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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돈헌 임병찬 의사 순국비 (거문도 소재)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1.17|조회수134 목록 댓글 0

 

 

필자의 눈에 띄어 올라가 살펴본  순국비 :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도로 위에서 바라본 거문도섬 호텔이다.



파도가 격하게 치는 날은 이 목너머로 바닷물이 넘어 온다나?





거문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해안의 절경. 환상작이다.

이곳이 거문도 등대이다.



거문도 고도에서 숙박을 하고 둘째날은 불탄봉과 신선바위 (또는 목너머를 지나) 거문

도 등대 전망대를  다녀오노라면 거문도섬호텔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비가 보인다.

돈헌 임병찬 의사의 순국비라고 각자되어 있다.


돈헌 임병찬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돈헌 임병찬 의사 순지비 본관은 평택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

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의병장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 군량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 의병장 민종식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하였으나 그해

6월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

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장

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 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

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 의사

는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

를 보내 일제합병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

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 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축출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일본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에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됨을 분개하여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은밀히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귤은의 당기를 지은 바 현재 동도 유촌리 귤은사당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임의사는


1916년 5월 23일(음력) 유배지에서 단식으로 원통한 생애를 마치는 순국을 하여 정부에

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돈헌 이병찬선생의 고종황제 밀칙에 의한 공식직함은 ‘大韓獨立義軍府全羅北道巡撫大將’ 이라고 한다(이치백:사단법인 전북 향토문학연구회 회장의 글 인용)


그렇다면 최익현이란 분도 함께 알아야 할 것이다.



<김세곤칼럼>대마도의 최익현 순국비란 제하의 글로써 대신한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최익현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의 해산 명해
뉴스일자 : 2015년11월19일 11시29분

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11월16일에 처음으로 대마도 여행을 하였다. 이즈하라 수선사(修善寺)에서 면암 최익현(1833~1906) 순국비를 보았다.   

비 앞면에는 "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감옥에서 순국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 될 때 이 절에 머물렀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걱정스러워 이 비를 세운다. 1986.8.3. 한국 대표 황수영 찬"이라고 적혀 있다.

비 옆면에는 비를 세운 한국과 대마도 위원들 이름이 적혀 있다. 한국 측은 대표위원이 황수영이고 위원은 일해재단(日海財團), 김기환 등이다.  그리고 보니 이 비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일해재단이 나서서 건립한 것이다.

당시 순국비 제막식 때 KBS 취재팀이 대마도의 향토사학자 나카도메 히사에와의 인터뷰에서 “항일투사의 순국비를 왜 일본에 세우는가?”라고 질문하였다. 나카도메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든 다 같다. 이를 주창하는 것이 곧 무사도(武士道)이다”라고 답하였다.
일본에 무사도가 있다면 조선에는 선비정신이 있다.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는 붓과 칼의 차이가 있지만.  

그러면 최익현의 항일의병과 대마도 순국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장지연이 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은 백성들은 통곡하였다.    
민영환 · 조병세가 자결하고 최익현 등 선비들은 잇달아 ‘을사늑약은 무효이고 이완용·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그런데 상소운동은 효과가 없었다.


최익현은 의병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전라도를 주목하였다. 경기도 포천 출신이지만 위정척사론자로 명망이 높았던 최익현은 전라도에도 문인이 여러 명 있었다. 그는 문인 고석진의 주선으로 임병찬(1851-1916)을 만났다. 임병찬은 전북 옥구 출신으로 낙안군수를 하였으며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체포에 공을 세워 전투경험이 풍부하였다.   
 


이어서 최익현은 1906년 5월29일에 담양 추월산 용추사에서 기우만등 호남 유생 50명과 만나 대일항전을 협의하였다.


 6월4일에 최익현은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거의  (擧義)를 호소하였다. 80명의 유생들이 즉시 자원하였다. 이로써 을사늑약 이후 최초의 호남의병인 태인의병이 조직되었다.
 
최익현은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라는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 (義擧疏略)’을 배포하면서 의병모집에 전력을 다했다. 특히 그는 포수확보에 치중하였는데 포수 채상순도 초대 대법원장을 한 가인 김병로와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을 따르는 의병은 900여명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와 일제는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갔다. 일제는 광주· 전주 ·남원 · 안동의 조선군을 동원하여 의병을 진압토록 하였다.
 
6월12일에 순창전투가 일어났다. 교전해야 할 상대가 조선군 진위대임을  알게 된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의 해산을 명하였다.

6월14일에 진위대는 최익현과 ‘12 의사(義士)’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12 의사’는 임병찬 · 고석진 · 최제학 · 김시술 등이다. 
8월14일에 일제는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에게 대마도 감금 2년, 고석진 · 최제학에게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는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부산포 초량에 도착한 최익현은 버선바닥에 조선의 흙을 깔았고 임병찬에게 물 한 동이를 떠오게 했다. 일본 땅에서도 일본의 흙을 밟지 않고 일본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8월27일에 대마도 이즈하라 일본군 위수영에 투옥된 최익현은 단식 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4개월 후인 1907년 1월1일(음력 1906년 11월17일) 새벽에 순국하였다. 나이 74세였다.

최익현의 시신은 수선사에 옮겨졌다. ‘왜인들도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줄지어 조문했다. 1월5일에 시신이 부산에 이르자 장사꾼들이 시전을 철수하고 통곡하였다. 승려 · 기생 · 거지에 이르기까지 부의를 들고 와 인산인해를 이루니 저자 바닥 같았다. 동래에서 떠나 던 날에는 상여가 몇 차례나 움직이지 못했다.
(황현의 <매천야록>)’
 
청나라의 원세개와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추모 글을 보내왔다. 그런데 정작 조선 조정에서는 애도의 뜻 하나 표하지 않았다. ‘나라 없는 나라’에서 친일파만 득실거렸으니 무슨 기대를 하리오. 1월20일에 최익현은 충남 예산군 무동산 기슭에 묻혔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그 왜놈들을 작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의병들을 소탕하라는 명을 내린 조선의 정부, 다른 자들은 용서하더라도 그

을사오적 원흉들만이라도 단죄를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는 서민들은 그렇다치고라도 우리의 역사를 알고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는 것이 애국의 길이요, 민족의 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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