다.” 그는 또 “이곳에선 상급자가 얼차려를 줄 때도 한국과는 달리 함께 한다”고 말했다. 상급자 스스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10일간의 외인부대 내 취재가 끝나고 파리로 돌아가기 전 마르세유의 한 베트남 음식점에서 ㅇ씨를 포함한 8명의 한국인 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A씨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 얼굴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급, 근무하고 있는 부대도 일절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부산출신으로 한국의 육군과 공군에서 10여년간 군 복무를 했고 외인부대에서는 6년째 생활하고 있다는 그는 외인부대 내 한국인 대원들에게는 맏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지금 맡고있는 일은.
“연대 저격병 훈련 프로그램의 교관을 맡고 있다.”
-언제부터 외인부대 안에 한국인들이 늘어났는가.
“100여명의 한국출신 대원들 가운데 반 이상은 최근 1년 사이에 입대한 사람들이다. 내가 입대하던 93년만 해도 한국인은 10여명에 불과했고 2∼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인과 일본인이 더 많았다.”
-한국인들이 늘어난 특별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돈 때문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외인부대에 지원한다면 그 사람은 배겨나지 못한다. 이곳에서 받는 월급으론 자기생활하는 것만도 빠듯하다. 목돈을 쥐려면 해외파견을 나가야 하는데 이것도 자신이 원한다고 아무때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불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고. 외인부대 안에는 언어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3년이고 4년이고 진급도 못하고 주방에서 허드렛일이나 사역만 하는 사람들이 숱하다. 실제 지난 4월에는 한 한국출신 대원이 집에 보내 달라고 연병장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손목동맥을 칼로 끊는 자해사건도 일어났다. 외인부대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절대로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외인부대 근무중 특별히 금지되는 일들이 있다는데.
“원칙적으로 5년의 근무기간중 휴가를 얻더라도 프랑스 바깥으로는 여행할 수 없다. 자동차나 집도 살 수 없고 결혼도 하지 못한다. 지지난해까지는 통장도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나처럼 본인이 원해 가명을 쓸 경우엔 5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즉 외인부대를 떠나기 전까지는 앞서 말한 어떤 일들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부대의 허가없이 인터뷰하는 것도 영창 들어갈 사유가 충분히 된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프랑스 사람들은 외인부대를 익명의 부대라고 부른다. 외인부대 정복에는 명찰이 없다. 외인부대원을 자신의 과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이유라고 들었다. 나도 동의한다.”
-외인부대 근무중 한국에 가본 적이 있는가.
“입대한 이후로 6년 동안 한번도 가지 못했다. 가고는 싶지만.”
“우리는 프로페셔널 군인”
ㅇ씨가 말문을 닫으려 할 즈음 한자리에 있던 백성호(28)씨가 거들고 나섰다. 백씨는 2년째 외인부대생활을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은 2년여의 군대생활도 따분해하고 견디기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나 자신이 좋아하지 않고 맞지 않는 일은 견디기 어렵지요. 이곳은 군대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외항선을 타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것도 철저히 이 일을 즐기고 미치지 않고는 5년간의 근무는 한마디로 시간낭비입니다.” 백씨는 “고참인 ㅇ씨만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세계 곳곳에 주문해 구한 탄도학, 총기에 관한 책들이 수십권 된다”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밤을 새워 연구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전했다.
“몇년 전 분대장으로 아프리카의 지부티에 근무할 때의 일인데 정찰을 나가면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찾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부대 내 PX에서는 GPS(위성위치관측시스템)를 500프랑에 팔고 있었죠. 물론 지도와 나침반을 쓴다고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GPS가 있으면 작전을 나가도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 곳이 외인부대입니다.”
백씨에게 혹시 인종차별이나 아시아인으로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는지 물어봤다. “외인부대에 입대하게 되면 누구나 외워야 하는 외인부대원의 수칙이 있습니다. 그중에 모든 외인부대원은 국적과 종교, 인종을 떠난 형제들이란 구절이 있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고, 아무래도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이다 보니 차별이나 불평등 같은 것이 없을 수는 없지요. 또 지금은 아무래도 폴란드나 체코 같은 동구권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텃세 같은 것도 있고…. 그래서 툭툭 머리를 친다거나 노골적으로 욕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고 넘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계속 그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지요. 그래서 저도 몇번 치고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싸움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싸움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귀국 뒤의 일에는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0대와 30대의 세월을 5년 이상 외국군대에서 보낸 자신들이 한국에 돌아갔을 때 극심한 경쟁사회 속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백씨는 5년의 복무를 마치면 벨기에의 용병회사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프랑스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외인부대에서는 큰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라 마르세즈>(프랑스국가)를 들을 수 없습니다. 외인부대 군가는 항상 연주되지만요. 또 우리는 프랑스 국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합니다. 하지만 눈길은 프랑스 국기가 아닌 외인부대 깃발을 향해 있지요. 우리는 프로페셔널 군인입니다.”
“내가 왜 세르비아군을 죽였는가”
괴로운 기억 속에 한동안 방황했던 황석규씨, 죄책감 씻을 새 길 준비
(사진/보스니아에서의 황석규씨. 이곳에서 6개월 전투를 치렀던 그는 중앙아프리카에서도 한달가량 실전에 투입됐다.)
서울 구기동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만난 황석규(31)씨는 지난 95년부터 97년 1월까지 외인부대원 생활을 했다. 그는 해병대에서 하사관으로 제대한 뒤 몇군데의 직장을 전전하다가 손댄 사업에 실패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배신 당해 죽을 곳을 찾는다는 심정으로” 프랑스로 가 외인부대에 입대했다고 했다.
“해병대 시절 동료에게 프랑스에 그런 부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외인부대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요. 물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에 외인부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외인부대에 입대하는 사람들 거의가 그만한 사연들은 다 가지고 있을 겁니다.”
외인부대원이 된 황씨의 병과는 폭파병. 입대한 해인 95년엔 보스니아에서 6개월, 이듬해엔 중앙아프리카에서 한달 가량 실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황씨의 지난 경험은 결코 남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기억이다.
“처음에는 내가 죽지만 않으면 전쟁도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었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더군요. 멀리서 사격할 때는 적이 누구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교전이 끝난 뒤 쓰러져 있는 적을 확인사살하는 일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옆 침대에서 한솥밥을 먹던 전우가 전사해도 막사로 돌아온 우리들은 캔맥주를 마시고 떠들어댔죠. 전투중에는 나무 뒤나 웅덩이에 머리를 쳐박고 숨어 있다가 교전이 끝나면 기어나와서 사살된 세르비아군의 주머니를 뒤지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도 보았습니다. 그래도 적의 죽음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었겠지만, 한국인인 내가 그 세르비아군들을 죽일 이유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그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많이 괴로워했었죠.”
황씨는 자신도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사라예보 시내에 ‘저격수 거리’라고 불리던 곳이 있었습니다. 제 보직이 폭파병이라 그 거리의 한 건물을 폭파하는 임무를 받았죠. 어느 날 그 건물에 들어가 폭약을 장치하고 기다리는데 나오라는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한참을 기다리다 이상해서 창문 너머를 보니 이미 아군은 철수하고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무전기에서 ‘철수’ 비슷한 말이 들렸던 것 같다는 생각이 나더군요. 황급히 달아나다가 하반신에 크레모아 파편 세례를 받았죠.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내가 ‘철수하라’는 불어를 못 알아들어 생긴 일이었습니다.”
황씨는 결국 누군가를 죽였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휴가 때 한국으로 돌아와 복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도 그에게 안식처가 되지는 못했다. “적응하기 힘들었죠. 술자리에서 사소한 싸움이 벌어져도 누군가를 죽이기 직전까지 갑니다. 얼마 동안 사귀던 여자도 내 전력을 알게되자 아무말 없이 떠나가더군요.”
한동안 방황하던 황씨는 지금 119 구급대원이나 경찰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황씨는 그게 자신이 죽여야 했던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인부대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갈 곳은 아닙니다.” 외인부대원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황씨의 충고다.
“한국출신 대원, 언어가 큰 문제”
인터뷰/베르투 외인부대 공보장교
오바뉴에 있는 외인부대 본부를 찾아 공보장교 베르투 대령을 만났다. 생시르(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그는 “한국인 대원의 질이 아주 우수하다”며 상당히 친절한 태도로 부대를 소개했다.
-외인부대의 편성은.
=현재 프랑스 외인부대는 육군 중장의 지휘를 받는 군단(LEGION)으로, 9개의 연대와 분견대로 편성되어 있다. 장교 450명, 하사관 1600여명을 포함해 8500여명이다. 장교의 10%, 하사관의 70%는 외인부대 사병으로 입대해서 승진한 사람들이다. 부대원의 출신 국가는 세계 138개국이며, 한국인 대원은 100여명쯤 된다.
-한국출신 대원에 대한 평가는.
=나를 포함한 외인부대 장교들은 한국인 대원들을 깊이 신뢰한다. 한국출신 대원들에게는 언어가 가장 큰 문제지만,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곧 한국인 가운데서도 장교가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5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난 뒤 혜택은.
=원칙적으로 외인부대에서 3년 이상 복무하면 프랑스 거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물론 신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근무기록 심사를 거쳐 대략 10% 정도에게 주어진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5년간의 복무를 마치면 거의 모든 대원들에게 프랑스 거주가 허용된다. 8년 이상 근무한 대원에게는 45개월치의 월급이 일시불로 지급되고, 15년 이상 근무했을 때에는 연금혜택도 있다.
-프랑스말고도 외인부대를 유지하는 나라가 있는가.
=프랑스와 영국뿐이다. 하지만 영국의 구르카군이 네팔인들로만 이루어진 데 비해 우리 외인부대는 말 그대로 전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 사람들로 구성되는 다국적 외인부대이다.
-지금도 프랑스가 외인부대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831년 외인부대가 생긴 이래 외인부대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그 기회를 주고 있다. 지난 167년의 역사를 통하여 대략 60여만의 젊은이들이 외인부대의 군복을 입었다. 우리는 그 전통이 앞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프랑스가 외인부대를 유지하는 이유와 관련해선 베르투 대령의 의례적 답변과는 달리, 취재중에 만난 한 외인부대의 장교로부터 비교적 솔직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첫번째 이유는 자국민 보호이다. 약 23만명의 프랑스 육군은 대다수가 10개월의 짧은 의무복무를 하는 사병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외인부대는 그 수십배 이상의 보수를 받는 지원자들이다. 인명손실이 예상되는 분쟁지역에 프랑스 정규군을 투입했을 때의 정치적 부담은 상당히 클 것이다.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외인부대의 투입은 정규군을 투입했을 때의 부담에 비길 바가 아니다. 또다른 이유로는 외인부대 스스로가 지난 역사 동안 쌓아올린 우수한 전투집단으로서의 전통 때문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외인부대는 아주 효율적이고 기동성 있는 전투집단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외인부대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였다. 3년 뒤면 지금의 징병제가 지원병제로 전환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유럽통합의 추세와 프랑스의 높은 실업률을 감안한다면 지금과 같은 수준의 외인부대를 프랑스가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까다로운 신원조사, 빡빡한 훈련
‘케피 블랑’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사진/3차에 걸친 면접과 최종면담을 거쳐 입대가 허용되면 지원자는 비로소 머리를 깎고 군복을 맞춘다. 황석규씨의 신병 때 모습.)
외인부대에 지원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선 프랑스 전국에 산재한 외인부대 분견소를 찾아가거나, 입국한 공항에서 경비경찰에게 “I want kepi blanc”이라고 말하면 곧바로 외인부대 헌병을 연결해준다.
대부분의 한국인 지원자들은 샤를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해 파리 북동쪽 폴드노종에 있는 분견소를 찾아간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성곽에 있는 이 분견소에 도착해 정문 위병에게 외인부대 입대의사를 밝히면 간단한 심사를 한 뒤 3∼4일의 대기기간을 거쳐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근처 오바뉴에 있는 제1외인연대로 옮겨진다.
오바뉴의 제1외인연대에서는 체력테스트, IQ 및 인성테스트와 함께 지원자의 신상에 대한 엄격한 조사를 거치고 지원자에 따라서 짧게는 2∼3주, 길게는 2개월을 대기하게 된다. 지원자에 대한 신원조사는 인터폴과 출신국가의 경찰기관을 통한 신원조회, 본인의 프로필 진술 등 매우 까다롭다. 전과기록이 있으면 입대는 극히 힘들어진다. 범죄자의 입대는 불가능하다. 만약 범죄자임이 드러나고 출신국가와 범죄인 인도협정이라도 맺어져 있다면 외인부대에서 바로 출신국으로 강제송환되는 일도 있다. 3차에 걸친 면접과 최종면담을 거쳐 입대가 허용되면 지원자는 비로소 머리를 깎고 군복을 맞추고 피레네산맥 기슭, 인구 4천명의 소도시 카스텔로다리에 있는 제4외인연대로 보내어진다. 외인부대쪽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입대하는 인원은 연간 지원자 9천여명 가운데 1천명 미만이다.
제4외인연대는 외인부대의 훈련소격으로 이곳에 도착하게 되면 4개월간의 신병훈련에 들어가게 되는데 첫 한달간은 훈련중대별로 마련된 농장에서 체력단련을 위주로 한 빡빡한 훈련을 받게 된다고 했다. 한달간의 훈련이 끝나갈 무렵 약 50Km의 행군을 마치게 되면 비로소 ‘캐피 블랑’이라고 불리우는 외인부대의 하얀 군모를 쓰는 의식을 갖게 된다. 고색창연한 중세의 성벽 아래서 주로 밤에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이루어지는 이 의식은 외인부대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건 뻥이야…”
프랑스 외인부대 가짜경력으로 한국에서 장사한 사람들
(사진/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 설립자 김씨는 경력이 문제가 되자 교육원에서 손을 뗐다. 정보교육원 내에 외인부대 주요보급품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11월 초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에 ‘프랑스 외인부대 정보교육원’이라는 이름의 사무실이 문을 열었다. 당시 교육원은 프랑스 외인부대 입대를 위한 모든 정보를 지원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립취지를 내세웠다. 외인부대의 지원절차와 시험과목 등을 프랑스 현지와 똑같이 만들어놓고 지원자들이 좀더 쉽게, 탈락하지 않도록 교육한다고 교육원은 밝혔다.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외인부대 입대가 하나의 비즈니스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교육원 교육과정 과연 효과있을까
교육원을 세운 김아무개(29)씨는 설립 당시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인부대에서 6개월 동안 행정병으로 의무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며 “현지에서 외인부대를 찾지 못해 열흘을 헤맸을 정도로 정보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후배 지원자들을 위해 교육원을 차리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외인부대 지원자들에 대한 상담과 합격률 제고를 위해 현지의 선발과정을 그대로 재현한 특별과정을 3주과정으로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교육원은 ‘프랑스 외인부대 지원자 모집’이라는 광고를 생활정보신문에 대대적으로 실었다. 외인부대 평균 합격률이 10% 정도지만 교육원의 교육과정을 거칠 경우 합격률은 70%를 넘어선다는 광고도 빼놓지 않았다.
(사진/프랑스 외인부대 지원열풍에 기폭제가 됐던 이창형씨의 수기. 96년부터 13개월 근무했던 저자는 5년 근무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외인부대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사실상의 입시학원을 표방하고 나선 교육원의 교육과정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교육원쪽은 수시로 바뀌는 선발시험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한달에 한번씩 교육원의 직원을 외인부대에 지원시켜 최신정보를 교육과정에 반영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과정은 외인부대 선발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프랑스에 대한 소개나 외인부대의 계급체계와 봉급, 복지혜택에 대한 설명, 부대 내 식사이용과 내무반 이용, 불어교육 등이 교육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외인부대의 형식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IQ테스트나 인성테스트, 정신테스트 등에 대해서도 경험자들은 “연습을 해서 좋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비용도 지나치게 많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교육원에 찾아온 지원자들은 간단한 신체검사와 함께 상담을 할 경우 8600원만 내면 된다. 하지만 이후 3주간의 교육과 함께 자격증 번역, 여권발급 대행 수수료, 왕복항공료를 포함한 수속비용을 더하면 모두 187만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험자인 송아무개(26)씨는 “프랑스에서 외인부대에 접하는 방법은 다양하고도 쉬워 부대비용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며 “여행 비수기인 요즘 프랑스 왕복 비행기요금은 60만∼7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합격률 70%라는 수치에 대한 교육원의 설명도 어설프다. 교육원쪽은 설립자인 김씨 자신이 외인부대 선발과정에서 경험한 노하우를 지원자 5명에게 특별히 교육시켜 프랑스로 보낸 결과 4명이 합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교육원은 자체 제작해 1만원씩에 판매하던 자료책자에 합격률 70%를 명시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씨의 주장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김씨가 교육시켰다는 지원자가 프랑스에 있을 시기에, 외인부대에 합격한 ㅂ씨에 따르면 한국인 합격동기생 가운데 교육원 출신은 한명도 없었다. 올 들어 교육원의 자료에는 합격률 70% 부분은 삭제됐다. 하지만 전화상담에서는 여전히 70% 합격이라는 선전이 빠지지 않고 있다.
1년 경력이 5년 경력으로 둔갑
무엇보다도 설립자 김씨의 경력이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지난 98년 4월 외인부대에 입대해 훈련을 마친 뒤 같은 해 10월에 복무계약을 파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발간되는 한인 소식지 <한위클리> 10월2일자 독자투고란에 실린 ‘재불한인사회 왜 사기행각 계속되나?’라는 제목의 투고는 이러한 김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파리에서 LEEKS INTERNATIONAL이라는 업체를 운영하는 이아무개씨가 투고한 기사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해 5월 프랑스에 와서 외인부대에 지원했다가 오바뉴에서 탈락해 한달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김씨는 이씨를 찾아왔고, 이씨는 이런 김씨가 딱해 보여 아르바이트를 주었는데 같은 해 9월 이씨의 돈 1만2천프랑(약 300만원)을 가지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씨는 “김씨의 외인부대 경력은 모두 허위”라며 “한국의 스포츠신문에 실린 김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수소문 끝에 김씨의 연락처를 알아내 여러차례 돈을 갚을 것을 요구했지만 돈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씨의 경력이 문제가 되면서 그는 교육원에서 손을 뗐다. 애초 김씨와 손잡고 교육원을 운영해오던 김태환씨는 “아예 탈락한 것은 아니고 합격 뒤 곧바로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다른 것을 알고 교육원과의 인연을 끊도록 했다”고 말했다.
지난 12월 정보교육원을 통해 프랑스에 갔다가 입대에 실패하고 돌아온 신아무개(28)씨는 “교육원을 통해 알고 온 것과 현실이 너무나 달라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씨는 “누구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며 “대사관에서 배부하는 안내문에 나와 있듯이 지원에 따른 모든 책임은 결국 ‘지원자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지난해 6월 출간돼 외인부대 열풍의 기폭제가 됐던 <외인부대원 Lee>(한림미디어)의 저자 이창형씨의 경력도 과장됐기는 마찬가지다. 이씨는 책에서 자신은 지난 91년 외인부대에 입대해 5년 만기를 40일 앞두고 스스로 나와 귀국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씨는 지난 96년에 입대했고, 1년 조금 넘는 기간만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보다 두달 먼저 입대한 황아무개씨는 “지난 96년 오바뉴의 훈련소에서 신병으로 들어온 이씨를 처음 봤고, 이후로도 몇차례 서로 인사를 나눴다”고 밝혔다. 이씨의 책을 츨판한 <한림미디어> 발행인 김래남씨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 이씨가 원고를 가지고 와 검토해보고는 새로운 얘기라고 생각해 출판하게 됐다. 모든 원고는 이씨가 썼고, 출판사는 교정만 봤다. 그뒤 4개월 정도가 지난 98년 10월 말께 이씨의 경력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발행인 김씨가 설명하는 출판경위다. “글의 완결성을 위해 복무기간을 조금 부풀렸다. 그러나 책의 다른 부분은 모두 사실이다. 외인부대를 미화하려고 쓰지는 않았다. 고임금이니 프랑스 국적의 혜택이니 하는 것은 언론에서 입맛대로 재생산해낸 것이다.” 이씨 자신이 오히려 언론의 피해자라는 해명이다. 한림미디어 김씨는 “이씨의 경력이 허위로 드러난 뒤부터는 책에 대한 광고를 일체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인부대 열풍의 뿌리는 허상인가
이 책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실제로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외인부대에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 출국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책을 보고 마음을 결정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정보교육원쪽도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이 책을 보고 온다고 밝히고 있다. “책이 출간된 뒤 회사에 지원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 하루 30통 이상씩 걸려왔다. 하지만 문의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념이 없어보여 입대를 권유하지 않았다. 특히 돈만을 보고 가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말리기까지 했다.” 한림미디어 발행인 김씨의 설명이다.
우리 사회를 달궜던 외인부대 열풍은 사실상 상당부분 허상 속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셈이다.
국제전 ‘용병시대’
민족·종교 분쟁지역 활동 점차 확대…89년 유엔서 ‘금지조약’채택도
(사진/명확한 계약체계와 명령계통을 갖춘 용병은 프랑스 외인부대가 처음이다.)
세계사에서 순수 계약에 의한 외인용병의 역사는 사실상 프랑스 외인부대 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도 외인용병의 기록은 간간이 있었지만 명확한 계약체계와 명령계통을 갖춘, 제대로 된 의미의 용병은 프랑스 외인부대가 처음이다.
체첸 용병에 골치 썩인 러시아군
외인부대는 1831년 7월혁명 와중에 프랑스 국왕에 오른 루이 필립이 창설했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불안 해소와 북아프리카 식민지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주로 유럽 각지의 망명정객들로 구성된 외인부대는 지금까지 168년 동안 전세계에서 3만여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프랑스의 별동대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외인부대는 1832년 오랑항 전투를 시작으로 스페인전투(1835년), 크림전쟁(1854년), 멕시코 카메론전투(1863년) 등을 거치면서 강력한 전투부대로 성장했다. 20세기 들어서도 외인부대는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차드, 지부티, 사라예보 등의 전투에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프랑스 외인부대를 비롯한 외인용병의 모습은 국제사회의 다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양태로 나타났다. 완전한 계약관계 속에 국가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는 프랑스 외인부대와는 달리 종교적 민족적 신념에 따라 다른 나라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돈만 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프리랜서 용병들도 세력을 확장했다.
지난 95년 체첸 사태 때는 돈을 받고 출동한 3천여명의 외인용병들때문에 정예 러시아군이 골치를 썩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의 기갑부대 공수부대 등 특수부대들은 일당 500달러 정도를 받는 전문 용병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체첸 대통령궁 접수에 애를 먹었다. 이들 용병 가운데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출신 무자헤딘 전사들이 5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 출신도 100명 이상으로 전해졌다.
20세기 후반 냉전이 끝나면서 외인용병의 활동 영역은 개별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민족분규와 종교분쟁 격화지역으로 확대되는 특징을 보였다. 지난 93년의 보스니아 내전은 용병활동의 이런 민족적 종교적 특징과 함께 온갖 성격의 용병이 한자리에 모여 혈투를 벌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외인부대는 보스니아 내전 지역에 700명 정도 투입됐다. 외인부대는 사라예보시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을 24시간 감시하며, 세르비아의 기독교계와 보스니아의 회교도 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대치 현장에서 완충 역할을 했다.
이란과 이집트 터키 말레이시아 등 세계 각국 회교도들은 회교계의 보스니아를 돕기 위해 ‘회교도 외인부대’를 조직해 지하드(성전)를 벌였다. 크로아티아는 독일 극우세력과 영국 미국 등의 지원을 받고 날아온 국제용병들의 도움을 받았다. 세르비아 역시 러시아와 옛 소련 공화국, 그리스 등 정교국가가 지원하는 러시아 용병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당시 몇개월간 단기계약으로 파견되던 러시아용병의 몸값은 한달 25만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국가적 동지에서 약탈자로 변할 수도
이들 세나라의 용병들은 나름대로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는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을 위해 세계를 전전하는 용병들의 문제는 그 이전부터 국제사회의 논란거리가 돼 왔다. 이미 지난 89년 유엔에서는 ‘용병모집·사용·자금제공·훈련 등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을 채택했다. 전쟁프로인 용병들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운영이나 지원을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효력발생을 위해 필요한 22개국의 비준을 얻지 못해 사실상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당시 유엔의 한 보고서는 용병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이들이 민족적 종교적 국가적 동지일 수도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한 약탈자로 돌변할 우려도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한겨레21 1999년 01월 21일 제2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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