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스트는 부르고뉴 공작 샤를 용담공이 1471년 조직해서 1477년 스위스인들의 손에 죽을 때까지를 나타낸다. 봉건 보병은 일반적으로 매우 질이 낮았고, Low Country 출신의 보병들은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환영받지 못했다. 소집 명령에 기꺼이 응하는 소수 군대는 매우 강건했지만 다수가 모일 때는 제대로 통제되지도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그랑송 전투이다- 샤를은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포병대를 소유 했으나, 대포들은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낭시 전투에선 우익에서 기습한 스위스인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했으나 단 2명만 죽었을 뿐이다- Organ gun은 serpentines(15~17C에 사용되던 대포)로 교체되었으며, bombard(사석포 射石砲) 마차에 실려 이동하는 좀 더 근대화된 대포에 의해 지원받았다.
워 해머의 드워프 오르간 건...아마 위의 오르간 건도 이런 형식이었으...려나?)
영국 장궁병들은 다양한 간격을 두고 군대를 지휘했는데, 분리되어 전투하는 것보다는 일부는 Ordonnace 군대 같은 정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으며 일부는 정규군과 함께 포진했다. Ordonnace 군대는 1472년 기록에 따르면, 보병 사수가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밝혀졌다. 특히 장창병과 handgunner들의 숫자 차이가 심했는데, 특별히 보충되지는 않은 듯 하다. Low Country 동맹의 장군들은 반드시 정규 장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른 Low Country의 군대를 지휘하지 않았다. 기사는 반드시 C-in-C(Comand-in-Chief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Ordonnace 소속 기사나 봉건 기사는 아마 말에서 내려 배치되었을 것이다.
● 군대의 규모 군대는 낭시 전투에서 약 8천명의 병력을 소유했고-한 자료는 4천명이라고 주장했으나 다른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그랑송 전투에서는 15,000명의 병력을 유지했다.
● 장군 샤를은 그의 근위병들에게 호위를 받았으며, 다른 장군들은 대개 이탈리아 출신었고 나머지는 Savoy 출신이거나 용병 출신이었다.
●근위 장갑병(사실 본문에선 Household->가신단)
이 병과는 약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두개의 부대가 있었는데, 낭시 전투에서는 대부분의 부대 수가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공작의 근위대 중에서 전투 사상자는 별로 없었으나 다른 부대에서 장교가 사망할 경우, 이들이 전사자를 대체하였고 비전투 사상자도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위 보병 (Household Infantry) (역시 본문에선 Household)
근위 보병은 기록에 따르면 약 1,6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숫자에 관한 기록은 명확한 편이다. 16개의 부대(company-약 100명)가 있었는데, 이 중 4개의 궁병대는 사실상 Ordonnace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고, 8개의 부대는 궁병이 없는 보병들이었는데 역시 일부는 다른 부대의 지원을 담당했다. 궁병 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 숫자가 좀 많은 편이었는데 1~2 부대(element-일반적으로 250명)에 400명 정도가 있었으며 대략 700명의 보병 부대가 2~3개 부대(element)와 함께 소속되었다. 동시대의 목판화 그림에 의하면 부르고뉴 궁사들은 Ordonnace 보병대가 하는 것처럼 배치된 voulgier 뒤에 배치되며, 때때로 혼합되어 배치되기도 하였다.
●Ordonnance 장갑병 (Ordonnance gendarmes)(Gendarmes는 원래는 무장한 귀족이란 뜻...)
각 Ordonnacnce 장갑병들은 한 명의 쿠스틸러(Coustillier 검사. 사실 견습으로 몸값을 내지 않는 포로를 죽이는 역할을 맡았다. 양날단검인 쿠스틸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들와 수습기사, 세 명의 기마궁사의 지원을 받았다. 각각의 궁사는 따로따로 싸웠는데, 쿠스틸러와 수습기사는 일반적으로 Man-at-arm들과 함께 싸웠고 그리고 각각의 기사부대의 배후에 배치되기도 했다. 중장병(Met-at-arms...얘네들은 말에서 타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으니 뭐라고 번역하기가;;;)들은 낭시 전투 직전에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는데, 약 1,100명 수준이었고 가장 많았을 때도 1,250명을 넘지 못했다. (각각 100명으로 이루어진 12개의 company가 있었다) 가장 많았을 때는 15개 부대(element)가 있었으나 낭시 전투에서는 13개 부대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수습기사는 때때로 궁기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 방식은 부대(elements)의 병력을 1/3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또한 12개의 element가 12개의 company로 대체되기도 했다.
●Ordonnace 기마궁사(Ordonnance mounted archers)
명목상 기마궁사 부대는 장갑병 부대와 1:1의 비율을 맞추도록 되어 있으나 장갑병 부대의 수습기사들이 궁기병으로 활동하였으므로, 장갑병 부대의 숫자는 줄어들고 궁병의 비율이 더욱 높아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라 전투에선 궁수들이 전군의 60&까지 올라가는 사태도 있었다.) 그러나 전투 사상자는 궁병들에게서 더욱 심각하게 발생했으며 몇몇 company는 낭시 전투 직전엔 명목상 구성원의 50%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제 기마궁병 : 장갑병의 비율은 좀 더 낮아지기는 했을 것이다.
●기마 석궁병(Mounted Crossbow) 1472년 기록에 따르면 3,600명의 기마 궁사 중에서 600명이 기마 석궁병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마상에서 사격한다기 보다는 드라군과 같은 방식으로 운용되었는데 기마 석궁병은 결국 대부분이 영국 장궁병으로 대체되었다.
●마상 영국 장궁병(English mounted archers)
1472년이나 1473년에 영국에서 2,000~3,000명이 충원되었고, 1474년에는 1,000명이 더 지원받았다. 이 시점에서 약 3,000명 이상의 영국 장궁병들이 군대에 있던 것으로 보고 되어 있다. 이 숫자는 근위병 뿐만 아니라 모든 Ordonnance 군대의 영국인을 포함했을 것이다. 1476년 모라 전투 직전에는 13개의 중대(company)가 군대의 정규 조직으로 편입되었으며 근위병에는 4개 중대, 9개 중대는 Ordonnace 부대에 소속되었다. 만약 이것이 초기에 조사된 기록이라면 대략 2,000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의 소속은 알 수 없으며, 또 다른 2,000명의 궁수는 1475년 증원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약 10개의 부대(element-약 250명)의 독립된 영국 장궁병이 있다고 추산되며 그리고 아마 더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중 얼마나 되는 비율이 말에 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Handgunners (*역겔 미스트?d의 설명->저기 나오는 handgun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총통-에 가까운 물건. 방아쇠도 없이, 나무 개머리판위에 작은 포신을 얹고 달군 철사를 심지 꽂는 구멍에 꽂아 화약에 점화해서 발사했다고 함...)
약 1,200명의 Handgunner들이 군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나 1472년엔 약 600명만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편제상 약 2~5개 정도의 부대(element)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창병(pike men) (*샤를이 끝내 관광당한 스위스군의 주력도 장창병이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이들도 약 1,200명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1472년 기록에 따르면 사실 2,000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엔 보병 사격수의 숫자가 부족하다. 그래서 아마 실제 고용병들은 이들보다 적었을 것이다. 낭시 전투에서는 그들의 숫자가 눈에 띌 만큼 감소되어 있었다. 그러나 500명 밑으로 떨어졌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
(그 유명한 스위스 장창병. 샤를은 3차례에 걸쳐 이들에게 개발살나고 "무모공"이란 멋진 칭호도 얻었다. 그런데 사실 샤를도 다수는 아니지만 장창병을 운용했다) ●보병 궁수와 석궁병 (Infantry archers and crossbowmen)
이들은 약 1,200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1472년의 기록에 따르면 1,000명만이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낭시 전투에서 그들도 역시 상당한 숫자가 감소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Ordonnace들은 석궁수들로 기록되어 있던 것 같고 일부는 궁수로 명기되어 있다.
●혼합 대형(Mixed formation)
이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약 네 명의 장창병들이 진형의 맨 앞에 서고, 3~4명의 궁수들이 가운데에 서며 후미에는 말을 탄 수습기사들이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탈리아인 (Italians) 1
472년에 처음으로 계약한 것으로 보이며 이 부대에는 500명의 마상 석궁병, 500명의 보병(아마도 보병 석궁병일 듯한...), 400명의 창기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기사보다는 경기병으로 분류되었던 듯 하다. 이들은 1474년에는 "어쨌든" 약 1,000명의 men-at-arms로 분류되어 있다.(이들은 상당수가 쿠스틸러과 비슷하게 취급되었던 듯 하다)
●Low country 동맹의 장창병
소수의 부대였던 것으로 보이며(정규 파이크병으로서는...) 장창병으로서의 능력은 상당했고 이를 기록한 동시대의 자료도 있는데, 사실상 부르고뉴 당국으로부터 무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 4,000명이었고 소문에 의하면 8,000명에 달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봉건 군대(Feudal troops)
그 시대 야전에서 이들의 활약을 찾아보기 힘듬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군대 병력에는 여전히 이들이 계산되었는데, 그들의 숫자는 기록 되어 있지 않다. 1465년 Montl'hery에서는 약 1,200명의 형편없는 장비를 갖춘 Men-at-arms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때문에 무장한 시종을 제외하면 약 5개의 부대(element)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대포(Artillery)
기록에 따르면 그랑송 전투에서는 420문, 모라 전투에서는 200문, 낭시 전투에서는 103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낭시 전투에서는 30문의 야포가 동원되었다. Neuss에서는 17문의 bomabards(사석포)와 210문의 다양한 크기의 대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475년 Lorraine에서는 12문의 사석포와 48문의 작은 serpentine과 23문의 중간 사이즈의 serpentine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리스트는 화약 대포를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15C 말의 야포로서는 매우 훌륭한 부대이다. 사석포는 각 부대(element)마다 6문 정도가 있었고, 경포는 약 30문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크기의 대포는 15문 정도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요새 방어병 Grunhag는 약 2,000명의 보병과 1,200명의 기마병들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9개 부대(elemet)와 확인되지 않은 숫자의 야포가 뒤에 설치되어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