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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지평리 전투(연합군 4천 VS 중공군 9만)

작성자일심|작성시간05.09.24|조회수2,032 목록 댓글 6

나팔소리와 사이렌의 대결 http://www.vietnamwar.co.kr

 

-지평리 (砥平里) 전투에서 -

 

 




 
 ☆목    록   표☆
 
  가. 승리는 승리를 믿는 자에게 돌아간다

 

  나. 전장(戰場)에서 사라진 중공군을 찾아서 

  다. 굶주린 늑대 앞에 뿌려진 미끼


  라. 미끼에 노출된 중공군
 
  마. 나팔과 피리소리를 제압한 사이렌소리
 
  바. 부하를 책임지는 지휘관
 
  사. 근접전투에서 소총의 기능 고장은 죽음을 예고
 
  아. 크롬베즈( Marcel Crombez) 특수임무부대의 구출작전
 
  자. 무너지는 중공군의 포위망
 
 
 
가. 승리는 승리를 믿는 자에게 돌아간다.

 

전투는 끝까지 버티는 자에게 승리의 영광 안겨준다.

 

서양 군대 격언에 "부적당한 지휘관이 있을 뿐 불량한 부대란 없다(There are no bad troops, there are only bad leaders)"라고 하였다. 지평리 전투에서 보여준 미군과 불란서군의 투지는 한국 전쟁사에 잊혀지지 않는 쾌거이다.

 

당시 그들을 이끌었던 전투 지휘관들의 신념과 용기는 커다란 감동을 남겨주었다.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고립되었던 부대가 끝까지 버티고 살아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최악의 상황에 빠지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승리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전투에서는 끝까지 버티는 자에게 승리의 영광이 돌아온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나. 전장(戰場)에서 사라진 중공군을 찾아서

 

1951년 1월 25일 미 8군 사령관인 리지웨이(Matthew B,Ridgway) 장군은 라운드업작전(Operation Round-up)으로 명명된 새로운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중공군을 격멸하고자 하였다.

 

중공군은 엄청나게 많은 병력으로 아군을 향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공격하기 때문에 중공군 자체를 대량 살상하지 않고서는 한국에서의 작전성공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휘하의 지휘관들에게 도시나 촌락의 탈취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중공군을 포착하여 그들과 싸워서 중공군 병력자체를 격멸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중부전선에서는 프리만(Paul L. Freeman) 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2사단 23연대가 선봉부대로서 북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연대에는 3개 보병대대 외에 약 1,000명에 달하는 프랑스 군대대, 105밀리 곡사포 18문으로 구성된 야전포병대대, 공병중대및 14대의 셔먼 중형전차와 게릴라 훈련을 받은 레인저 1개 중대가 배속되어 연대전투단의 병력은 약 4,000명에 달하였다.

 

2월 3일 저녁까지 프리만대령의 휘하 대대들은 지평리(砥平里)에 도착하여 숙영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강력히 편성된 프랑스군 대대도 도착하였다. 한편 남진을 계속하고 있는 중공군의 임표(林彪)는 가장 우수한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지역에 투입된 중공군은 임표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으로 그들은 중부지방의 소나무로 뒤덮인 산과 계곡에서 야영 중이었다. 그가 당장 투입할 수 있는 부대는 약10만에 달하였다.

 

청천강변의 군우리에서 유엔군을 격파한 자가 임표였고 그 부대가 바로 제4야전군이었다.1) 이른바 유령군(幽靈軍)으로 소문나 있었고 서울 점령 이후 얼마동안 자취를 감춤으로써 그 들이 과연 어디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1월달 내내 유엔군의 항공정찰과 정보당국이 그처럼 애를 됐는데도 불구하고 중공군 제4야전군의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임표의 전술은 주력부대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깊숙한 산속에 숨어 있게 하고 소부대를 전선에 남겨놓아 적과 적극적으로 접촉을 유지토록 했다.

 

즉 다수는 쉬면서 다음을 준비하고 소수가 다수인양 위장하는 전술로 공격목표를 선정한 다음에는 야간을 이용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적의 약한 부분을 찾아 집중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밤에만 행군하였다. 낮에는 항공정찰에 포착되지 않게 하여 공중공격이나 장거리포 공격을 피하자는 속셈이었다. 밤 9시부터 걷기 시작하여 새벽 3시까지 6시간 동안 근 80리 (32km)를 걸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모든 인원과 야포와 우마(牛馬)들을 눈에 띄지 않게 교묘하게 숨겼다.

깊은 숲이거나 계곡 또는 촌락에서 중공군 병사들은 낮에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쉬고 있었다. 만약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꼼 짝 않고 있도록 엄한 명령이 내려졌고 단지 소수의 정찰대만이 활동하였다.

 

1951년 2월 초 서울 동방의 지휘소에 있던 임표는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을 포위하여 대전과(大戰果)를 올렸던 것처럼 미군의 약점을 이용한 대작전을 구상 중이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그의 병력을 유엔군 전선의 후방 깊숙이 침투시켜서 유엔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포위를 하자는 것이었다.

 

현대의 기계화된 군대는 많은 양의 유류와 탄약은 물론 식량을 소모하기 때문에 보급선을 차단하면 위험에 빠지고 일단 포위하게 되면 어마어마하게 밀어 부치는 인해전술로 미군을 괴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임표의 전술에는 중대한 허점이 있었다.

 

기동력은 순전히 병사의 발에 의존했고 곡사화기는 차량이 없어서 주로 도수운반이 가능한 박격포뿐이며 화력 앞에 육탄으로 맞섬으로 써 막대한 인원 손실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로지 풍부하게가지고 있던 인적자원들을 물 쓰듯이 써버리는 작전을 구사했다.

 

 

다. 굶주린 늑대 앞에 뿌려진 미끼

 

2월 10일 미 제2사단 23보병연대전투단의 전 병력은 각기 개인호 속에 비스듬히 누워서 차가운 기온을 견디느라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프리만대령 연대의 전 병력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만한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2월 11일 새벽 지평리 동북방의 횡성에 대하여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해 왔다.

 

수천, 수만의 중공군들이 고함과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한국군 3군단을 공격하였다. 임표는 유엔군 진지 가운데서도 가장 약한 이곳에 집중적으로 제1격을 가하였다.

 

한국군 병사들은 용감하였지만 다른 유엔군 부대에 비하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장비도 빈약하였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자 한국군 제3군단의 3개 사단이 무너졌다.

 

그리하여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자마자 유엔군의 전선에 돌파구가 생기고 말았다. 전선의 보병이 무너지자 횡성에서 한국군을 지원 중이던 미군 포병대대가 유린(蹂躪) 당하고 예비로 있던 미 제38보병연대가 적에게 포위당하였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나왔다.

 

미 제38보병연대에 배속되었던 네덜란드군 1개 대대는 대대장이 한국군을 가장한 중공군에게 사살당하기도 하였다. 횡성에 큰 돌파구가 형성되면서 중부지역의 유엔군 전선은 무너졌다.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유엔군은 중부전선에서 약 25마일이나 뒤로 밀려났다. 지평리의 프리만대령의 연대전투단은 완전히 중공군의 첩첩(疊疊) 포위망 속에 고립돼 버렸다. 퇴로도 완전히 차단되었고 항공정찰 보고는 중공군의 1개 사단이 지평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도로를 봉쇄하고 있다고 전해 왔다.

 

자기가 처한 위험을 인지한 프리만대령은 너무 늦기 전에 철수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무전으로 보고하였으나 리지웨이 사령관이 보고를 받고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가 휘 하 장병들을 희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프리만대령이 지평리를 확보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의 요지인 지평리는 미 제9군단과 제10군단의 경계선상에 있었고 만약 이 지역을 상실하면 두 개의 미군 주력 사이에 간격이 발생하여 중부전선 전체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리지웨이 사령관이 계획한 라운드업(Round-up) 작전은 산에 숨어 있는 중공군을 찾아내고 그들을 전투에 끌어들여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이 라운드업작전은 작 전 일정에 따라 계획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리지웨이사령관은 자기가 선정한 장소에 중공군을 끌어내어 싸움을 걸어오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공군력과 화력으로 중공군의 인력(人力)을 쳐부술 수가 있다고 확 신하였다.

 

그는 그가 설치해 놓은 함정으로 승리의 계기를 잡을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따라서 23연대전투단은 중공군을 잡기 위한 미끼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리지웨이사령관은 어떤 적장이라도 그처럼 강력한 부대를 그들의 후방에 그냥 놔두고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중공군은 병력을 집중하여이를 섬멸하려고 기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대담한 과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프리만대령이고 그의 23보병연대라고믿었다.

 

 

라. 미끼에 노출된 중공군

 

리지웨이장군의 함정 걸려 들다.

 

1951년 2월 13일 야간 드디어 중공군은 리지웨이장군이 쳐놓은 함정에 걸려 들었다.

임표는 지평리 지역에 약 9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였다.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평리를 탈취하라는 것이었다.

 

2월 13일 지평리 외곽의 산병호(散兵壕)에서 조마조마하게 적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건너편 고지에서 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정찰대가 귀대하면서 대동(帶同)하고 온 한국인이 수천수만의 중공군이 남쪽과 서쪽에 집결 중이라고 되풀이하였다.

 

어둠이 깔리자 사방에서 중공군의 신호탄이 하늘로 올라갔다. 지평리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기온은 영하로 쪽 떨어졌다. 한 프랑스군 대대의 장교가 자기 천막 속에 웅크리고 않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나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운명과 대결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온 누리를 덮고 있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현실에 관한 것보다도 영혼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다. 』

 

방어진지내의 소총 병들은 개인호 속에서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포병은 사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을 움켜쥐고 있고 수류탄의 안전핀은 쉽게 빠지도록 펴놓았다.

 

만약에 중공군이 집중 포화를 뚫고 소총소대 진지에 육박해 온다면 생사의 갈림길은 각자의 다짐에 달려 있었다. 지독한 한밤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덧신과 벙어리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발은 저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에 적이 깔려있으니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지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입을 다물고 고통을 참는 것 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다릴 뿐이었다.

 

박격포 제1탄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소총수들은 Ml 소총을 꽉 움켜쥐었고 기관총 사수는 노리쇠를 후퇴시켜 실탄이 장전되었나를 확인하였다.

 

적의 박격포탄이 일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이란 아무데도 없고 모래주머니가 갈기갈기 및어졌고 포탄은 가리는 곳 없이 마구 쏟아졌다. 포탄이 터지는 동안 적은 지평리 각 방향에서 접근해 왔다. 갑자기 포탄이 멈췄다. 군우리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때 들었던 중공군의 나팔소리를 들었다.

  

차가운 밤 하늘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등골이 오싹하도록 만드는 기분 나쁜 소리였다.

 

나팔과 호각과 꽹과리와 북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중공군이 덮쳐왔다. 중공군 2만 명이 전면 공 격을 개시했다. 23연대 고참병들은 적병의 선두가 아주 지근거리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으로 적을 쓰러뜨렸다. 적의 2제파, 3제파도 격퇴시켰다. 중공군은 논밭의 개활지를 건너와 보병의 총구 앞에서 무수히 쓰러졌다.

 

 

마. 나팔과 피리소리를 제압한 사이렌소리

 

한편 서쪽의 프랑스군 대대는 잔뜩 총을 움켜쥐고 적을 기다렸다. 그들은 모두가 한국에서의 유엔군 근무를 자청해 지원한 직업 군인들이었다. 이 프랑스군 대대는 1950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23연대에 배속되었다. 대대장은 몽끌레아(Raoul Monclar)중령이었다. 그는 베레모를 쓰고 뿔테 안경을 걸친 58살의 노병으로 오래전에 프랑스 외인부대2) 입대할 때에 본명인 마그랭 버르너리(Magrin Vernery)를 버리고 개명하였다.

 

제1, 2차 세계대전때 그는 그의 새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미 그는 제1차 세계 대전때 7번이나 부상을 당하였고 1l번이나 그의 공적서가 보고 되었다.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용맹을 떨친 그는 가장 정력적인 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투에서 보병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그의 정식 계급인 육군 중장(General He Corps d'Armmee)을 떼어 버리고 스스로 육군 중령을 택하였다. 몽끌레아의 부하들도 대부분 이런 부류의 싸움 꾼 들이었다.

 

중공군이 이 프랑스군 대대의 200야드 전방의 캄캄한 곳에서 공격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군 전방 보병들은 적과의 거리를 중공군의 발자국 소리로 짐작하였다. 그러자 어둠 속에 돌격신호인 호각과 나팔소리와 피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음의 전장에서 인간의 신경을 자극하는 이 소리는 프랑스병사들을 섬뜩하게 만들어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데 충분했다.

 

중공군은 "?X라?X라" 하는 떠드는 소리와 함께 착검을 하고 돌 진해 왔다. 바로 이때 귀청을 ??는 듯한 요란한 사이렌소리가 차가운 밤에 돌진해 오는 중공군 떼를 향해 무섭게 울려 퍼졌다. 이 사이렌소리를 들은 프랑스군 병사들은 언제 누가 저 사이렌을 가져 왔는지, 왜 가져왔는지, 어디다 두었었는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적을 보고 흥분한 병사가 사정없이 이 수동식 사이렌을 돌려댔다. 왱-왱-왱-. 사이렌소리는 적의 돌격함성도 모두 집어삼키고-무섭게 울려 퍼졌다.

 

중공군의 나팔소리와 호각소리도 삼켜버리고 프랑스군의 진영으로부터 천지에 울려 퍼졌다. 미친 듯이 울려대는 조그만 수동식 사이렌소리 ! 중공군의 돌격대열은 난데없는 사이렌소리에 어안이 벙벙하여 주춤했다. 이때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붉은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해적 (海賊)같은 고참 용사들이 착검한 채 진지를 박차고 나아가 돌격을 감행하였다. 중공군과 프랑스군 돌격대가 진지 앞에서 맞부딪쳤다. 이 돌격이 몰고 온 충격효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함성을 지르면서 돌진하자 중공군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지고 겁을 집어 먹은 중공군들은 뒤로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은 도망치는 중공군 병사 15명을 붙잡아 목을 끌고 돌아왔다.

 

그날 밤 프랑스군 정면의 중공군은 감히 재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인해전술로써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이 사용한 공포의 심리전은 야간방어진지에 투입된 병사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장(騷場)의 밤 하늘을 뒤흔드는 사이렌소리에 그들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음향효과는 인간의 심리를 충분히 마비시킨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은 괴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또한 이슬람(Islam) 교도들이 낙타를 타고 적진에 쇄도하며 질러대는 괴성은 이교도들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주었다.

 

1815년 Waterloo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의 피리소리는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고 마침내 승승장구(乘勝長驅)하던 나폴레옹 군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1940년 불란서를 침공하던 독일군은 뮤즈강 도하작전시 고성능 확성기를 장착한 항공기의 저공비행으로 불란서군을 혼란에 빠뜨렸고 이러한 공포의 소음은 민간인들까지 큰 영향을 주어 프랑스군의 쾌주를 가속시켰다. 그러나 한번 경험한 프랑스군은 한국전에서 전장의 교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적에게 속고 적을 속이는 예측할 수 없는 전장에서 기발(奇拔)한 착상과 아이디어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지평리에서 사주방어를 하며 사수를 결의한 23보병연대전투단은 밤새도록 계속된 적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물리쳤다. 밤새 계속된 2만여 명의 중공군 2개 사단의 공격으로도 23보병 연대전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으나 언제 또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침이 되자 중공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중공군은주간이 되면 유엔군의 항공기가 그들을 향해 공격할 것이라는 것과 이때 공격은 자살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 도망간 것이 아니라 지평리의 야포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 산간지역(山間地域)에서 재정비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단지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간전투에서 중공군의 대가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진지 전방에는 약 4,000명 가까운 중공군이 즐비하게 죽어 있었다. 그러나 23연대는 중공군의 박격포와 돌격에도 피해는 경미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연대장의 엄명에 따라 전 연대원이 깊숙이 땅을 파고 들어갔고 각 호마다 엄폐할 수 있는 준비가 완벽하였고 접근로를 사격으로 제압할 수 있도록 완전한 준비를 하고 정확한 사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바. 부하를 책임지는 지휘관

 

중공군의 2일차 공격

 

2월 14일 아침 기이(奇異)하리만큼 고요하였다. 프리만대령은 어젯밤 적의 박격포 사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당했다. 10군단 사령부에서는 헬기로 탈출하여 치료를 받을 것을 명령하였으나 압박붕대를 감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내가부하를 이끌고 여기에 왔다. 내가 반드시 이들을 데리고 나간다. 』 연대장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장병들은 주변 고지를 정찰하고, 적 포화에 파괴된 진지를 보수하고 철조망과 조명지뢰 등으로 진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수송기 편대들이 날아와 수십 톤의 보급품을 낙하산으로 투하하였다.

 

헬기가 날아와 부상자들을 실어갔다. 헬기가 한대 날아와 연대지휘소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아직도 주변 고지에는 중공군이 있어서 저격을 받았으나 헬기에 명중되지는 않았다. 거기에서 내린 사람은 방한모 앞창에 별을 단 장군이었다.

 

병사들은 그들의 눈을 의심하였다. 리지 웨이 사령관같은데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상징인 가슴에 매달린2개의 수류탄으로 리지웨이장군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연대장에게 『귀관은 하룻밤만 더 견디어 주게!』라고 프리만대령에게 말했다. 장군은 왜 23연대가 이곳에서 싸워야만 되는지 왜 중공군을 들판으로 끌어내어 섬멸해야만 되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왔다.

 

그는 밤새 전장상공에 조명비행기를 체공(滯空)시킬 것과 더 많은 장거리포 지원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아군의 전세(戰勢)가 다시 위기로 치닫고 있을 무렵인 1950년 12월 26일, 리지웨이장군이 의정부북방에서 전사한 워커장군의 뒤를 이어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가 대구에 부 임하여 최초로 접한 전황은 암담하기만 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한 ? 만(韓 ? 滿) 국경까지 진출했던 유엔군은 기습적으로 한국전투에 투입된 30개 사단의 중공군에 의해 만신 창이가 되어 있었다.

 

장병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고 각급 지휘관들은 전투에 자신을 잃고 있었으며 전황 브리핑에서 보고하는 것이라고는 후퇴계획뿐이었다. 전선을 돌아본 리지웨이장군은 그가 해야 할 첫째의 급선무는 휘하장병들의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각급 지휘관들로 하여금 난국을 타개하여야 할 그들의 책무를 자각토록 하는 것임을 확신했다.

 

혹한에도 불구하고 앞가슴에 2발 의 수류탄을 매달고 덮개를 제거한 찝차에 노구를 싣고 최전선을 누비기 시작했다. 빙설(氷雪)이 뒤덮인 산령(山嶺)을 도보로 오르내리기도 하고 병사들의 행군대열에 끼어들기도 하면서 고통과 위험을 그들과 함께 했다.

 

그는 후퇴계획만 거듭 보고하는 지휘관들에게 『우리의 선열들이 만약 이런 식의 부대지휘를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관속에서 돌아누울 것이다. 난국에 처한 지휘관의 책무는 가장 위험한 전투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전투가 개시되면 사단장은 격전 중에 있는 대대장과 그리고 군단장은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는 연대장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

 

지휘관의 위치는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 그 현장이어야 한다. 』라고 역설했다.

『전투의 실패, 지휘체계의 와해, 공포심의 조성 등으로 초인적인 그 무엇을 병사들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될 때, 지휘관의 솔선수범은 기적적인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 』 -롬멜-

 

2월 14일 어둠이 깔린지 얼마 되지 않아 지평리에는 백색신호탄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동시에 기분 나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7시가 막 지나자 중공군의 야간공격이 시작되었다. 중공군 병사들은 눈 위를 저백거리면서 넓게 전개하여 움푹 파진 곳을 따라 돌진해 왔다. 임표는 전날 밤 지평리 탈취에 실패한 데 대해 화가 나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새로이 3개 사단을 투입했고 거기에다 다른 곳에 있는 사단에서 3개 연대를 차출하여 병력을 증원시켜 섬멸전에 투입시켰다.

 

전술적 요지요부(要地要部)인이 지평리 거점이 중공군의 전진을 저지하고 있는 이상그것은 격파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2월 14일 밤의 지원 병력까지 합치면 지평리에 집결된 중공군의 총 수는 9만에 달하였다. 그것은 방자의 병력에 비하여 약 20: 1로 우 세하였다.

 

산속의 중공군을 들판으로 끌어내어 우세한 화력을 이용 섬멸하여 전세를 역전시켜 보려는 UN군과 목구멍에 가시같이 붙어있는 UN군을 광범위하게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중공군의 계 획이 맞부딪친 즉, 양개 사령관의 자존심과 장차전의 방향을 가늠하는 한판의 승부였다.

 

공격신호가 있은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연대는 사투가 벌어졌다. 중공군 야간공격의 선봉은 긴 장대 끝에 장치한 폭약을 휴대하고 엄체호를 폭파하기 위하여 돌진하였고 또한 철조망 파괴용으로 긴 쇠파이프에 고성능 폭약을 장전하여 덤벼들었다.

 

몇 명은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통과하였으나 대부분은 그 과정에서 사살되었다. 죽은 자의 시체에 걸려 나뒹굴어지기도 했고 더 많은 병력이 몰려들었다.

 

곡사포와 박격포의 화망에 걸려들어 쓰러지고 화망을 벗어난 자들은 지뢰지대에서 쓰러지고 어떤 자는 철조망에 걸려 버둥거렸다. 그곳을 지나 접근하는 무리의 대부분은 기관총의 최후저지사격으로 쓰러졌다.

 

이 순간은 무서운 광경이었다. 지평리를 유린하라는 명령을 받은 중공군은 다 죽는 한이 있어도 공격을 할 수밖에 없고 중공군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미군과 프랑스군은 사주방어 선이 무너지면 전부 몰살당하게 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중공군을 격퇴하는 길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사람이 파도같이 몰려서 밀려들었다. 조금도 줄어들 줄 모르는 파상공 격은5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제파는 곡사화기의 탄막지대를 통과하고 지뢰지대와 철조망지대를 사람의 물결로 뒤덮어 미군진지에 한발 한발 접근해 왔다.

 

적의 공격은 타원형으로 배치된 사주방어 진지의 전 방향에 지향되었고 특히 2대대가 배치된 지역이 가장 치열했으며 여기에 중공군의 주공이 지향되었다. 매 10분마다 새로운 제파가 밀어닥쳤고 작은 고지 전면에는 중공군의 시체가 무더기로 쌓였지만 중공군은 이를 개의치 않고 계속 밀어닥쳤다.

 

 

사. 근접전투에서 소총의 기능 고장은 죽음을 예고

 

프랑스군의 한 부상당한 병사는 연대구호소에서 치료를 받던 중 그의 중대지역이 돌파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병사는 그의 왼팔이 부상을 당해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기어이 중대로 되돌아가겠다고 우겨댔다.

 

군의관은 이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꼼짝하지 못하도록 군화를 빼앗아 숨겨놓았다. 그런데 이 프랑스 병사는 일어나 추위에도 불구하고 양말 바람으로 자기중대쪽으로 뛰어갔다. 한 팔이 붕대에 감겨 묶인 채 동료들에게 따라 오라고 소리치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수 명이 그를 따라 무리를 지어 뛰어갔다. 그는 성한 우측 팔에 권총을 들고 중공군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번쯤 죽음을 경험한 부상병들은 죽음 앞에 초연해질 수 있다. 병상에 앉아서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공격을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오히려 몸이 성한 사람보다 더 과감하고 용감해질 수 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시 전장에서 부상당한 한 병사가 병상에서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왼쪽 다리는 이미 절단된 후였다. 복도에서 간호원의 구두소리가 들리자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봐 간호원 ! 내가 다시 예루살렘을 위해 싸워야 한다면 아직 한쪽 다리가 남아 있다고 전해 주시오!』

 

1973년 10월 전쟁시 골란고원에서는 수백 대의 시리아군 전차가 파죽지세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의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기갑여단 본부지역에 낙오된 프비카 (Zwika)중위는 구호소에서 활동이 가능한 부상병들을 모아서 고장 난 전차를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였다. 전차의 포탑을 교환하고 캐터필러틀 수리하며 일부 병사들은 물 장전하고 연료를 주입하였다.

 

마침내 3대의 채생전차를 만들어낸 부상병들은 프비카중위를 급편된 소대장으로 하여 적의 주요 공격 축 선상으로 돌진해 나아갔다. 그들은 전차매복으로 시리아군의 선두 기갑부대에 기습적인 타격을 가하여 적 전차 10여 대를 불태우고 수백 대의 전차 기동로를 막았다.

 

프비카중위의 부상병 전투원들은 사생결단으로 50:1의 압도적인 적을 막아내어 이스라엘군의 반격작전에 귀중한 시간을 벌어 주었다. 남쪽의 23연대 2대대 G중대의 중앙에 위치한 맥기중위의 3소대에서 있었던 육탄전은 역사상 어느 보병전투보다도 혹독하고 잔인했다.

 

기관총과 소총의 볶아대는 소리와 수 없이 날아가는 예광탄의 비행, 가끔 진지에 접근한 중공군의 장대폭약 터지는 소리, 적군의 비명, 부상병의 아우성과 울음소리, 그런 가운데 맥기중 위 소대의 각 호마다에는 6~9구의 중공군 시체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중공군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약 15명의 중공군이 맥기중위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부상당한 소대 자동소총수의 자동소총을 집어서 갈쳤다. 그러다가 자동소총이 고장 났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손칼을 끄집어내어 수리하려고 나사를 풀다가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몸을 구부려 어두운 곳에서 손칼을 찾으려 할 때 4m 앞에서 중공군 한 명이 총을 겨누고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고장 난 자동소총을 버리고 호안에 기대어 세워둔 자기의 카빈총을 집어 들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격발이 되지 않았다. 추위 때문에 노리쇠에 바른 윤활유가 얼어붙은 것이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노리 쇠를 당겨서 전진시켰다. 그리고는 적병을 향하여 4번이나 방아쇠를 당겼다. 중공군이 푹하고 쓰러졌다. 이때 맥기중위는 등 뒤에서 3명의 중공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맥기중위를 내리치려고 할 때 부하들이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였다.

 

그때 소대 전령 인몬일병이 얼굴에 파편을 맞고 외쳤다.

 

『소대장님! 부상당했습니다. 나를 후송해 주십시오.』

 

병사의 눈에서는 피가 나면서 얼굴에 흘러내렸다. 맥기중위는 고함을 쳤다.

 

『지금은 데려갈 수가 없어 ! 계속 총을 쏴라 !』

 

인몬일병은 한쪽 눈을 다쳐서 총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소대장 옆에서 피범벅이 된 눈을 비비면서 소대장의 카빈총 탄창에 실탄을 채워주었다. 자기의 Ml 소총과 고장난 자동 소총을 응급조치하고 탄창에 실탄을 채워서 계속 소대장에게 건네주었다. 소대장은 밀려드는 적을 향하여 계속 사격을 하고…,

 

소대장과 전령인 인몬일병의 협동은 비록 한 사람 이지만 소대장호 전면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훗날 확인된 사실이지만 개인호에 혼자 있던 병사는 소총이 기능고장이 났을 경우 조치할 시간이 없어 밀려드는 중공군에게 사살되었다.

 

적들은 부상병이 소대장을 찾는 소리와 전투시 고성으로 소대장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진지에 접근할 때 소대장의 이름「맥기」「맥기」를 부르면서 접근해 오기도 했다.

 

「맥기」 중위가 있는 G중대로 중공군 공격이 집중되었는데, 전날 사용했던 자동화기 진지를 변경하지 않아 그 후 전투에서 고전을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소총의 최대합사 속도가 요구되는 순간 ! 진지 앞에 적이 쇄도하거나 야간 매복작전시 노출된 적에게 최대의 사격을 퍼부어야 할 때 소총의 기능고장은 죽음을 자초하고 만다.

 

평상시에는 배운 대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으나 전투시에는 손발이 떨리고 당황하여 제대로 행동할 수가 ?게된다. 특히 무월광시 탄알집에 실탄을 신속하게 채우거나 이 탄알집을 소총에 정확하게 장전할 수 있는 요령은 반드시 숙달되어야 한다.

 

월남전에서 치열한 야간전투 중에 탄알집 장전에 미숙한 초년병들이 집중사격을 제대로 못하거나 방황한 나머지 소총에 탄알집을 거꾸로 꼽아서 기능고장을 일으키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아. 크롬베즈( Marcel Crombez) 특수임무부대의 구출작전

 

한편 8군사령부에서는 지평리에 고립된 23연대전투단을 구출하기 위하여 전차 23대와 1개 소총중대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를 구성하여 중공군 전선을 돌파하여 연결작전을 하고자 시도했다. 만약에 해가 지기 전에 중공군을 지역일대에서 몰아내지 않는다면 지평리의 수비대는 아무런 외부 지원도 없이 부족한 탄약과 얼마 남지 않는 인원으로 지옥과 같은 세 번째 밤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날(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대령이 지휘하는 미 제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가 23연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부대를 출발하여 북진을 개시하였다. 크롬베즈대령은 즐겨 매던 노란색 스카프를 나부끼면서 5번 전차의 포탑에 상반신을 내놓고 전속력으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크롬베즈대령은 적지에 고립된 우군을 구출하기 위하여 중공군의 진지를 돌파해야만 했다. 전차의 기동력을 이용한 과감한 전격작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하들의 용기와 신념을 북돋아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하여 스카프를 했다. 이것은 중공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수임무 부대원들은 그들의 상관을 통하여 인디언 사냥에 나갔던 기병대의추억을 되살리며 적진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이미 사라졌고 2개월 전 군우리 계곡에서 중공군에게 당했던 뼈아픈 실책을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였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즉각 중공군의 치열한 포화에 부 및 쳤고 도로 양측의 고지란 고지에서는 빗발치듯 적의 총탄이 날아봤다. 전차위에 탑승한 보병은 적탄에 노출되어 부상을 당하거나 쓰러졌다. 중공군은 미군전차를 어떻게든지 저지하기 위하여 폭약을 들고 전차에 뛰어들어 전차궤도를 파괴하려고 벌떼처럼 덤벼 들었다. 이들은 전차의 기관총으로 사살 당했지 만 적의 로켓포탄으로 2대의 전차가 나가 떨어졌다. 파괴된 전차는 도로 옆에 누우면서 연기를 뿜었다.

 

승무원이 채 탈출하기도 전에 도로가로 밀어 붙이고 다른 전차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전진을 계속하였다. 부상당한 보병과 뒤에 처진 병사들이 중공군에게 붙잡힐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전차에서 충을 맞고 땅으로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전차가 정지할 수 없었다.

 

일단 정지하게 되면 적의 조준사격에 더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고 전차 자체도 위험하게 되며 결국은 지평리에 고립된 우군 구출은 물론 임무달성도 불가 능했기 때문이었다. 포 1문과 기관총 3정이 장착되어 있는 전차는 주간에는 막강한 요새이지만 산간지역의 좁은 협로에서 정지하면 곧 죽음을 의미하며 야간에 적에게 포위된다면 전차병들은 전차속에서 꼭 갇힌 채 적병을 美지도 못하고 적이 전차를 하나씩 격파해 오는 것을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전차대열은 전진간 좌우 능선상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적의 치열한 탄막을 두 번이나 뚫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지평리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적의 포위망에 갇혀서 양쪽의 우군부대가 전 부 섬멸 당하게 되기 때문에 초조하였다.

 

한편 지평리에 있는 제23보병연대 전투단은 프리만대령의 다리 부상이 악화되어 헬기로 후송가고 2대대장 에드워드(JamesW. Edwards) 중령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적의 야간 공 격에 대비하여 적이 야간에 탈취한 전면의 작은 고지에 역습을 하고 있었다.

 

크롬베즈 전차대가 돌진하고 있던 길은 에드워드중령 대대의 역습을 완강하게 저지하고 있던 중공군의 진지로 곧장 뻗어있었다.

 

크롬베즈대령의 전차 21대는 중공군의 배후로 곧장 돌 진하여 중공군의 지휘소와 탄약보급소, 구호소에 포 사격을 가하면서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모든 시설을 버리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고지정상으로 달아났다. 한편 지평리의 에드워드중령 부대는 주간에 전차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매설한 지뢰를 모두 제거하였다. 지평리에 있던 전차 4대는 중공군의 배후로 우회하여 중 공군에게 집중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에 크롬베즈대령의 전차부대가 나타났다. 양쪽전차가 마주치자 최초에는 서로 오인하여 사격을 할 뻔도 하였으나 미군임이 확인되어 서로 환호성을 지르면서 용기백배로 합세하여 중공군의 배후로 쇄도해 쳐들어갔다.

 

 

자. 무너지는 중공군의 포위망

 

전차 공격에 마비된 중공군

 

중공군 지휘소에서 전방부대를 지휘하던 지휘관 및 참모 등으로 구성된 200여 명의 본부요원은 전혀 예기치 못한 날벼락 기습을 받고 일시에 총과 진지 및 지휘소 시설물을 버리고 미군 전차를 피하여 후방이 아니라 제일선에 배치된 진지 쪽으로 도망을 쳤다. 전차의 굉음을 동반한 미군의 추격과 진지유린(陣地蹂躪)은 맹렬했다.

 

이 갑작스럽고도 요란한 미군의 공격은 중공군이 지탱해 왔던 전의를 일시에 무너뜨리고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중공군은 거의 광적으로 용감하게 미군진지로 달려들었으나 불의에 배후를 찔리자 중공군의 전의가 일시에 무너졌다.

 

후방도 지휘계통도 무너지고 전방에 배치된 전투 병력도 덩달아 무너져갔다. 수천 명의 중공군들이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일시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이 와해된 중공군을 뒤雲아 사살하면서 지평리 방어진지내에 당도하였다.

 

기지 방어 책임자인 에드워드중령은 크롬베즈대령이 탑승한 전차에 달려갔다. 둘은 오랜 군 생활의 친구로서 서로 이름을 외치며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크롬베즈대령이 데리고 간 165명의 보병 가운데 남은 사람은23명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성한 사람은 단 1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2대의 전차를 잃었고 142명의 부하가 달리는 전차에 서 떨어져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들 부하들은 중공군의 탄막을 뚫으며 용감하게 적진을 돌파한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전우를 구하기 위하여 지휘관과 함께 생사를 초월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은 진정한 군인들이었다.

 

교육심리학에서 밝히는 바에 의하면 한 학생이 어떤 과목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가장 결정적 요인은 그 과목을 담당한 선생님을 좋아하는가, 않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 원리는 군대의 경우 더욱 강하게 적용된다. 한 병사가 군대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는 분대장, 내무반장 또는 소대장이 좋은가 아닌가에 크게 좌우된다. 한마디로 상관이 좋아지면 군대도 좋아지고 상관이 싫어지면 군대도 싫어지기 마련이다.

 

전투에 투입된 병사들의 임무수행에는 더욱 크게 이러한 것이 적용된다. 전장에서는 지휘관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 그러나 승리를 얻고자 한다면 이러한 구호보다는 지휘관인 나 자신이 좋은 사람(Good man)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가혹한 전장에서 부하들에게 특별한 요구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중공군 진지에서 괴이한 현상이 전개되었다. 일시에 전중공군에게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방어진지의 남쪽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던 중공군 병사들이 그들의 진지를 버리고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미군과 프랑스군의 눈앞에서 산 위를 향해 마구 뛰는 것이었다. 그들은 와해된 무리로 변하여 떼를 지어 도주하면서 미군의 좋은 표적이 되어 주었다.

 

유엔군의 소총수와 전차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雲아가면서 마구 갈겨했다. 전차에 깔리고 기관총에 무수히 쓰러졌다. 소화기의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유엔군의 박격포와 야포가 줄 곳 뒤쫓아 쏘아댔다.

 

중공군 진지에는 일대 공황(恐慌)이 순식간에 발생하여 가속적으로 확산되어 계급과 직책에 관계없이 인간의 도피본능(逃避本能)에 따라 도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후방의 고급지휘관이 있는 지취소로부터 부서지기 시작하여 수습이 불가능하였고 적은 안전하리라고 느끼는 곳으로 무조건 치닫는 흥분한 도망자 집단이 되었다. 약 1시간에 걸친 집중사격이 끝났을 때 수천 명의 중공군이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대살륙전(大殺戮戰)이었다. 남쪽 정면의 G중대 앞 고지에서만도 약 1,5齡명의 중공군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 한국전쟁에 있어서 어느 전투보다도 치열했던 지평리전투도 이렇게 해서 그 막을 내렸다. 리지웨이장군의 대담한 도박은 적중했던 것이다.

 

4,000명의병력을 가진 1개 연대전투단이 두 낮과 밤 동안 9만 명의 중공군 9개 사단을 고착(固着)시켰고 그들을 격파하였다. 임표의 유령과 같은 군대도 북쪽으로 후퇴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한국전에 투입된 이래 처음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지평리에서 대살육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타전선의 유엔군 부대들도 방어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원주부근에서는 중공군의 대병력이 집결하자 포병관측기의 유도를 받은 미군포화가 중공군 4개 사단의 머리위에 사정없이 낙하하였다. 이곳에서만도 약 6,000명의 중공군이 죽고 약 25,000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크롬베즈연대장은 즉시 되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지평리 방어진지 안에는 탄약이 부족하여 오늘밤 적의 야간공격을 견디어낼지 염려되어 빨리 돌아가 보급부대를 데리고 와야했고 기갑부대는 오는 도중에 탄약을 많이 소모하여 얼마남아있지 않아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방어진지내의 중상자를 긴급히 후송해야 했고 오는 도중에 중공군과의 교전 중에 전차에서 떨어진 많은 보병들이 적의 한 가운데서 전차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추운 밤 적진 속에서 전차대가 되돌아와 구출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부상병을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괴로움이었고 지휘관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크롬베 즈대령은 낮의 경험으로 보병의 엄호도 없고 공군의 지원도 못 받는 야간에 전차만으로 골짜기 외길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기를 결 심하고 적의 야간 공격에 대비하였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조명탄이 쏟아지고 눈 덮인 전장을 훤히 비추었으나 적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적들은 철물처럼 밀려가 버렸다. 다음날 2월 16일 아침 줄기차게 쏟아지는 눈 때문에 출발이 늦어져 11시경 행군종대 상공에 항상 포병 관측기를 떠 있도록 조치하고 출발하였다.

 

예상과는 달리 격전을 치루었던 어제의 그 장소에는 적이 단1명도 남아있지 않고 전부 사라져버렸다. 낙오되었던 중상자 4명만을 구조했을 뿐이고 곡수장(曲水場) 북쪽에서 전차와 함께 전투를 하다가 전차만 돌진하는 바람에 적중에 남겨져 탈출을 시도하던 「트레이시」 중령 이하 138명의 대원은 찾을 길이 없었다.

 

지평리 전투를 통하여 미 2사단은 군우리에서 임표의 중공군에게 당했던 치욕을 충분히 되갚았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최후 반격작전인 발지(Balge)전투의 교훈을 상기하고 적진을 돌 파하여 고립된 부대를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1944년 바스통시에서 독일군의 포위공격에 대하여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고 있던 미 101공정사단은 독일군 주공의 공격축선에 큰 장애물로 버티고 있었다.

 

1주일이 넘도록 결사적인 고립방어를 하였던 그들은 미 4기갑 사단이 35km에 달하는 적진을 돌파하는 혈로(血路)를 개척하여 구출되었다.

 

5일간 계속된 기갑부대의 돌파작전은 혹한 속에서 적과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면서 수천 명의 사상자 가 발생되었으나 거대한 독일군의 돌파구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아 놓았다. 이 전투의 성공은 독일군으로 하여금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내리막길로 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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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아이지 | 작성시간 05.09.24 2차대전째 바스통의 상황같기도하구요^^ 잘 읽었습니다.이분들이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누리고있는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 작성자숲속벤치 | 작성시간 05.09.24 사. 근접전투에서.... 를 읽으면서 눈물이 왈칵 쏟네요. 아... 정말 인간이 장엄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자신이 그런 위급한 자리에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 작성자분뇨의역류 | 작성시간 05.09.24 잘 봤습니다...추천...-_- b
  • 작성자시클라멘 | 작성시간 05.09.25 ㅠㅠ
  • 작성자황그미 | 작성시간 05.09.25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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