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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변 조선인들의 '조국'을 되돌아보다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0.02|조회수260 목록 댓글 0

 

 

'너희 중국' '우리 조선'과 '우리나라'

"동포 같은 소리 하네" '한국말 쓰는 중국인" "다른 나라에 피해 주지 말고 너희 나라로 가라" "조선족 외노자(외국인 노동자) 그만 받아라". 최근 한 신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여전한 이방인 조선족 : '동포'라 쓰고 '남'이라고 읽는다' 헤럴드경제 2016년 5월 19일). 그렇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국적은 중국이고, 이들은 법적으로 외국인이다.

 

국적뿐만이 아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족 2세까지만 해도 "너희 중국" "우리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지만, 3세대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중국을 '우리나라'라고 부른다고 한다. 3세대 이후의 조선족들은 확실히 스스로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조선족이 자신의 조국을 중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의 조국은 언제부터 중국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이들은 언제, 어떻게 중국으로 건너가서 어떤 과정을 거쳐 중국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며 살게 되었을까? 이들은 단 한 번도 한반도(혹은 대한민국이나 북한)를 조국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조선족의 '현재' 국적 때문에, 이들이 처음부터 중국인이었다고 당연히 전제함으로써 묻힌 역사는 없을까? 인터넷에 넘쳐나는 조선족에 대한 혐오와 조롱, 그리고 타자화 속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 안내석(필자 촬영). '중국조선족' 시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과연 윤동주는 자신을 '조선인'이 아닌 '조선족'이라고 생각했을까?


조선족이라는 이름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게 될 조선인/조선족이라는 용어부터 짚고 넘어가자. 우리나라에서 무비판적으로 쓰이는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한인계중국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1949년)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탄생(1952년)을 거치면서 새롭게 정의된 중국인의 일부이다. 이 용어 속에는 조선족=중국인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이전인 1945년부터 1952년까지를 다루는 이 글에서는 이들을 조선족이 아닌 '조선인'이라고 칭할 것이다. 이 시기까지 이들은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중국공산당(이하 중공)도 이들에 대해 한국인(韓國人), 동북조선인민(東北朝鮮人民), 동북조선민족(東北朝鮮民族) 등의 호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태극기와 애국가로 뒤덮였던 1946년의 연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만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의 수는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급증하였다. 해방 당시 만주지역에는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고 있었고, 그중 80만 명 정도가 연변에 거주하고 있었다. 식민지기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 가운데 다수는 한반도로 돌아갔지만 연변 조선인들은 대부분 현지 정착을 선택하였다. 중공도 연변의 조선인을 가능한 현지 정착으로 유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이 연변 총인구의 8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의 정착은 연변의 안정된 지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연변에 남은 조선인들은 늘 한반도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해방 직후 연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발행되었던 '한민일보'의 1945년 10월 24일 기사 (필자 촬영). 이승만과 김구의 소식을 비중 있게 전하고 있다


연변지역 조선인들에게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다. 이들 앞에 펼쳐진 것은 국공내전(國共內戰)이라는 전시상태였다. 연변은 전쟁수행을 위한 중공의 후방근거지로 지목되었고, 연변 조선인들이 가지는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중공이 연변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 승리를 위해서는 연변 조선인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연변지역 조선인들이 '한반도 조국관'을 가지고 다양한 논의와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중공의 대(對)조선인 정책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변 조선인들의 '한반도 조국관'이 집단적으로 표출된 첫 사례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하 반탁운동)이었다. 한반도를 반탁운동의 물결에 휩싸이게 했던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은 연변 조선인 사회도 뒤흔들었다. 연변을 포함한 만주 전역에서 조선인들의 격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1946년 1월 7일 연길에서 열린 반탁군중대회에는 3천 명이 모여 애국가를 합창하고 '조선의 완전 독립'이라는 구호를 제창했다. 이 대회를 주관한 단체는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이하 민주대동맹)이었다.


민주대동맹이 중심이 된 연변 조선인들의 반탁운동 움직임을 보도한 '연변민보' 1946년 1월 8일 기사 (필자 촬영). '연변민보' 는 연변 조선인들의 구심점이었던 민주대동맹의 기관지였다


1945년 10월 27일 연변에서 만들어져 이듬해 8월경 해체된 단체인 민주대동맹에는 13만 7천여 명의 조선인이 가입해 있었다. 민주대동맹은 중공의 연변 장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연변 거주 조선인의 구심점으로 기능하면서 민족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대대적인 삼일절 기념행사의 거행 '아리랑 칠경(七景)'과 같은 조선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연극 상연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러한 행사에서는 태극기 등 민족의 상징물이 등장하였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구호와 애국가 제창 등이 행해졌다. 지금의 '조선족' 사회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해방 직후에는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시기 연변에는 분명 '조선족'이 아니라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삼일절 기념행사 개최를 알리는 '연변민보' 1946년 2월 28일 기사 (필자 촬영)


중공도 조선인들의 '한반도 조국관'을 인정하였다. 중국국민당과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던 중공은 후방의 안정을 위해 조선인들의 요구나 '한반도 조국관'을 강력하게 탄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48년 당시 중공의 조선인 인식을 보여주는 문서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 문서는 중공 연변지방위원회가 1948년 8월 15일에 작성한 '연변지방위원회의 연변민족문제에 관하여'이다. 이것은 이후 중공 연변 정책의 기초가 된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이 문서에서는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이라는 점을 연변 조선인의 특징 중 첫 번째로 꼽았다. 그리고 이들은 "조선 조국사상" 즉 한반도, 특히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짙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연변 조선인들의 소수민족 지위를 확정하고 민족평등 정책을 관철하되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이라는 특징"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중공 연변지방위원회의 판단이었다.


다음으로 당시 중공 연변지방위원회 최고 지도자인 서기 유준수(劉俊秀, 중국인)가 1948년 12월 9일에 작성한 '민족정책 가운데의 몇 가지 문제(초안)'가 있다. 이 문서는 북한정부가 수립된 이후 작성된 것으로, 연변뿐만 아니라 재만조선인 정책의 틀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 문서 역시 조선인을 소수민족, 나아가 '중화민주공화국의 일부분'으로서 규정하면서도, 이들이 '자기의 조국'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조국을 '조선민주공화국' 즉 북한임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여기에서는 조선인들의 '조국'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을 때에는 조선인들이 '조국을 보위'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재만조선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중공 연변지방위원회가 1948년 8월 15일에 작성한 '연변지방위원회의 연변민족문제에 관하여' (필자 촬영 및 편집)


'조국' 전장(戰場)으로 : 연변 조선인들의 한국전쟁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개월 전인 1950년 1월, 중국 중앙인민혁명군사위원회는 관내지역(산해관 이남의 중국 본토 지역)에서 국공내전에 참가하고 있던 조선인 대원들을 북한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중국의 이 같은 결정은 북한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인 대원들이 귀국을 열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156사단은 사단 내 조선인 비율이 높아 '조선 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부대에 소속된 조선인들 중 상당수는 연변 출신이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가하여 계속 남하하게 되자 그것을 거부하고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 대원들은 '중국에서 피를 흘리면 알아줄 사람이 없다'거나, 북한으로 가서 군인이 되면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156사단의 조선인 대원들은 하남성 정주(鄭州)에 집결한 여타 부대의 조선인들과 합쳐 제4야전군 독립 15사단을 결성했다. 독립 15사단의 사단장을 맡았던 조선인 전우(全宇)는 조선인 대원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의 통일에 종사하고 남조선 인민을 해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공 역시 '조선인들이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 보위(保衛)에 나서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임무'라고 천명했다. 독립 15사단은 1950년 4월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다. 그 뒤 이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4월 18일 원산에 들어간 후 조선인민군 제12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들은 조선인민군이 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 조국 앞에 신성한 의무를 이행할 것'을 맹세하였다. 연변 조선인이 '북한의 공민'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연변에 거주하였던 일반 조선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전 직후 조선인민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연길에서는 '서울 해방을 경축하는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등 북한과 다름없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개입 소식이 알려지면서 열기는 순식간에 식었고, 연변 조선인 사회는 불안에 휩싸이면서 극도로 동요했다. 이는 연변의 중국인들이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전에는 한국전쟁에 별 관심이 없던 것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연변에는 더욱 혼란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연변은 북한에서 두만강을 건너기만 하면 진입할 수 있는 첫 후방구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부상병들이 연변으로 밀려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여 전황이 반전되자 변화하였다. 1950년 10월 8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정식으로 '조선출병'을 결의하였고, 15일부터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는' 이른바 '항미원조전쟁(抗米援朝戰爭)'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중국 전역에서 항미원조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항미원조운동의 열기는 한국전쟁을 '자신들의 전쟁'이라고 생각했던 연변 조선인 사회에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연변에서 5천여 명에 가까운 조선인 청년들이 입대하였고, 5,740명이 공작대?통역원?운수대?운전수?담가대(擔架隊 : 들것으로 부상병을 운반하는 대원) 등으로 북한에 들어갔다. 중요한 것은 중국정부가 정식으로 참전을 결정하기 이전부터 지원병으로서 전장에 나가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점과 열광적인 참전 물결이 '한반도 조국관' 더 정확하게는 '북한 조국관'에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연변에서 발행된 신문들은 "조국이 부르는 길, 힘차게 달려"가자거나, 연변 조선인들이 "조국전장"으로 출발했다는 기사를 쏟아냄으로써, 이들의 조국이 북한임을 가감 없이 주장하였다.


연변 조선인들의 한국전쟁 참전을 알리는 '동북조선인민보'의 1950년 11월 5일 기사들(염인호, 2010 '또 하나의 한국전쟁' 역사비평사, 55쪽). '조국'이라는 단어가 선명하다. '연변조선족' 청장년이 아니라 '연변조선' 청장년이라는 표현도 눈에 띈다


중국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950년 9월 20일 발표한 성명에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들이 자기의 조국으로 되돌아가서 조국을 보위하고 조국의 건설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이고 신성한 책무"라고 발표하였다. 중국 중앙정부가 나서 조선인들의 '북한 조국관'을 인정하면서 한국전쟁 참전을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은 연변 조선인들의 조국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이전까지 연변 조선인 사회에 형성되어 있던 일종의 '채권자의식'이 사라졌다.


여기에서 '채권자의식'이란 중공의 항일투쟁?국공내전에 조선인/북한이 매우 큰 기여를 했다는,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조선인/북한이 아니었다면 중공이 항일투쟁?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리킨다. 이것이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여 패망 직전의 북한을 '구원'함으로써 소멸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연변 조선인 사회에 대한 중공의 통제력을 강화시키는 정치행위들이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중공이 연변 조선인 사회에 부여했던 특수한 지위 역시 점차 약화되었다.

대략 1951년 하반기부터 한반도가 조선인들의 조국이라는 표현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고, 대신 중국이 이들의 조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역사교육에도 변화가 나타나, 조선인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취급하고 북한의 역사는 세계사의 범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역사 과목은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도구라는 점에서, 이 같은 변화는 조선인들의 '조국관' 변모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공 측 문서가 있다. 1951년 10월에 연변지방위원회가 작성한 '연변 민족지구 정황과 이후 공작의 몇 개 의견에 대한 초고'가 그것이다.


이 문서에서 연변 조선인의 특징으로 거론한 것은 네 가지인데, ①계급적 의식이 높다는 것, ②노동자 관념이 강하다는 것, ③문화수준이 비교적 높다는 것, ④조직성과 단결성이 풍부하다는 것 등이었다. 이제 더 이상 연변 조선인에게 조국이 있다는 것은 이들의 특수성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어 조선인들에게 국제주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고 이에 따라 몇몇 조선인이 종종 "협애한 민족주의" 관념에 빠져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협애한 민족주의"란 바로 '한반도(북한) 조국관'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공은 조선인들의 '한반도 조국관'에 서서히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통제와 중공의 연변 조선인 사회에 대한 지배력 강화라는 상황 아래에서 연변 조선인들도 조금씩 '조국관' 변화에 적응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1949년에 확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호응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탄생을 낳았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 위생대원들(리희일?서명훈 주편, 1987 '조선의용군 3지대' 목단강 :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이후 다른 부대와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 제164사단이 되었고, 제164사단은 1949년 7월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인민군 제5사단이 되었다. 제5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동해안을 따라 포항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의 주력부대였다. 


국가 중심적 역사인식이 놓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연변 조선인들의 '조국관'은 해방 이후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 전개에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갔다. 구체적으로는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사회주의 정치?사상운동 속에서 '한반도 조국관'이 점차 소멸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의 소수민족에 대한 급진적 동화정책과 북한과의 인위적 관계 단절,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사회의 변화 등으로 조선족들의 민족의식은 점차 약화되어 가는 형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와 새로운 세대에 대한 중국의 강력한 중화민족주의 교육 역시 이 같은 추세를 강화시키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의 민족주의 교육이 강화되고 이에 비례하여 조선족들의 민족의식이 약화된다면, 거기에 조선족학계가 중국의 공식적인 역사기억?역사서술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환경이 더해진다면, 이 글에서 살펴본 '중국 조국관'을 갖기 이전의 연변 조선인 역사는 설 자리를 잃게 되거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필요'에 맞게 다시 쓰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만주에서 전개된 재만조선인의 독립운동도 포함된다. 이미 중국에서는 재만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중국 내 소수민족의 활동영역'으로 분류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적 영토관념의 과거 소급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의 역사인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첨예한 역사갈등을 부를 것이고, 이 같은 역사갈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역사대화에서 조선족과 이들의 역사가 차지하는 역할이나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학계 역시 이들의 역사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45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연변 조선인들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해석하거나 소개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단일 주제로는 가장 많은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는 한국전쟁 관련 연구에서도 재만조선인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국가 중심적 역사인식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 그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었던 1945~1952년의 연변 조선인 역사는 이 세 국가 모두에게서 외면당하거나 해당 국가의 '입맛'에 맞는 역사로 왜곡?변형되었다. 국가에 의해 독점된 역사서술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장(死藏)시키고 있다는 것을, 연변 조선인의 역사는 매우 잘 보여준다. 이것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대를 사는 지금, 중국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조선족들의 '조국관 변천사'를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이다.


*참고문헌 : 염인호, 2010 '또 하나의 한국전쟁 : 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역사비평사

 

글 ㅣ 문미라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콘텐츠 기획·출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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