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현재 기리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어쩌면 아주 적은 숫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적은 숫자조차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의 희생과 공로를 전달하고자 영상실록 '영웅'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김구,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첫째 총탄에 김구, 둘째 총탄에 현익철, 셋째 총탄에 유동열, 넷째 총탄에 지청천이 맞았다. 현익철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을,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1938년 5월 7일 중국 후난성(湖南省·호남성) 창사(長沙·장사)의 난무팅(楠木廳·남목청)이라는 건물에서 저격사건이 벌어졌다. 지청천이 이끄는 조선혁명당의 본부이자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던 이 건물에서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등 3당 대표가 통합문제를 논의한 뒤 만찬을 할 때였다. 난데없이 조선혁명당 간부 출신인 이운한이 들이닥쳐 권총을 발사한 것이다.
중상을 입은 김구와 유동열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백범 김구는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기적처럼 일어났다. 둘째아들 김신은 "가슴에 총탄이 박힌 아버지는 의식불명으로 한 달간 입원하셔야 했다. 처음 병원에 실려 가셨을 당시 의사는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아버지를 그냥 응급실에 방치해 두었다. 그런데 수일(4시간 설이 있음)이 지나도 아버지는 숨을 쉬고 계셨고 이를 확인한 의사는 그제야 치료를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중국국민당 총통은 "측근인 후난성 성장 장츠중(張治中·장치중)에게 '모든 힘을 다해 김구를 살려내라'고 명령했다"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당시 장제스는 하루에 여러 차례 전문을 보내 백범의 병세를 물었다고 한다.
당시 백범의 몸속에서 제거하지 못한 총탄은 백범이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할 때까지 몸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백범은 27년 동안 임정을 지키며 무수한 위기를 넘겼다. 백범은 생명의 위기를 넘길 때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게 "전 죽지 않습니다. 서울에 가서 통일된 자주독립국을 보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김구 선생은 그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물을 마실 때 김구 선생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둔 끈을 꺼내 재빨리 그의 목을 묶었다… 머리를 돌려보니 눈은 이미 풀려 있었고 숨이 이미 끊겼다…." 이화림은 후에 김원봉이 결성한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했으며 광복 후 중국에 남아 있다가 6·25전쟁 때 북한인민군 6군단 위생소장으로 참전한 인물이다.
백범은 "범죄자의 처벌은 설유방송(說諭放送·훈방) 아니면 사형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강경하였다. 백범의 비서 격이었던 엄항섭이 백범의 구술을 받아 펴낸 '도왜실기(屠倭實記)'엔 "왜적이 파견한 밀정 가운데 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 놈들의 수효가 셀 수 없이 많았다"라고 적혀 있다.
백범의 최대 업적에 대해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장제스을 설득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백범은 카이로회담을 앞둔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를 찾아가 일본 패망 후 한국을 반드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의한 장제스는 그해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수상을 설득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데 합의했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in due course)"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라는 내용을 선언문에 넣은 것이다. 여기엔 물론 백범과 장제스의 친분이 작용했다.
독립운동가 정화암은 해방 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솔직하게 말합시다. 그때 독립운동 안에 모든 파벌이 다 생겨가지고 동(東)으로 갈 사람은 동으로 가고 서(西)로 갈 사람은 서로 갔는데, 그때에도 변함없이 임정의 간판을 고수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백범입니다. 도산 안창호도 상해에 있었습니다만… 임정 간판을 끝까지 고수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참고=여시동 저 '인간적인 책')
김구, 전 생(生)을 바친 애국(愛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