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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0.07|조회수144 목록 댓글 0


왜구 세력은 고려와의 격전을 통해 세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말에 비해 피해 규모가 크게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구 활동이 실제로 크게 감소했다는 사실은 정종과 태종대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왜구 활동이 완전히 끊겼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의 정도는 고려 말은 물론이고 태조대에 비해서도 크게 줄었다. 조선은 태종 8년을 지나면서 사실상 왜구 피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명과 우호관계를 원했던 일본국왕 원도의는 중국의 왜구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악화된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명의 왜구피해는 급격하게 감소한다. 주요 활동 무대를 잃은 왜구 세력은 자연스럽게 조선 지역을 다시 침략했다. 그러나 원도의를 이은 원의지대에는 왜구 통제 의지가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왜구의 주 활동 무대는 다시 명의 연안 지역으로 옮겨갔다. 명에 침입하는 왜구의 규모는 점점 더 증가했다. 왜구 부대의 규모가 커질수록 이에 따른 피해 또한 증가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은 명이 군사행동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고 있던 조선은 명의 일본정벌 계획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명의 일본 정벌이 감행될 경우 조선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은 명의 일본 정벌을 막기 위해서는 명의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을 택했다. 하나는 명에게 왜구의 침략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대마도 정벌이었다.

태종대 기록에서는 왜구의 명에 대한 침략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이를 알려준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은 왜구 정보를 제공했을 경우 명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의심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기 직전의 조선은 왜구 정보를 명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으로 태도를 바꾼다. 명의 왜구피해를 감소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에서 조선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대마도 원정군은 대규모로 편성되었지만 왜구의 주축 세력과 결전을 벌이지 않았다. 이는 조선에서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는 전면전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다. 대마도 정벌의 목적이 왜구 세력과의 전면전을 통한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보이는 동시에 왜구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일본과 대마도와의 관계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갈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벌 이후 일본 측의 태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궁금해 했던 부분이 조선의 정벌 의도보다는 명의 정벌 여부였다는 것이다. 대마도 정벌 다음 해에도 구주절도사의 사신이 명의 왜정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역시 당시 일본 세력들이 파악하고 싶어한 내용이 명의 정벌 여부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에서 정벌을 감행하면서도 일본 측의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일들이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조선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조선이 명의 일본정벌 계획을 저지해서 얻을 수 있었던 두 가지 성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명의 일본 정벌시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벌에 개입할 수 밖에 없는 부득이한 상황을 미리 방지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대외목표의 일관된 추진이 가능해 졌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의 대외목표는 북방 지역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였다. 이를 위해서라도 명의 일본정벌에 대한 계획을 사전에 방지해서 남방 지역의 문제점들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세종대의 여진 경략이 다시 본격화 되는 시점은 세종 5년경 이었다. 이는 대마도 정벌 이후 악화된 일본·대마도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동시에 조선의 국력을 북방 지역으로 기울일 수 있는 시점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조선 초기의 대외목표는 북방지역의 경략에 있었기에 일본·대마도와의 관계 악화는 조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들과의 관계악화는 북방 지역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한국역사연구회, 2009), 447~449페이지
 
원문은 http://www.koreanhistory.org/publish/dbpia.php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와현실 - 역사와 현실 제74호, 2009.12 - 13번째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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