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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은근 안알려진 독립운동가 후손

작성자스피또2000당첨|작성시간22.11.04|조회수124 목록 댓글 0

 

 

 

 

출처 :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2031508245&code=900315

 

 

최근에야 보신각 타종을 하면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란 것이 밝혀졌던데 왜 그동안 자랑을 안 하셨나요.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셨지 제가 한 게 아니니까요. 본적이 전북 정읍군(현 정읍시) 태인면 태창 1번지에요. 서울로 치면 종로 1번지나 마찬가지죠. 1919년 3월16일 태인면에서 장날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장꾼들에게 나눠주는 등 독립운동에 힘쓴 송영근 선생이 할아버지십니다. 자수성가하신 증조할아버지는 만석꾼으로 금광을 운영하셨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투사에게 활동자금을 대주다가 일본인들에게 금광과 땅을 모두 빼앗겼어요. 할아버지는 군산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제가 세 살때 돌아가셔서 기억도 안납니다. 애국자인 조상 덕분에(?)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달걀도 먹어본 기억이 없어요. 봄엔 새싹 뜯어먹고, 소나무 껍질 벗겨 먹고 덫을 놓아 토끼가 잡히면 오랜만에 육식하는 게 일상이었죠. 고등학교 학비를 내지 못해 졸업장도 못받았어요. 나중에 가수로 출세하니 자랑스러운 동문이라고 졸업장과 감사패를 주더군요.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신문배달도 하고, 이발소에서 보조 노릇도 하고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76년 해뜰 날이 히트하기 전엔 무명생활도 길었었지요.

“고등학교 때 전주방송에서 전속가수로 활동했고 서울 노래경연대회에서 상을 타서 동네에선 유명했죠. 가수 김상희씨 남편인 유훈근씨가 당시 프로듀서였는데 오아시스레코드에 소개해서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했습니다. 레코드사에 들어와서 1주일 뒤에 험상궂게 생긴 신인이 들어왔는데 나훈아씨였어요. 가수가 되고도 빛을 못봐 언젠가 내게도 쨍 하고 해뜰 날이 왔으면 좋겠다란 마음으로 작사·작곡해서 부른 노래가 ‘해뜰 날’이에요. 당시엔 아이들이 옹알이 대신 해뜰날을 먼저 중얼거릴 만큼 인기였다니까요.”

-그렇게 인기였는데 미국엔 왜 가신 겁니까?

“80년부터 88년까지 미국에서 살았더니 전두환 정권 들어서고 미국에 갔다고 누가 ‘형님도 민주화 운동 하셨냐’고 묻더군요. ‘해뜰날’로 가수왕까지 올랐지만 이듬해 결혼하니까 해가 지더군요. 컬러TV가 나오면서 주수입원인 극장 리사이틀도 내리막길을 걸어 생계가 막막해 잠실에서 분식집을 했어요. 만삭의 아내가 배달통을 들고 배달하는 게 안쓰러워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간 겁니다. 미국생활 초기엔 직장이 없는 저를 대신해 일본에서 유학해 일어에 능통한 아내가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독립운동 유공자 자손이 기모노 입고 일하는 아내한테 빌붙어 산다는 게 너무 한심해서 그때부터 정신차리고 일을 했죠.

 

 

그후로 샌드위치 전문점에 슈퍼마켓도 여러 개 운영했고 버지니아에서 쇼핑몰을 구입해 큰 돈을 만졌어요. 그런데 살 만해지니까 몸이 아픈 겁니다.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진단한 병명이 홈식(Home sick)이래요. 향수병! 그래서 한국으로 온 겁니다. 병 고치러요.”

-한국에 오니 병이 낫던가요?

“한국땅 밟고 노래 부르니 힘이 펄펄 나더군요. 미국에 살 땐 대형저택에 벤츠600 타고 다니며 후배들이 미국 공연 오면 선물도 사줬어요. 그런데 후배들이 돌아가면 고향 생각도 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 혼자 울었죠. 다시 귀국해 6년 동안 단칸방에서 어머니랑 살았는데 한여름엔 너무 더워 시체처럼 누워만 있는데도 좋았어요. 그후 ‘혼자랍니다’ ‘정 때문에’ ‘우리 순이’ ‘차표 한 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이 계속 히트했죠. 당시 미국에서 돌아온 가수들의 이미지가 나빴는데 전 부자인데도 노래가 좋아 귀국했다고 알려져 욕은 안 먹었어요.”

-히트곡도 많고, 훌륭한 부인에 잘 자란 두 아들 등 정말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을 못나왔는데 이대 출신인 아내가 대학을 두 개 나왔으니 공평한거죠. 복도 많지만 고생도 많이 했어요. 12년 전엔가, 강남구 삼성동에 5층짜리 건물을 짓고 원룸 17가구를 만들어 임대업을 했어요. 노후에 월세나 받아먹으면서 살아도 되겠다 싶었죠. 그런데 갑자기 외환위기가 터지고 전세금 반환 소송에 휘말려 그 집이 부도나서 결국 건물도 은행에 넘어갔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죠. 아내와 두 아들은 그길로 미국으로 갔고, 저는 혼자 마포 원룸에서 살았어요. 임대업자가 하루 아침에 세입자가 됐죠. 다행히 98년에 ‘네박자’가 빅히트를 해서 지금 살고 있는 한남동 집도 마련하고 그후론 계속 편안합니다. 아이들도 반듯하게 잘 자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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