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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윤봉길의사 손녀 근황

작성자길리성|작성시간20.04.15|조회수874 목록 댓글 4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어렵게 살아와서 나중엔 변절된 경우가 많다고함


일본도 그걸 이용해 안중근 아들이 친일파가 되었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안중근장군의 아내 김아려여사와 딸 안현생 아들 안준생의 사진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에게 사죄한다.

 

이날 안준생의 박분사 방문에 대해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망부의 사죄는 보국의 정성으로

/ 이토공 영전에 고개 숙이다/ 운명의 아들 안중생' 이라는 제목의 7면 톱기사를 사진과 함께 내보냈다.





1939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준생(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이토 분키치(오른쪽 첫번째 앞줄)을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안중근의 아들 둘과 딸 한 명이 있었는데, 큰 아들 안분도는 12살,9살,7살등 정확한 떄는 알수 없지만 길가다가 행인이 준 과자들 먹었는데 알고 보니 독이 들었다고 해요.

 

둘쨰 아들 안준생은 누나 안현생, 엄마 김아려와 함께 상해 일대를 떠돌며 힘겨운 삶을 살게 되죠 일본의 탄압과 감시 때문에 안중근 일가의 삶은 굉장히 피폐할 수 밖에 없었고, 항상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안준생은 장성해서도 직장을 구할 수 없어 평생 거지처럼 힘겨운 삶을 살았죠,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독립군 장군 안중근의 유가족을 돌보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그러다 안준생은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와 이토 분키치(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앞에 끌려오고 거기서 변절과 사죄를 요구받게 됩니다. 물론 생명의 위협도 당했겠지요.

 

굴복한 안준생은 박문사(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남산 장충단에 지은 절)에서  공개적으로 이토 분키치에게 '아버지의 잘못'을 머리숙여 사죄합니다. 그리고 일본 곳곳에서도 이 공개사죄를 계속합니다.

 

나중에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양아들이 되어 용돈을 받으며 살지요. 나중에 그 돈으로 약국을 차렸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안준생을 변절자-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할 정도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망가져 버립니다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하지 않았다." 


-백범일지





친일로 상하이에서 상류층 생활을 하던 안준생과 정옥녀의 1남2녀와 

안중근장군의 미망인 김아려여사의 가족 사진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조선총독부가 연출한 화해극에 출연 등 친일행각 … 이토 아들에게도 머리 숙여 


http://weekly.donga.com/List/3/all/11/89651/1





호부견자(虎父犬子)라더군요.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 하하...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 자리에서 제안을단호히 거절하고 잡혀 죽었야했나요? 영웅 아버지 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사실 아버지는 재판도 받고 가시는날까지 시끌벅적 하기라도했지만, 나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야말로 개죽음 아니었을까요?  내 형은 7살 나이에 자기가 왜 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독을 먹고 죽어버렸죠. 나도 그렇게 죽으란 말입니까? 아무도 기억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죽음을? 왜? 내가 안중근의 아들이어서?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죠?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죠?  


아버지는...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거잖아요. 그래서 죽은 거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통째로 망가져야 합니까?  


나라를 팔고 아비를 판 더러운 자식...친일파...번졀자...  


뭐라 욕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괴로워할 때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잖아요. 나를 욕할 자격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요.  그렇게 버려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권리로...  


내 아들은 의사입니다.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죠.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내 자식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겁니다.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그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하고.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中-


http://m.blog.daum.net/stevenkim/15711174


안중근家의 두 아픔



요즘의 대학은 도구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 가히 모든 종합대학을 이공대학으로 불러도 될 만큼 이공계의 비중이 크며, 연구와 교육도 현실의 유용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연구비의 수주가 전공의 유용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간주되며, 인성 교육을 잘해야 한다는 말은 으레 가끔 하는 소리쯤 되어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 안중근 관련 사료를 평생 모은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흥분했고, 그분을 찾았다. 안중근의 사상과 기백이라면 청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올바름에 대한 교육을 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분은 30년간 일본에 거주하며 안중근 사료를 추적하여 모았고, 그 모든 것을 어딘가 기증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1년 반에 걸친 논의 끝에 사료를 대학으로 기증받아 안중근 사료실을 열었다. 이틀에 걸쳐 사료를 옮길 때, 첫날은 일부러 이삿짐 용역을 전혀 쓰지 않았다. 학생들의 자원봉사를 유도하여 모든 사료를 나르고 정리했다. 힘이 들더라도 학생들이 사진과 책, 지도, 신문을 옮기면서 직접 무언가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여러 사람이 땀을 흘리고 수고를 해야 대학도 안 의사의 문패를 당당히 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공짜는 없었다. 사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라 청년 안중근의 모습이었다. 동양평화와 박애 사상을 찾아 서류 한 장, 사진 한 장을 들출 때마다 거기서 느껴야 하는 것은 스무 살 청년의 아픔과 고뇌다. 그는 열여섯 살에 기울어 가는 나라를 보며 동학농민운동과 관군 사이에 끼어 전투를 해야 했다. 스물일곱 살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교육으로 사회를 일으키고자 삼흥학교를 세웠다. 그것으로 부족하자, 스물여덟에 의병에 뛰어들어 가족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를 거쳐 국내로 침투하여 일군(日軍)과 싸우다 대패하였다. 그러고는 1909년 의거.  


사형을 당하기 전날 안중근은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겼다. 맏아들 문생을 신부로 키워줄 것과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조국의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맏아들 문생은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떤 어른이 준 과자를 먹고 갑자기 죽었고, 안 의사의 유해는 107년이 지난 지금도 어디 묻혔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하는 역사의 통증과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사료실을 만드는 과정에서 알게 된 바는 안중근가(家)는 지금도 두 가지 고통과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에 대한 친일 오명이다. 준생은 윤봉길 의거 직전 상하이를 탈출하지 못하여, 일제의 집중적인 협박과 공작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부친과 형을 잃고, 조국이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준생은 일제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총독부의 공작에 끌려 다녔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기치를 만나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허위 기사를 쏟아냈고 조선인들은 분개하였으나, 정작 집으로 온 준생은 아내에게 눈물을 흘리며 “내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며 통곡했다고 유족들은 전한다.  


다른 하나의 아픔은 가난이다. 안중근, 정근, 공근 세 형제의 혈족 중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유족은 안정근 선생의 며느님과 그의 두 딸이다. 사료를 모으고 정리하며 만난 이분들은 대쪽같이 살고 있었으나, 형언하기 어려운 가난과 씨름하고 있었다. 10여 평 임대아파트를 10번도 넘게 옮기며 병마와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과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전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얼굴도 모르는 미국의 교포들도 마음을 보태 왔고, 동국대에 근무한다는 할머니 교수님도 힘을 보탰다.  


기회가 되면 안준생의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도모하고, 유족들의 어려운 생활에 대해 마음을 다시 모으려 한다. 촛불도 좋고 태극기도 좋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이런 분들을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819/85889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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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사모아 | 작성시간 20.04.15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크레용 | 작성시간 20.04.15 안중근 자녀들을 욕할 수가 없어. 나도 내 가족이 우선일 것 같음
  • 작성자josephinellama | 작성시간 20.04.15 아....안중근의 삶은 무엇이 되나요
    그가족을 나라에서 보호해줬어야 하는데
    하긴 그리 엉망인 정부니 일제의 침략을 받았겠지요

    문통님은 국가유공자들 잘 대우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 작성자논객거사 | 작성시간 20.04.15 그 박문사(박문각, 이토히로부미 추모비각)의 현재 위치는?
    다른데도 아닌.. 장충단 공원에서 빤히 보이는 신라호텔 경내.
    즉, 신라호텔의 경영진이 누군지는 몰라도 관리자임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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