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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산 김 원봉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0.02|조회수280 목록 댓글 0

 

의열단  과  약산   김원봉

 

난,  의혈단에 대해 단순히 폭파와 요인 암살 ,을

주도한 무서운 테러리스트 단체쯤으로 알고 있었다.

특히 ,의혈단을 이끈 < 약산 김원봉 >은 공산주의자로 만

알고 있었음으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고교 역사교과서  에도

아마 공산주의자 , 즉 빨갱이라고 기록 됐거나 ,

그렇게 배웠을 것이라 고 생각해 본다.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아리랑 의 김산)

 

< 홍범도 > 도 공식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단재 신채호 , 석주 이상용,  노은 김규식 등이 조국독립투쟁 으로 일제가

1900년 초 에 영원한 식민지화를 위해 만든 호적이분들의 독립운동 은 ,

이름이 등재 되지못한 이유였지만 , 이분들 스스로가 일본국민이

되길 거부했기 때문에 무적자가 됐다. 해방 후 이승만은 이들을

공산주의자 로 매도하여 신원등재 를 거부 ,

약 300여명이 무국적자가 된 채 , 반세기가 넘었지만

지금까지 속수무책으로 존 재  사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김원봉 ! 그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인물이었고,

그를 추포하기 위해 숱한 방법을 다 동원 하였으나 ,

그때마다 그들은 김원봉의 역습에 공포에 떨어야 만 했다.

해방 후 임정요인과 김구선생 일행에 합류하여

군사부장 의 직함과 장군의 칭호를 받으며

북쪽이 아닌, 남쪽의 서울로 떳떳히

입성한 용맹스런 장군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석주 이상용 선생)

 

 ( 광복 3개월 후 고국땅을 밟는 임정요인 과 김구선생 , 좌측 지청전장군 )

        ( 김원봉은 이대열에 합튜하여 귀국 했을 것이다. )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공산주의자라면

8.15 해방당시 당연히 북쪽인 평양으로 귀국 했어야 옳다.

하지만 < 약산 김원봉 >은 < 김구선생> 의 <임정요인>들과 함께 남쪽의

<서울>로 귀국 했다는 사실이다 . 그의 위용은 이승만과 장택상 의 비호아래

무소불위의 권력과 폭력을 반공의 깃발에 묶어 좌충우돌 하던 <김두한>조차

무서운 사람이라고 두려워 했던 증언에서 그의 과묵한 성격과

여러 정황이 그를 대변해 주고 있다.

  

   

 ( 남쪽만 정부수립을 고집했던 이승만 , 수도청장 장택상 , 백의사 고문 김두한 )

 

" 님 웨일즈" 의 < 아리랑 >에서 < 김산(金山)> 과 더불어

" 아나키스트 " 의 대표적 인물이나 그의 사상은 빨갱이가 아님을 알았고 ,

여기저기 각각의 문헌에도 절대 빨갱이가 아님을 보여준다. 다만,

좌도 아니요 , 우도 아닌 , 철저한 " 아나키스트 " 로서

< 중도파 >였음을 알 수 가있었다 .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는 김산이 김원봉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 자료를

만들어 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라고 서술된 것은 그의 성격과

그때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다.

 

 ( 약산 김원봉 )

 

귀국 후 실세 친일파들 의 홀대와 < 이승만 정권> 의

사냥개 < 노덕술 >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며 종당엔 , 백의사(白衣社) 고문

김두한 의 폭탄 투척으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 더 이상 남쪽에 발을 붙일 곳 이

없음을 깨달은 <약산 김원봉 >은 그 길로 월북하여 그곳에 머물게 됨으로써

완전빨갱이 로 매도되고 만 다 . 그러나 , 그는 북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베일에 쌓인 채 일생을

 마감 하는 운명을 맞다.


  ( 친일경찰 노덕술 <좌측> )

 

그럼 ,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갈망했던 광복된 조국

< 대한민국 >이 왜 ? 그를 버렸 는 가 ?

그 이야긴 잠시 뒤로 미루고 < 의혈단 >의 활약상황 과

<약산 김원봉 >의 독립투쟁의 생생한 기록을

살펴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자.

 

우선 , 귀국 후 제일 껄끄러운 상대는

<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張澤相)이었을 것이다.

< 김원봉> < 의혈단 >은 조선에서 가장 돈 많은 <친일파 >

 장승원 을 살해 했는데 그 장승원이 바로< 장택상 >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있다.

아마도 장택상에게 는 <김원봉> 이 철천지의 원수였으며 ,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모두가 증오의 대상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물밑에서

친일파에 대한 척결문제가 종종 수면위로 부상될 때 마다

그의 행적으로 미뤄 ,장택상 은 더욱 이를 갈았고,

이때는 이미<수도경찰청장>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

<김원봉>을 해할 명분이 명확치 않아

눈엣가시를 껌벅이며 눈에 담는 고통 속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당시 국민들의 <김원봉>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기 때문에 더욱 괴롭고 ,

고통스러웠을 대목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부 독립군 양성론자들은

군대양성노선을 포기하고 소수의 결사를 조직하여 암살·파괴 활동을 위해

같은 해 11월 9일 만주 지린 성[吉林省] 파호문 밖 중국인 농부 집에서

신흥무관학교생인 김원봉(金元鳳)·이종암(李鍾巖)·신철휴(申喆休)

·서상락(徐相洛)·한봉인(韓鳳仁)·이성우(李成宇)·강세우(姜世宇)

·한봉근(韓鳳根), 밀양 3·1운동의 참가자인 윤세주(尹世胄)

·김상윤(金相潤), 상하이[上海] 출신의 곽경(郭敬),

배동선(裵東宣)·권준(權俊) 등 13명이 모여 암살·파괴 노선의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한다. 단체 이름은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 위해 의열단으로 하고, '조선독립과 세계평등을 위해

신명을 바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약 10조를 행동지침으로

결정했다. 또한 암살대상을 조선총독부고관·군부수뇌·

대만총독·매국노·친일파거두·밀정 및 반민족적

토호열신 등 '의열단7가살'(義烈團七可殺)로,

파괴대상을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

경찰서·중요기관 등으로 규정했다.

단장에는 김원봉이 선출 되었다

 

1920년 본부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긴 의열단은

상해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던 한국인들의 재정적·

인적 도움을 받았다. 1920년 6월 제1차 암살·파괴 행동에 필요한 폭탄과

권총을 중국에서 밀양으로 운반했으나, 도중에 황상규·한봉근·윤세주 등이

일제 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20년 9월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투탄의거',

같은 해 11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투탄의거',

1921년 9월 김익상(金益相)의 '조선총독부투탄의거',

1922년 3월 오성륜(吳成崙)·김익상·이종암의 '상해황포탄저격의거' 등의

격렬한 암살·파괴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이승만(李承晩)의 미국위임통치론에

반대하여 신채호(申采浩) 등이 임정 불신임, 국민대표회의소집운동을 제창하자

이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1922년 국민대표회의 세력이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자, 이들을 기관만능주의로

비판하고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 1920년대 부산 경찰서, 좌측 상단인물은 박재혁 의사 )   

                                   

독립운동가 김익상은 한때 기독교계 학교 교직에 있었고,

잘 나가는 연초회사 중국지점에서 근무했었으나 나라독립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뛰쳐나와 서울로 잠입,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26세),

다시 그 이듬해 1922년 3월 상해 세관 부두에서 시찰 나온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살해에 실패, 체포돼 복역 중 감형

석방되었으나  미행하던 일경에게 피살된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리고  제2차 암살·파괴 운동을 계획하여 같은 해 6월 '   

"이종암·최용덕(崔用德)을 국내에 파견해 조선무산자동지회장 김한(金翰)과 접촉,

행동준비를 했다.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 독자적으로 '종로경찰서

투탄의거'를 감행했는데, 이 사건은 영화(밀정)에서도 잘 보여 줬다,

10001 이란 믿기 어려운 총격전을 벌린 김상옥 열사!” 


이 사건으로 일경의 대대적 검속으로 김한

이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에서의 암살·파괴운동 준비는

김시현(金始顯)과 현직 경부 황옥(黃鈺)이 담당했다. 이들은 영국인 쇼우를

끌어들여 폭탄과 선전문건을 국내로 반입했으나, 1923년 3월 밀정의 밀고로

관련자 전원이 체포 되었다.이때 일본에 큰 공을 세운자 는

<반민특위>때 유일하게 사형언도를 받은

친일경찰 김덕기 였다.

 

              (사진은 : 김익상 의사)  ( 황옥 경부 와 김시현 의사 )

 

 

 

1924년 1월 김지섭(金祉燮)의 '도쿄니주바시[東京二重橋]     

폭탄투척의거', 1925년 10월 이종암 등의 '경북의열단사건', 과 함께 ,

 

 

( 김지섭 의열단원)                       ( 김상옥 )

 

1926년 1월 김원봉 이하 단원 12명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입학하여

민족해방운동에서 대중운동이 차지하는위치, 군사이론 및 실전 등을 학습하고

같은 해 10월에 졸업했다. 그동안 김원봉·김성숙·장지락 등은

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中山大學) 졸업생들을 의열단에

포섭하는 과정에서 100 여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엄중 심사하여 단원에 가입 시켰다.  

 

  ( 조선인의 고혈을 빨던 동양척식 주식회사 와  나석주 의사 )

 

1926년 12월 폭탄을 식산은행에 던진것이 불발되자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철도회사를 찾아가 권총을 난사,

일인들을 사살한 후 추격하는 일경에 맞서다 지녔던 총으로 3발을

자신의 몸에쏘아 자결한 나석주는 이미 23세 때 북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의혈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다

 

1926년 겨울 총회를 열어 혁명정당을 세워 운동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으로 확대·개편했다. 이어 민족주의적

강령과 정책을 채택하고 김원봉을 당수로, 김성숙·오성륜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민족혁명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광저우에 두고 활동했으나,

1927년 국공분열로 체제를 갖추기도 전에

유명무실해져 의열단으로 환원되었다.

 

1928년 10월 상하이에서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제국주의타도'·'조선독립만세'·'전민족적 혁명적 통일전선'

·'자치운동타도'의 4대 슬로건과 20대 강령을 발표하고, 지금까지의

유일당운동 대신 국내의 광범한 노농대중에 기반한 조직적 투쟁을 주로

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좌파단원들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둥[廣東] 봉기에 참가했고, 김원봉 이하 소수

단원들은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겼다.

 

1932년 10월 국민당의 도움으로 난징[南京]에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를 개교하여 민족혁명의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1933년 6월 제7차 대표회의에서 노농혁명과 무장투쟁 등의 내용이 첨가된

개정강령을 채택하고 간부학교 졸업생 이육사·노석성 등을 국내에

파견했으나 일경에 모두 체포 되었다

 

1935년 7월 5일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

재미대한독립당·뉴욕대한민단· 미국민회·하와이국민회·국민동지회 등

민족주의 단체가 모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출범됨으로써 참가

단체들의 해소가 진행되고 의열단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선비의 고장 밀양은 경북 안동과 더불어 성리학의 본류로 알려져 있다.

그 맥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의열단원 으로 청춘을 조국 광복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던 많은 투사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약산 김원봉은

밀양이 낳은 걸출한 인물이다.

 

1898년에 밀양에서 태어난 뒤에 십대에 망국인이 되었고,

표충사에서 독학으로 꿈을 키우며 1919년에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해서 일제에 대항하여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 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약산은 일본이 패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과 투쟁은 치열했다  

 

1919년 11월 10일은 약산이 21살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된 날이다.

이후 10여년 가까이 진행된 의열단의 각종 암살, 폭탄투척 같은 의열 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조선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의열단의 투쟁은 그 차제가 무장독립투쟁사의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약산은 의열 투쟁에 머물지 않고 무장 독립군부대 창설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 꿈은 '조선 의용대'의 창설로 이어졌고,

나중에 조선의용군이라는 무장부대로 맥을 이어갔다.

그들은 중국인과 연대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독립투쟁사의 마지막은 찬란할 수 있었다.

 

약산은 해방 전 중국 땅 에서나 해방 후 조선 땅에서 나 좌우합작에 충실했다.

이미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위한 '국공 합작'의 진행을 보아왔던

약산이기에 독립투쟁의 좌우합작을 위해서 일관되게 노력했다.

그 결과 민족혁명당이라는 통합정당의 건설이 가능했고, 말년의 대한임시정부를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과 약산의 이

좌우통합의 경험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 남북제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 같은 좌우통합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일관되게 좌파를

배척하는 입장에 섰던 이승만의

노선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1947년 암살전 몽양 여운형)   1949년 암살당한 백범 김구)



약산이 해방 이후에 좌파운동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담하는 등 친 좌파적인 경향으로 흐른 것을 원래 약산은 좌파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당시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의 코드는 아나키즘 이

아니면 좌파의 성향이 강한 시대였다. 현재의 잣대로 본다면

그는 분명 색갈이 틀린다고 할수있다.

 

그는 분명 해방 후 서울로 귀국하여 몽양 여운형과 좌우합작 을 위해

협동하였으나 , 친일경찰출신 노덕술에게 고문과 따귀를 맞는 수모를 겪고 ,

김두한의 폭탄세례로 남한정권에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거의 절망적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김원봉은 그길로(1948년) 월북하여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 노동상 의 고위직을 거쳤기 때문에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취급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 약산의 실패는 우리가 존경하는

백범 선생의 실패요, 몽양 선생의 실패, 그리고 많은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아나키스트들의 실패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쪽의 이승만이나 북쪽의 김일성 같은

일방주의자들이 성공을 거두게 됐다는 것이 .뷴단 의 원인이며 좌우논쟁 의

원흉들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독립투쟁사에서 약산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반쪽의 역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약산의 최후는 숙청과 음독자살로 알려져 있다.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 약산의 처지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 이 숙청된 상황에서 그가 북쪽에서

건재하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약산의 삶을 좌파요,

빨갱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다. 약산은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조선 의용대를 창건하고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일관되게 좌우합작노선을

걸었던 통합론자로서 평생을 살았다.

약산은 분단과 반목을 청산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가는 우리 시대에 더욱 조명되어야 할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생존해있는 그의 여동생인 김학봉 여사가 명예회복을 위해서 백방으로

 수고하였지만 번번히 서훈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격는다. 그의 부인

 박차정의사 는 건국 공로훈장이 추서되고 의사의 생가가

복원 되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제는 이념이나 사상의 벽을 넘어 대승적인 차원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치 있는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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