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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농 김가진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1.09|조회수298 목록 댓글 0

 

 

김가진(1846년 ~ 1922년)

김가진(金嘉鎭)의 본관은 신 안동 김씨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김응균 이며 어머니는 성씨가 박씨 라고 전해지는데 본관과 가계는 전해지는게 없다.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에서 태어났다.

김가진은 조선 말 세도 가문인 신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서얼로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
1877년 음직으로 출사해서 규장각 참서관을 지내고 1880년 사헌부감찰 1881년 장례원 주부에 이어서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외교업무 주사를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개화당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독립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으로 적서(嫡庶 :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철폐되자
1886년 나이 40살에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홍문관수찬을 제수받았다.
그 해 고종(高宗)에게 러시아와 협력해서 청나라를 배척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쟁취할것을 건의하자 당시 통상 교섭으로 한양에 와있던 청나라의 총리교섭 통상대신인 원세개(袁世凱)가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를 갔다.

1887년 유배에서 풀려나고 그 해 5월 주일본 변리대신 민영준을 따라서 일본공사관 참찬관으로 일본 동경으로 갔다. 그 해 10월 주일변리대신 민영준이 귀국하자 김가진이 민영준의 뒤를 이어서 판사대신 주일공사가 되었다. 1891년 일본에서 귀국하고 안동부사를 지내고 1894년 협판교섭통상사무로 발탁되고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 :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기관)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하고 김홍집 내각이 출범하자 외부협판에 임명되었다.1895년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고 상무회의소를 발족하고 1896년 7월 독립협회의 창설에 참여하고 독립협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이어서 독립문을 건설하고 독립문 현판석의 "독립문 獨立門"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쓰고 만민공동회 발족에 가담했다.

1897년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고 1902년 지석영, 이종일과 함께 국문학교(國文學校)를 설립하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1904년 3월 다시 농상공부 대신에 임명되고 9월에는 법무대신 겸 후원장
(後苑長 : 창덕궁 뒤쪽 정원)을 겸직하고 오세창(吳世昌)과 함께 후원을 중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렬히 정행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06년 충청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가 그 후 규장각 제학을 지내고 1907년 관직을 사직하였다.

1908년 7월 대한협회(大韓協會) 회장 남궁억이 사임하자 제2대 대한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韓日合倂)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김가진은 조선귀족령에 의해 일본으로 부터 남작
(男爵) 작위를 받았으나 즉시 반납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김가진, 최익환, 전협, 정남용 등은 비밀조직인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하고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최익환, 권태석, 이능우, 엄경섭, 김영철 등으로 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서 인쇄시설을 가추고 선전문(宣傳文)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시켜서 제2차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운동 여론을 촉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1919년 10월 10일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기 위해서 대동단 총제인 김가진과 전협은 먼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안창호에게 의친왕 망명에 협조할것을 요청하였다.

그 해 11월 9일 한기동, 정남용, 이을규, 송세호 등은 의친왕과 함께 고양군 수색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서 11월 12일 만주 안동역(현 단동)에 도착하였다. 의친왕의 탈출을 감지한 일경 평안북도 경찰부는 경부(警部) 미산(米山)을 만주 안동으로 보내서 의친왕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의친왕의 망명에 실패한 김가진은 상해 임시정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의 고문을 지냈다.
1920년 조선총독부는 김가진을 회유하기 위해서 상해로 밀정을 보내서 그를 회유했으나 김가진은 단호히 거절했다.

1922년 7월 향년 77살로 상해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김가진이 일본으로 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을 하지 않고있다.

김가진의 아들 독립운동가 김의한은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고 며느리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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