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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을사늑약(乙巳勒約)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0.25|조회수179 목록 댓글 0


🌹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 투쟁

일본은 고종의 서명도 없이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장지연(張志淵)은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이라는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함을 전 국민에게 알렸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 일제히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무효를 부르짖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규탄하는 반대 투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도처에서 분노한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의병으로 유인석과 경상도의 신돌석이 있었다. 을사의병(乙巳義兵)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통신망이나 철도를 끊는 등 활약을 벌였으며, 일진회 타도에도 나섰다.

한편 이상설, 최익현(崔益鉉)과 같은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 투쟁을 벌였으며 참판을 지낸 홍만식, 시종무관 민영환(閔泳煥), 특진관 조병세, 유립 송병선 등이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항거하며 잇달아 자결했다.

사실 자결하기 보다는 남을 죽이는 쪽이 훨씬 쉬운 법인데, 어째서 일본 놈을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지, 그냥 죽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고종도 외교권을 빼앗긴 후 밥만 축낸 것은 아니었다.

고종은 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지 4일 뒤, 미국에 머물고 있는 황실 고문 헐버트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서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이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고 친서를 써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전하도록 했다.

또한 1898년 고종을 몰아내려는 모의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04년 특별사면을 받은 이승만(李承晩)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했다.

이승만의 영어실력을 믿은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에도 고종은 밀서를 보냈지만 여기저기 편지질하느라고 종이값만 들었지, 답장하는 놈은 한 놈도 없었다.

그나마 고종(高宗)이 조선을 도와 주리라고 가장 기대했던 나라는 미국이었다.
'조미통상수호조약' 조항에 서로 돕는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헐버트나 이승만(李承晩)이 가져갔던 밀서는 국무부에 제출하지도 못했다.

국무부에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 서류가 아니라며 접수를 거절했던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별 볼일 없는 것을 가지고 귀찮게 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고종(高宗)이 잘못 생각했다. 미국이고 어디고간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나서지 안그래도 가까이 지내는 일본과 조선때문에 척을 질 생각을 미국이 할까?

더구나 미국에서 볼 때 조선은 자국의 이익에 거의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나라였으니 이런 일에 나설 리 만무했다.
지금이야 미국과 그럴 처지가 아니지만, 이 싸가지 없는 나라가 서양 제국 중에서 조선과 가장 먼저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으면서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후조선에서 볼 일이 없어지니 제일 먼저 짐을 싸고 방을 뺐다.

이승만(李承晩)은 밀사 임무가 실패하자 미국에 남아 학교를 더 다녀 1910년 국제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와이 등지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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