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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쿄전범재판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1.23|조회수162 목록 댓글 1


      

        

도쿄전범재판

도쿄재판 "우리 모두 사형당하더라도 천황을 보호하겠다"

1948년 11월 12일 30개월을 끈 극동국제군사재판 (일명 도쿄전범재판)이 마무리되고 A급 전범 28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을 받다 죽은 2명과 정신이상 진단을 받아 정신병원에 간 1명을 제외한 A급 전범 25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재판은 태평양전쟁 을 일으켜 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불바다로 만든 일본제국주의의 수괴를 단죄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하나였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약 50개의 전범재판이 열려 5,700여 명의 전범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도쿄재판정에는 '평화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A급 전범 28명만이 기소되었다.

도조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한 7명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어 16명이 무기징역, 1명이 금고 20년, 1명이 금고 7년의 선고를 받았다.

교수형 판결을 받은 7명은 한 달이 지난 12월 23일 스가모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의 유골은 훗날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도록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 사형 판결을 면한 다른 전범들은 1950년에서 1956년 사이에 슬금슬금 풀려났다.

1946년 체포돼 7년형을 받고 4년만인 1950년 11월 석방된 #시게마쓰마모루 외상은 다시 일본정부의 외상으로 부임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로 한쪽 다리가 날라간 인물이다. 최근 신격호 롯데 회장 부인의 외삼촌이라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전범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시아인 2,000만 명과 일본인 3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른바 천황이라는 히로히토 이다.

전범으로 처형당하지 않고 장수를 누린다. 히로히토는 살아있는 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본 육해공군의 대원수를 겸임했다. 태평양전쟁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이 인물이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간 것이다.

도쿄전범재판이 범죄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범죄적 공모'에 참가했느냐는 것이다. 그 시기는 1928년 1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는 날 까지이다. 이 시기에 일본의 정계와 군부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주연과 조연으로 이름을 날리다 수없이 교체되었다.

그 기간에 일본제국의 권력 핵심부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자가 바로 히로히토 한 사람뿐이었다. 이런 자가 어떻게 전범재판에서 빠져나왔을까?

맥아더사령부 "일본통치에 꼭 필요하니 히로히토를 처벌하지 말라"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장군을 찾아간 히로히토.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오는 순간이다.자신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한 히로히토는 여러 공작 끝에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를 찾았다.

1945년 9월 27일 오전 10시였다. 이미 히로히토를 전범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천황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맥아더와 그 상황을 읽은 히로히토가 벌인 일종의 '쇼'였다.

3달 후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는 "짐은 신이 아니다"라는 이른바 인간선언을 발표하면서 허리를 더 낮췄다. 여기에 발 맞춰 맥아더도 빠르게 움직였다. 곧바로 미 정부에 보내는 전보에서 천황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보고했다.

"천황을 전범으로 기소할 경우 일본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천황은 일본인 통합의 상징이다. 천황을 망가뜨리면 폭동을 제압하는데 100만 명이 필요할 것이며 그 군대를 무기한 유지해야 할 것이다."

맥아더 는 왜 그랬을까?

쉽게 얘기하면 히로히토가 맥아더의 일본통치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대신, 맥아더는 히로히토의 '권위'를 이용해 #일본통치 를 거저 먹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래도 문제는 산적했다. 전범 1호 히로히토를 건드리지 않으면 연합군 내부나 일제로부터 큰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반발이 거세질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속죄양이 필요했다. 이때 차출된 인물이 바로 총리를 지낸 도조 히데키였다.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 총리를 지낸 도조는 천황 대신 죽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기간의 대부분을 군부대신(1940~41년)과 총리대신(1941~44년)을 지낸 실세였다.

도조에게 1945년 9월 10일 시모무라 사다무 육군대신이 이렇게 설득했다.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이 시작될 경우 당신이 없으면 천황께 누를 끼치게 됩니다."

수많은 장병들을 옥쇄로 몰아넣은 죄책감과 천황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흔들린 도조는 실패한 자살로 문제를 해결했다.

심장에서 약간 비껴간 곳에 권총을 쏴 병원을 거쳐 전범재판장으로 끌려갔다.

천황 측근과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네가 전쟁의 책임자이고, 천황은 아무 죄가 없다"는 진술을 하라고 시달리다 어느 순간 실수를 했다.

변호인의 신문 중 천황의 전쟁 책임을 시사하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로건(변호인): 평화를 바라는 천황의 의사에 반하여 기도(내대신)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무언가 진언을 한 사례가 있었나요?

도조: 그런 사례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민이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일본의 고관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쟁 전반에 걸쳐 천황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표현이다. 기겁한 맥아더의 충실한 참모들은 도조에게 압력을 가해 발언을 취소시켰다. 이렇게 해서 히로히토가 살아남은 것이다.

처형된 전범 7명의 유골이 태평양에 버려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전범 재판에 참여한 한 변호사가 화장장 직원을 매수해 유골 일부를 산속에 있는 불상 밑에 보관한 것이다. 이 유골은 1960년 8월 극우인사들이 아이치현의 산가네산에 조성한 '순국 7사묘'에 안치되었다.

이후 옥사한 7명을 더한 14명의 위패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이들 모두 일본 극우의 성지순례가 되고 있다.

현재 일본에는 아다미 시, 가마고리 시, 나가노 시 등에 이들 처형된 7명의 전범들을 추모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나치 전범 같았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제의 수뇌 7명을 처형하는 대신 천황제를 살린 맥아더사령부는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 판결 당시 스가모 형무소에는 악질 전범 17명이 수용돼 있었다. 사령부는 이들을 모두 불기소 석방하고 앞으로 이같은 재판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때 석방된 기시 노부스케란 인물이 오늘날 아베 정권의 원조이다.

일본의 괴뢰정권 만주국을 주무르다 전범으로 체포된 기시는 1958년 정계에 복귀해 수상 자리에 올랐다.

기시는 3년 동안의 총리 재직기간을 포함한 7년여의 길지 않은 시간에 미국의 뜻대로 전후 일본정치의 방향을 정한 보수합동 체제(55년 체제)를 만들었다. 기시 수상 밑에서 일본 전범들이 모두 역사의 무대로 복귀했다.

기시의 외손자가 바로 현재 일본의 통치자인 아베 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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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토마토통통 | 작성시간 20.11.23 맥아더 진짜 나쁜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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