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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신박한 사진방

영화 남한산성과 실제 남한산성 이야기

작성자싸인은나중에|작성시간24.09.29|조회수259 목록 댓글 0

 

극 중 이병헌이 맡은 '최명길'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이병헌은 영화 '광해군'에서 광해군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영화에서 이시백과 최명길의 대화를 보면 최명길이 "이시백을 따라 무과에나 응시할 껄"이라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남한산성을 지킨 장수 이시백은 문신으로 정치적 입지 때문에 42세 때까지 과거를 치르지 않고 유생으로 지냈다. 그 후 아버지 이귀를 따라 인조반정에 성공함으로써 2등공신에 책봉되고 정계에 진출한 인물이다.

그는 이후 효종대에 영의정까지 지내게 된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보고 김상헌은 울부짖으며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우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인조에게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최명길은 나도 쓰고 싶어서 쓴 건 아닌데... 청황제에게 갖다 주어야 한다고 쓴웃음을 지으면 주섬주섬 주웠다고 한다.

영화 결말에서 김상헌은 자신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칼로 할복 자살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67세때 남한산성 사건 이후로 82세 때 까지 장수를 누리게 된다. (심지어 16살 어린 최명길보다 오래산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吏曹參判鄭蘊口號一絶, 因拔所佩刀, 自刺其腹, 殊而不絶。
禮曹判書金尙憲, 亦累日絶食, 至是自縊, 爲子所救解, 得不死, 聞者莫不驚歎。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년) 1월 28일

김상헌과 최명길은 모두 청의 수도인 심양에 끌려가게 되는데, 남관이라는 감옥에서 벽 하나를 두고 같은 장소에 갇히게 된다.

여기서 서로의 굳건한 모습과 진실한 충심을 보고 시를 주고 받으며 화해했다고 한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극 중에서 명예로운 죽음의 길과 삶의 길에 대해 논쟁한다.

후대에 김상헌의 후손들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써 조선시대 최대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최명길의 후손은 손자때까지는 어느정도 갔으나 이후 그럭저럭한 양반가문으로 몰락하고 만다.

극 중에서 인조는 세자를 볼모로 보낼 수 없다며 부모된 도리를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는 세자(소현세자)가 청으로 잡혀가 조선으로 귀국한 뒤 2달 만에 요절하게 되는데, 그 때도 거들떠 보지 않을 정도로 매정한 임금이었다. (소현세자 암살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인조가 항복을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산성의 함락(정확히는 항복하지 않았다가는 산성이 손 쉽게 함락되고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묘사하였다.

실제 남한산성의 방어력은 청군이 쉽사리 함락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했으며 인조가 항복한 결정적인 원인 또한 강화도에 피난가 있던 왕족들이 모두 붙잡혀 인조가 죽더라도 왕실을 보전할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청군이 끝까지 남한산성을 공격했더라면 결국 함락되기는 했겠지만, 영화에서처럼 청군이 공격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함락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공격하지 않은 정도는 아니었다. 남한산성은 실제로 가보아도 막강한 요새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한 산성에서 바라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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