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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문도 영국군 묘지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1.20|조회수249 목록 댓글 0


      

        

  거문도 여행에서 제일 멋진 코스를 들라고 한다면 당연 백도 관광이 아닐까하며 그

다음으로는  불탄봉을 올라 →신선바위 → 목넘어→거문도 등대 전망대 코스가 제일

이라고 두 번째 거문도 여행을 통해서 재삼 느끼는 필자의 생각을 피력한다.






  아름다운 바위 섬 백도의 매혹적인 형상, 신선바위에서 바라보는 바다, 거문도 등대

전망대에서 감상하는 경관 진짜 사람 환장하게 하는 절경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지난번 여행 때 가보지 못한 곳 구한말에 영국군이 2년간 무단 점거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바로 영국군 묘지에 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 그깟 뭐 볼 것이 있다고?"

  " 글쎄, 생각나름이겠지. 그저 구경이나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백도와 거문도 등대가

    멋질지는 모르지만 난 우리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지."


 학창시절에  배웠던 "거문도 사건"이란 기억을 되살려본다.

조선을 먹잇감으로 삼았던 러시아와 일본, 주도권을 놓지않으려던 청나라, 세계해군력

1위를 자랑하던 영국과 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가 필요했던 러시아가 조선과의 영흥만

조차권을 인정하는 밀약설이 나돌자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해군.

  그 때의 진실은 병사로부터 들을 수는 없지만  그 병사들의 무덤은 꼭 보고싶었던 것

이다.

 그저 검색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필자

가 원하는 탐구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 (Port Hamilton)이라고 영국이 붙인 이름이지요.

 이곳은 조선 말기인 1885415일부터 1887227일 사이에 일어난 거문도사건

의 역사적 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또렷한데, 대표적인 것이 영국군 묘지인고 거문도에서는 영국군

9명이 숨졌으며 그중 3명의 무덤이 이 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비문을 해석해보면 또 다른 영국인들이 묻힌 비문임을 알 수가 있다. 1885년부터 1887년 사이에

 한국 거문도 해역에서 죽은 7명의 영국선원들이 역시 이 해역 부근(거문도 지역)에 묻혀 있다로

해석된다.

 이 거문도에 묻혀있는 영국 사람은 군인뿐만 아니라 영국선원들도 7명이나 있다는 사실이다.

buried라는 의미는 bury의 과거형으로 묻혔다.. 매장되었다가 아닌가?

어디에? on this site area : 이 쪽편 지역에 부근에 (거문도 해역 부근에)

누구가? seven British seaman : 7명의 영국 선원이  



 1845년 당시 2000여명이 살고 있던 거문도를 처음 발견한 영국 함대가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붙인 것이 포트 해밀턴이다.

 

10여년 뒤인 1854년엔 러시아 해군이, 1867년엔 미국 해군이 거문도에 기항하여 해군

기지로 적합한지 살펴보기 위해서 였다.

급기야 18854월엔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며 영국 해군 군함 6척과 상선 2척이

거문도를 무단 점거했으며 탁월한 지정학적 위치가 제국주의 열강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명분이 없던 영국군은 23개월 만에 철수했지만 그동안 13척의 군함과 2000여명의 병력

이 거문도에 진입했는데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보로봉 정상은 포대를 배치

한 곳, 거문초등학교는 해군 막사 자리이고 테니스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군인을 상대로 장사해 한몫 잡으려는 일본인들도 대거 거문도로 들어왔다는 사실

을 말씀드리면서 현재 거문도의 행정 중심지인 고도는 당시만 해도 무인도였는데 그

왜놈의 종자들이 바다를 매립해 술집과 유곽(몸을 파는 여인들이 있는 곳)을 짓고 길을 

냈던 겁니다.

현재 파출소가 일제시대 지서가 있던 자리로서 해방 직전인 1943거문도에 거주하던

왜놈들은 87355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덧붙입니다.



 거문도는 클 ‘巨’ 글월 ‘文’를 쓴다. 큰 학자가 있은 섬이라는 뜻일 것이다. 거문도의

원래 이름은 고도였다. 거문도는 서도, 동도, 고도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제일

작은 섬인(거문도항 및 관공서와 민박집들이 모여 있는) 고도(古島)를 거문도라 부르기도

 했다. 그밖에도 왜구의 침범으로 지어진 ‘왜도’, 거문도 사건 이전 영국이 제주 근해를

 측량하면서 그들 해도에 표기한 ‘해밀턴’, 섬에 빈번히 드나들던 중국인들이 불렀다는

 ‘거마도(巨磨島)’ 등의 이름이 있다.






거문도는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거문도 점거사건’으로 국내외에 잘 알려졌고,

이때문에 ‘근대 최초’라는 몇 가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최초의 전깃불, 테니스장, 당구장, 거문도

해저 케이블이 그것이다.




 거문도 여행을 통해  지형적인 특징을 관심있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거문도항의  지리적

조건이  매우  특이하다는 사실을  느끼기엔 그리 어렵지가 않을 것이다.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그리고 고도라는 세 개의 큰 섬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형상은

 바다 한 가운데 병풍처럼 펼쳐져 그 중앙에는 1백여 만평 넓이의 천혜의 항구가 형성되

어 있다. 



 거문도 지명의 유례는 처음에는 삼도, 삼산도, 거마도 등으로 불렸다. 지금의 거문도가

되기까지는 청나라  사람 정여창의 상소 때문이다. 호가 귤은인  김유라는 분에게 얽힌

이야기이다.


거문도(巨文島)라는 이름의 유래가 흥미롭다. '큰 문장의 섬'이란 뜻인데 그 연유는  귤은

(橘隱) 김유(金瀏)선생 (1814 순조 14~1884 고종 21)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거문도 출신

의 유학자로서 당시 문장으로 이름이 드높아 이 먼 섬까지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다고

한다.

귤은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위해 귤은당이라는 사당이 동도에 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이번 여행에는 가보지 못했다.

 ‘귤은당’의 주인인 김유는 1814년 동도(거문도는 원래 동도와 서도, 고도로 형성됨)의

유촌리에서 출생한 당대의 선비로, 조선조 6대 성리학자로 손꼽혔던 장성의 노사 기정진

의 수제자이기도 하다.이 섬은 당초 서양에서는 ‘하밀톤’으로, 중국에서는 ‘거마도(巨磨

島)’ 등으로 불렸던 것을, ‘거문도(巨文島)’라고 지명 이름을 바꿔놓은 사람이 바로 김유

이다. 김유가 타계한 1년 뒤인 1885년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거를 계기로 많은 내․외국인

들의 섬 출입이 빈번해졌다. 이때 청나라 수군 제독 정여창이 김유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의 필담에 감탄하여, 이 섬은 문장가가 많은 곳임으로 삼도(三島)를

클거(巨) 글월문(文) ‘거문도(巨文島)’로 명명해 줄 것을 조정에건의함으로써 이때부터

거문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출처: 율곡학파 인물이야기21 안유경)


그러나 필자가 탐구한 기록에는 그 이전부터 거문도라고 기록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지 않은 점도 있는 것 같다.




 참고자료 소개


영국 해군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당시 한 일본인이 여성 5명을 데려와 거문도 서도에서

유곽(성매매 업소)을 운영했다고 한다.

1886년 6월18일 저녁, 2척의 보트에 영국 병사 12명은 나눠 타고, 이 유곽에 놀러 가다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났다. 고도와 서도 사이는 약 500m 거리다. 11명은 구사일생으로

 헤엄쳐 나왔지만, 해병대원 피터 와드(Peter Ward) 일병은 익사했다고 한다. 수영이

미숙했던 데다 주머니에 유흥비로 쓸 은화를 잔뜩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고 영국

해군 기록에 적혀 있는 내용임을 밝힙니다.

주둔지 부근에 늘 따라다니는 윤락여성과 군인들의 일회용 사랑이야기는 흔해빠진 것이

 아닌가?

꿀맛보라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온 병사이야기는 뒤로하고 이 영국군을 상대로 돈벌이에

나선 일본놈들의 교활한 상술이 정말 놀라운 것이다.

왜놈의 족속들은 그 근성이 장사치로는 아주 적성이 맞는 종자인 모양이다. 남의 나라

땅에 허락도 겁도 없이 들어오다니 요놈들 쪽바리 새키들. 똥파리마냥 돈되는 곳은 용케

도 냄새를 맡는 종자들. 늘 남을 괴롭히고 침략하고 강탈하려는 종자들을 신은 왜 그런

종자를 뿌린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거문도 등대가 있는 서도는 고도와 삼호교로 연결돼 있다. 1992년 길이 250m, 폭 5m로

 개통된 이 다리는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세워졌다. 좁은 도로폭 때문에

나란히 차량 두 대가 교행하는 데에 무리가 있어 대형 경광등을 포함한 신호관제시스템

이 양쪽 다리 입구에 설치되어있다. 반대편에 차가 오면 경광등이 켜지면서 사이렌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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