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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1운동과 여운형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0.22|조회수75 목록 댓글 0

 


 서울지역 3.1 운동 유적지 답사를 준비하면서 3.1 운동 관련 여러 자료들을 읽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3.1 운동 관련 자료를 읽다보면 손병희, 이종일, 이승훈, 한용운을 비롯해  학생대표로 활동했던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등 많은 인물을 만납니다. 물론 나중에 변절했던 최남선, 이광수, 최린 등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3.1 운동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여운형이었습니다.

 

몽양 여운형(1886~1947)1919년을 기점으로 1945년까지 일본인이 가장 주목한 조선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920년대 공산당에도 가입하고,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운동 탓에 1962년 정부에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대대적인 표창을 할 때에도 유공자로 대접받지 못했던 불운은 한 인물이었습니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며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그에 대한 책도 많이 출간되고, 인터넷에도 그에 대한 적지 않은 소개가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 만큼 3.1 운동 전후 그의 활동에 대해서만 여기서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4세까지 한학을 배운 그는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 홍화학교, 우체학교 등을 다니며, 영어와 기독교, 근대적 학문을 접합니다. 협성회 토론회에서 토론과 웅변을 익혀, 일제시기 조선에서 손꼽히는 웅변가가 됩니다. 그는 안창호의 [대한의 장래]라는 연설을 듣고 큰 감동을 받는 등 민족주의자로 거듭나게 됩니다그는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인 1908년 손수 상투를 자르고 노비문서를 태워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자립할 비용까지 나눠주는 등 자신의 사상을 몸소 행동으로 나타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15~1917년 난징 금릉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한 후, 1918년 상해로 이주해옵니다. 그는 미국인이 운영하던 협화서국에 취직해 한인청년들이 구미유학과 도항절차 등을 알선하며 활동하면서 해외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래서 그는 월슨의 민족자결주의, 파리강화회의 개최 등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것이 조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 사건이 될 것이라 판단합니다그는 19188월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징교, 조동호 6인과 함께 신한 청년단이란 단체를 조직해 당수에 취임합니다. 신한청년단에는 신채호, 정인보, 신규식 등도 참여하게 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태가 됩니다.


19181215일 미국대통령 월슨이 중국에 파견한 대통령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왔습니다중국은 칼튼카페에서 그의 방문환영회를 개최했고, 크레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 원칙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연설을 했습니다이 자리에 참석한 여운형이 그의 숙소를 찾아가 한민족 대표 파견 여부를 물었습니다크레인이 개인적으로 지원을 하겠다는 응답을 하자여운형은 신한청년단 회의를 소집해 파리 강화 회의에 영어가 유창한 김규식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여비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청원서 2통을 작성하여 하나는 미국 대통령 월슨에게, 다른 하나는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여운형의 명의로 된 독립 청원서 2통 가운데 1통은 크레인을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졌습니다. 21일 김규식을 비롯한 대표단은 상해를 떠나 파리로 향했습니다.

김규식의 파견을 계기로 여운형은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 김철, 서병호 등은 국내로 보내 독립자금을 모금하고천도교 측과 만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종용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에는 조용은, 장덕수, 이광수를 파견해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종용합니다. 1919 1월 도쿄에서 유학생과 만난 조용은은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음을 통보했고, 이광수는 일본에 가서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됩니다.


3 13일 파리에 도착한 샤토당거리 38번지 집을 세내어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고,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합니다. 뒤에 헐버트, 이관용, 황기환, 조용은, 여운홍 등의 도읍으로 김규식은 5 10 “한국독립 항고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게 됩니다.

한편 당수인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에 파견되어 김약연 등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원칙 등을 설명하여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의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또한 연해주 한인대표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여운형은 시베리아에 주둔한 연합군 사령관 가이다(체코인)를 찾아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도 얻고한국독립 주창 선전문을 영문으로 작성해 연합군에 배포하기도 했습니다여운형을 비롯한 신한청년단의 활동이 19193.1 운동 등을 촉발시킨 불씨였다고 하겠습니다.

3.1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로 파견된 당원이 3월 하순 모두 상하이로 돌아오자 신한청년단이 프랑스 조계 안에 임시 독립사무소를 차리고 4 1일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여, 4 10일 임시정부 의정원회의를 개최하고,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이때 만주연해주 등에 모인 29인의 독립운동가 중 9명이 신한청년단 단원이었습니다신한청년단은 임시정부와 활동이 중복되자, 1922 12월 자진에서 해산합니다.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조선인을 회유시키기 위해,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이 높고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여운형을 선택합니다. 일본은 척식국장관인 고가 렌조(古賀廉造)를 통해 여운형에게 조선 정치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하자면 일본으로 초대 전보를 보냅니다. 그의 일본행에 대해 찬반이 있었지만, 안창호가 여비로 300원을 마련해주자, 여운형은 일본으로 갑니다.

여운형은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삼아 고가렌조를 비롯해 초대 정무총감인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체신대신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 등 일본의 고위 관리들을 만나 일본의 강도행위를 비난하고 조선 독립을 주장합니다. 그는 일본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합니다.


그는 1919년 도쿄제국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주린 자가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가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19191128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실린 여운형의 연설로 일본은 발칵 뒤집혔고 그는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인 인물로 떠오릅니다. 그의 일본행을 반대하던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도 여운형의 항일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는 1919년 당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와 더불어 조선 독립운동의 거물이었습니다


** 이 글은 인터넷에 올라온 여러 글들을 조합해 적은 글입니다.

여운형 선생에 대한 자세한 글은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http://www.mongyang.org/

에 올려져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 약전"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첨부합니다. 



첨부파일 몽양 여운형 선생 약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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