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상하이 프랑스 租界에 수립된 까닭은
입력 : 2019.03.26 03:23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佛당국, 우리 독립운동에 동정적… 일제의 요인체포 계획 알려주기도
1919년 무렵 상하이 한인은 500명에 불과했다. 러시아 연해주엔 10만명 이상 살았고, 하와이에는 5000명 가까운 한인이 있었다. 재정 및 군사 지원을 고려한다면 상하이는 임시정부를 두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국제정치논총'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왜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외국의 행정·사법권을 인정한 지역)에 수립되었나'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논증했다.
당시 상황에서 외교 독립 노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종전 이후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열리고 있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는 프랑스와의 교통과 통신 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가장 안전한 지역이기도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프랑스 조계 당국은 우리 독립운동에 대해 특별히 동정적이었다. 일본 영사가 우리 독립운동자의 체포를 요구할 때 프랑스 당국은 우리 기관에 통지하였고, 마침내 체포할 때는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집을 수색하고 갈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당국의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