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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징용 끌려간 조선인 800여명… 해저 1000m 탄광서 혹사당했죠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0.03|조회수54 목록 댓글 0


[숨어 있는 세계사]

징용 끌려간 조선인 800여명… 해저 1000m 탄광서 혹사당했죠

  • 입력 : 2020.06.24 03:00


    군함도

    최근 일본 정부가 일제(日帝)강점기 한국인 강제 노역으로 악명 높은 '군함도 탄광'의 진실을 왜곡하는 전시관을 일반에 공개해 논란이 일고 있어요. 이 전시관에는 "한국인 강제 징용자에 대한 학대가 없었다"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내용이 강조돼 있다고 합니다.

    일본은 일제시대 말기 군함도 탄광을 비롯해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등에 한국인 약 4만명을 강제로 동원했어요. 그런데 군함도를 포함해 메이지 시대 산업 유산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국제사회에 "한국인 강제노역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전시관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지요. 이 약속을 정면으로 어기는 전시관 공개를 강행한 거예요. 우리 정부는 유네스코에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취소를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군함도는 무엇이기에 이런 갈등이 빚어지는 걸까요?

    탄광 개발로 만들어진 군함도

    군함도의 원래 이름은 '하시마(端島)'입니다.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어요. 동서로 160m, 남북으로 480m, 둘레는 1.2㎞, 면적은 0.063㎢로 야구장 두 개 조금 넘는 크기에 불과한 아주 작은 섬이지요.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이지만, 한때는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이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軍艦)'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곳이에요. 당시 그렇게 개발됐던 이유는 이 섬에 많은 석탄이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어요.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 노역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 '하시마(端島)'의 전경이에요.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 노역으로 악명 높았던 일본 '하시마(端島)'의 전경이에요. 면적이 0.063㎢로 야구장 두 개 조금 넘는 크기에 불과한 이 작은 섬은 한때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軍艦)'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별명으로 불렸어요. /위키피디아


    하시마에서 석탄이 발견되고 채광이 시작된 시점은 대략 18세기 말~19세기 초였습니다. 당시엔 그곳에 살던 어민들이 소규모 석탄을 캐면서 부업으로 일삼은 정도였지요. 이곳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미쓰비시'라는 기업이 섬을 소유하면서부터였어요. 1890년 하시마 탄광의 원래 소유자가 미쓰비시에 10만엔을 받고 섬 전체를 양도했고, 이때부터 미쓰비시가 본격적으로 바다 밑에 묻혀 있는 석탄을 캐내기 시작해요.

    미쓰비시에 의해 갱도(광산에 뚫어놓은 굴)가 속속 완성되면서 엄청난 양의 석탄이 나왔어요. 사람들이 이곳에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고 학교가 세워지는 등 기본적인 거주 환경이 갖추어지기 시작했지요.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가 세워졌고 그 뒤로도 고층 건물들이 속속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근대식 아파트 건설은 일본이 하시마를 '산업화와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어요.

    일본, '산업화의 상징'이라 주장

    하시마 탄광은 미쓰비시를 일약 일본의 거대 재벌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어요. 1941년에는 약 41만t의 석탄이 출탄되면서 개발의 최정점을 찍었고, 1960년쯤엔 이 작디작은 섬에 5267명이 살았다고 해요. 이는 당시 도쿄 특별구 인구 밀집도의 9배를 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미쓰비시는 해저 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모든 최신 기술을 이 섬에 쏟아 부었는데, 당시 '도쿄대 우등생들은 모두 하시마로 모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지요.

    하지만 1960년 이후 석유가 등장하면서 하시마 탄광은 점점 쇠퇴하였습니다. 1974년 1월엔 완전히 탄광 문을 닫게 되었어요. 같은 해 4월 20일 모든 주민이 섬을 떠나면서 하시마는 무인도가 되었습니다. 2001년 미쓰비시는 이 섬을 다카시마 지방 정부에 무상으로 양도했고, 2005년 다카시마가 나가사키 시에 편입되면서 하시마는 나가사키에 속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섬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일본의 산업화 유산으로서, 다이쇼 시대(1912~1926)에서부터 쇼와 시대(1926~1989)에 이르는 근대 건축의 전시 장소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죠. 2000년대 언론에 황폐해진 섬 내부 모습이 소개됐고, 200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관광객을 받기 시작했답니다. 지금도 여러 여행사에서 하시마 관광을 진행하고 있는데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해요.

    한국인 120여명이 강제 노역으로 사망

    우리나라 역사에서 하시마 섬의 존재는 매우 아픈 기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장기화하면서 일본 내 탄광과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식민지 조선으로 눈길을 돌렸어요. 한반도의 수많은 청년, 심지어 나이가 어린 학생들까지도 강제로 하시마 섬에 동원돼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지요. 1943~1945년까지 약 800여 명의 조선인이 하시마 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당시 해저 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며 위험한 작업을 해야 했어요. 승강기를 타고 1000m 깊이 해저 갱도로 내려간 후 개미집처럼 퍼진 굴속으로 한 번 더 들어가 채탄 작업을 했죠. 굴의 높이는 50~60㎝밖에 안 되는 아주 비좁은 공간이었고 이곳에서 12시간씩 누운 채로 석탄을 캐야 했어요. 일본인 갱부들이 천장이 높아 채탄하기 쉬운,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일했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갱도 안의 가스 냄새와 탄가루에 대거 노출돼 온갖 질병에 시달렸고, 근무 중 매몰돼 질식사하거나 압사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어요. 강제 노역 기간 동안 조선인 노동자가 120여 명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지요. 노동에 대한 대가도 가혹했어요. 겉으로는 일본인 임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사 측이 귀국할 때 돌려주겠다며 임금 중 상당수를 강제로 공제해 노동자가 실제 손에 쥐는 돈은 매우 적었다고 해요. 섬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종종 있었지만 붙잡혔다가는 마구 구타를 당했기 때문에 일부는 그냥 바닷가에서 몸을 던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거사를 감추기 위해 교묘한 꼼수를 부렸어요. 오직 '1850~1910년'으로 한정해 군함도의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한 거예요. 결국 유네스코는 2015년 7월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최종 확정했지요. 물론 유네스코가 '군함도의 역사 전체를 알게 하라'는 권고문을 넣었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이를 계속 회피하고 있습니다.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ㅣ  기획·구성= 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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