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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한 자도, 부자도 마침내는 망하니...”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1.05|조회수217 목록 댓글 0


“강한 자도, 부자도 마침내는 망하니...”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단노우라(壇ノ浦) 전투에서 패한 헤이케(平家)이야기
 

야마구치(山口)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아카마(赤間) 신궁이 있다. 이 신궁은 여덟 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안토쿠(安德王: 재위 1180-1185)왕의 위패가 있다. 그는 헤이안(平安, 794-1185)시대의 무장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외손자로, 무사집단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단노우라(壇ノ浦)’에서 가문이 패하자 가족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 ‘단노우라’가 바로 시모노세키의 간몬해협(關門海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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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마 신궁의 전경


아카마 신궁 앞 해안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녹슨 닻(碇)이 하나 있다.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싸운 ‘겐페이(源平)전투’ 800년을 기념해서 시모노세키(下關)해양소년단이 세운 것이다. 안내문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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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해양단이 세운 닻(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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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의 유래를 쓴 안내문

<수천황대신(水天皇大神) 안토쿠(安徳)천황을 모시는 아카마(赤間)신궁은 간몬해협의 진정한 신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의 옛날, 겐페이(源平) 단노우라(壇ノ浦)전투에서 헤이케(平家)의 대장 모토모리(知盛)는 닻(碇)을 등에 지고 어린 임금을 동행해서, 바다 깊은 용궁성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닻(碇)도모모리(知盛)’라는 이름으로 노가쿠(能樂: 일본의 전통 예능)와 가부키(歌舞伎: 일본의 고전 연극)에서 용장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 사연을 바탕으로 바닷길 입구를 선택해서 현대의 닻을 봉납하고, 제신의 영혼을 위로하며, 해협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1985년 5월 2일.>

 

이 전투는 일본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겐지(源氏) 가문의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1192년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설치해서 무인 정치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써 바쿠후는 에도(江戶)시대까지 약 700년 간 지속됐다.

 

노가쿠(能樂) 이카리카즈키(碇潜)와 단노우라(壇の浦)

 

‘닻(碇)’의 옆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노가쿠(能樂)보존위원회의 ‘헤이케이야기(平家物語)’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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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 이야기의 안내문

<노가쿠(能樂) 이카리카즈키(碇潜)는 헤이케(平家)가문의 처절한 전투 모습과 비장한 최후를 그린 곡이다. 단노우라의 전쟁터를 ​​조문 온 ‘객승(客僧)’이 함께 탄 나룻배의 어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

 

고기잡이 노인은 다이라노 도모모리(平知盛)의 유령이 노도노카미노리쓰네(能登守教経)의 분전과 장렬한 최후를 자세히 이야기하며 위로한다.

 

‘객승’의 불공에 의해 유도되는 것처럼 용장 도모모리(知盛)의 모습이 나타나 안토쿠(安徳)천황을 비롯해서 일가족 모두가 물에 빠질 때까지의 경과와 자신의 치열한 전투 장면이나 닻을 메고 바다에 뛰어든 도모모리의 환영(幻影)을 객승이 본 것이었다. ‘헤이케이야기’는 이렇게 구성된 후나벤케이(舟弁慶: 만담의 일종)류의 곡이다. 단노우라는 급류로 알려진 간몬해협 하야토모(早鞆)의 세토에 접한 일대이면서도, 헤이케 멸망의 비애와 그 마지막을 아름답게 묘사한 총사(総帥)의 면모와 정취가 연상되게 하는 해안이다.>

 

기원정사(祈園精舍)의 종소리, 제행무상(諸行無常)울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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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있는 공원 입구


필자가 조선통신사 기념비로 가던 공원의 입구에 할머니인지 어머니인지 알 수 없는 여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품이 있었다. 조각품 앞에서 어린 두 딸과 함께 사진을 찍던 젊은 여인이 목례를 해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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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도키코와 안토쿠왕의 입수상(入水像)

“이 근처에 사십니까?”
“아닙니다. 시모노세키 도심에 살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기념비에는 무슨 이유로 오셨나요?”
“아닙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오랜 역사의 현장 ‘단노우라’를 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일본 여인과 필자의 생각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필자가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동상은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단노우라(檀ノ浦)’에서 패해 안토쿠(安徳)왕의 할머니인 다이라노 도키코(平 時子, 1126-1185)가 손자를 안고 바다에 몸을 던진 것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동상의 받침대에는 헤이케이야기(平家物語) 제1구(句) 기원정사(祇園精舎)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기원정사(祈園精舍)의 종소리/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 있으니/ 사라쌍수(沙羅双樹)의 꽃의 빛깔/ 성(盛)한 자 필히 쇠(衰)한다는 이치를 드러낸다/ 교만한 자도 오래가지 못하고/ 단지 봄날 밤의 꿈과 같으며/ 강한 자도 마침내는 멸망하니/ 오로지 바람 앞의 티끌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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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이야기 제1구 기온정사

작자미상의 <헤이케 이야기>(오찬욱 譯) 1권 기원정사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풀이돼 있다.


<기원정사 무상당(無常堂)의 진혼의 종소리는 제행무상의 이치를 일깨워주고, 석존의 입적을 지켜보던 사라나무 꽃들은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섭리를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듯 제 세상 만난 양 으스대는 사람도 오래가지 못하니, 권세란 한낱 봄밤의 꿈처런 덧없기 그지 없고, 아무리 용맹해도 결국은 죽고마니 사람의 목숨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티끌처럼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평이(平易)하면서도 삶의 이치가 담겨있는 문장이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시사(示唆)하는 바가 컸다.


‘성한자도 쇠(衰)하고, 교만한 자도 오래가지 못하며, 강한자도 멸망하니, 오로지 바람 앞의 티끌과 같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토록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순간 간몬해협으로부터 불어 닥친 겨울 바람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거셌다. 필자는 몸을 웅크리면서 풀어헤쳤던 목도리를 칭칭 감고서 가라토(唐戶)시장 건물 내부를 향해서 줄달음쳤다.


‘필자 역시 바람 앞의 티끌이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9-01-24 09:55  |  수정일 : 2019-01-2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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