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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550년 시모노세키(下關)에 상륙한 이방인(異邦人)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1.09|조회수154 목록 댓글 0


1550년 시모노세키(下關)에 상륙한 이방인(異邦人)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영원한 '아시아 선교의 아버지'

 

시모노세키(下關)의 가라토(唐戶) 정류장에서 내리면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06년에 지어진 舊영국 영사관 건물이다.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거기에서 육교를 건너면 가라토 시장으로 이어지는 해변이 나온다. 아침 이른 시각인데도 국적불문, 가라토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는 그들과 섞이어 시장으로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니? 여기에 하비에르의 기념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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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상륙 비(碑)


필자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의 기념비가 있어서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1550년 가을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방인(異邦人)이 상륙했다.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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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기념비의 글

<바라건대, 신의 영광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위해서 온갖 위험과 고난도 있었다. 이 시모노세키 땅에 상륙한 ‘聖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정신과 행동력에 의해서 덕(德)을 봤던 것을.>


 

짧은 글속에 그의 업적과 신앙심 그리고, 인간미가 녹아 있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일본의 가고시마(鹿児島)에 첫발을 내딛었다. 동행자는 코스메 드 토레스(Cosme de Torres)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수사 등이었다. 9월 29일 사쓰마(薩摩)의 다이묘(大名)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 1514-1571)를 알현했으나 포교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다. 2개월 정도 머물다가 나가사키(長崎)의 히라도(平戸)에 갔고, 거기에서 육로로 규슈의 부젠(豊前)으로 갔다. 그리고, 간몬해협을 거쳐서 시모노세키에 상륙했다. 1551년 4월 말 야마구치(山口)의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 1507-1551)를 만나서 선교 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야마구치에서 500여 명 세례 해

 

역사학자 고노이 다카시(五野井隆史·78) 박사는 <일본 그리스도교사>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오우치(大內)로부터 한 사찰을 하사받은 하비에르 일행은 하루에 두 차례씩 설교하는 한편, 길거리에 나서서 많은 청중들 앞에서 일본어로 번역한 교리서를 요약하여 낭독하고 강의했다. 야마구치(山口) 사람들의 반응이 민감해 질문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고, 이에 대한 하비에르의 대답도 멈춰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불교 등 여러 종파의 교리에 대한 지식을 깊이 가지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와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하비에르가 2개월여 만에 야마구치에서 500여 명에게 세례를 주는 커다란 성과를 도출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성과였다.
 
특히, 하비에르는 ‘설교보다는 성덕과 모범을 보이며 선교에 힘썼다’고 한다. 시모노세키 상륙 450주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에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정신과 행동력에 의해서 덕(德)을 봤던 것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노이(五野) 박사의 저서에는 1552년 1월 29일자 유럽의 동료에게 보낸 하비에르의 편지가 소개돼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생에 있어서 이만한 정도의 기쁨과 영적인 만족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비에르 성(城)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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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성의 돌

기념비의 오른쪽에 작은 돌 하나가 받침대 위에 놓여있었다. 타이틀은 ‘하비에르성(城)의 돌.’ 돌 하단에는 마태(마태오)복음 16장 26절이 새겨져 있었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비에르 성의 돌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을까?’

 

하비에르는 1506년  나바라(지금의 스페인)왕국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돌은 그가 태어난 스페인의 하비에르 성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파리대학교와 성 바르브학교(1530년 입학) 학생시절 예수회 창립 7인 멤버가 됐다.  성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된 하비에르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542년 5월 6일 인도의 고아(Gôa)에 가서 가톨릭 교리 해설서와 성가를 현지말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으며,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고아(Gôa)대학교를 설립했다.

 

1550년 시모노세키에 상륙해서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선교 활동을 하던 하비에르는 중국인들의 전도를 위해 1551년 뱃길에 올랐다. 1552년 11월 21일 중국에서 장례 미사 집전 후 열병으로 쓰러져 그해 12월 3일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의 성경 구절이 기념비에 새겨진 이유에 대해서 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는 세상을 떠난 70년 후인 1622년 3월 성인으로 시성됐다. 야마구치를 비롯헤서 가고시마, 나가사키, 오이타 등 일본의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도자키(堂崎)의 나루터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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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의 흔적을 알리는 비(碑)

<산요도(山陽道, 고베-오카야마-히로시마-야마구치에 이르는 자동차도로)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간몬해협을 건너서 규슈로 이어진다. 언제부터인가 도자키(堂崎: 현 가라토)의 나루터로 불리었다. 공식적인 나루터가 여기에 있어서, 에도시대에는 여행자의 왕래 제도를 개선해, 나루터의 입구에 선번소(船番所: 지금의 항만관리소)도 설치했다.


 

여기는 일본 최초로 그리스도교와 서양문화를 전한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성인, 막부(幕府)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과 지사(志士)  다카스기 신사쿠(高彬晉作, 1839-1867) 등 많은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사람들이 이 나루터의 돌계단을 밟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이다.>

 

유명무명의 사람들 중에는 강제적으로 이 나루터의 돌계단을 밟아야 했던 억울한 조선의 무명인(無名人)들도 많았을 것이다.

 

*참고문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상근 연세대 교수 著).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9-01-15 15:41  |  수정일 : 2019-01-16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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