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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면암 최익현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1.27|조회수122 목록 댓글 1

 

최익현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은 자기 자신이나 어떤 사상, 철학, 종교등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해 앞 뒤가 꽉 막힌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에 대들보는 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 대해 비판은 아주 잘하죠. 그러나 그 비판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본인들에게 해 주어야 할 내용이 대부분 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소신이 너무 강하다 보면 남을 비판하기 바뻐서 자기 자신의 잘못된 점을 돌아다 볼 여유조차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죠.^^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도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 구한말의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요즈음 와서는 촛불과 태극기의 대립 등등 아주 많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물, 최익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최익현은 우리 역사 속에서는 아주 긍정적인 인물입니다.하지만 역사 속에 인물들은 절대선인도 절대악인도 없습니다.그리고 모든 역사 속의 사건은 빛과 그늘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최익현이란 인물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단일시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한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 시대 외세흐름이 구한말 때와 비슷하다고도 한다.
다시는 구한말과 같은 국가적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구한말의 역사를 철저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오백년이 넘는 긴 역사에 비해 구한말은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구한말은 외세들까지 합류한 복잡한 상황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구한말은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에 비해서는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역사 책 삼분의 일을 장식할 정도로 역사에 기록 될 사건, 사고들도 아주 많았다.

또 구한말에는 그 사건, 사고 만큼이나 기록 될 인물들도 많았다. 또한 구한말 인물들에 대해서는 보는 시각은 현재 각자 서있는 위치에 따라 극과극을 오간다.

구한말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그래서 그 인물들의 가문이나 후손들이 현재에도 사회유력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 인물들에 대해 조금만 잘못 말했다가는 큰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여간 조심스럽다.

그래도 역사는 역사이니 조심스럽게나마 당시 상황과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구한말의 우리 지배층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일족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을 추구했던 왕당파, 김옥균의 급진개혁파, 흥선대원군의 수구파 내지 최익현의 위정척사파로 나눌 수 있다.

왕당파는 온건 개화형식을 추구했지만 사실은 개화파도 수구파도 아닌 단지 상황에 따라 어디에라도 빌붙을 수 있는 권력유지와 개인착복에만 눈이 멀어 있었다.

김옥균,박영효등 급진개화파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제 1세대 개화파 오경석, 유대치등의 영향을 받아 조선을 일본의 개화를 본받아 급진적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본의 전략에 놀아나고 말았다.

또 한 부류인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하는 수구파는 대원군의 복위를 끊임 없이 노리고 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위정척사파는 외세를 배격하지는 점에서는 수구파와 같았으나 당시 조선실정에 대한 생각이 흥선대원군의 수구파와는 달랐다.

이 들은 각 자의 논리로 그들의 입장에서만 당시 조선을 보고 조선의 상황을 풀어나가려 했다.

오늘 날 이 들에 대한 평가는 각자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다양하지만 오늘은 우선적으로 위정척사파의 대표 격인 면암 최익현을 예로 들어 보고자 한다.

우리 대부분은 면암 최익현을 강직하고 꼿꼿한 기질을 지닌 강인한 선비로 인식하고 있다.

또 최익현은 조정관리로서 그는 어떤 난관에 있을지라도 왕에게도 직언을 망설이지 않았다.

최익현은 조선 후기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를 비판하는가 하면, 1868년 무리하게 경복궁을 재건한 당시 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수작에 놀아 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873년 서원철폐를 반대한다는 최익현 상소의 시작으로 흥선대원군이 물러 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 측이 개항을 하자 최익현은 개항에 가장 극렬한 반대파가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최익현은 조약이 체결되는 데에 일조한 을사오적(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했다.

또한 을사늑약에 대해서는 임금이 직접 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선언하고, 각국의 공관들이 철수하기 전에 무효 성명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익현은 상소나 성명 발표만으로는 뜻을 이룰 수 없다고 보고 당시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였지만,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모집한다.

최익현은 의병활동을 할 때 의병장으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의병장으로 있을 때 자신들을 진압하러 온 군대가 조선군대인 것을 보고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외세와 싸우기 위함이지 같은 민족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면서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관군에게 잡혀주었다.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에서도 일본이 주는 식사를 거부하고 조선쪽만 바라보며 굷어 죽었다.

최익현은 우리역사상 보기드문 의기있고 강단 있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익현이 당시 썼다는 상소문들 중 일부의 전문을 읽어 보면 지금 우리가 받아 들이기에는 조금 그렇다. 그 당시 선비들이 대부분 그랬다지만 지금의 관점으로서 도저히 이해해주기 힘든 최익현 사상을 판단 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최익현이 썼다는 상소문 일부를 살펴 보자!


"이에 신이 생각건대,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에 대해 논한다면, 만동묘(萬東廟, 송시열이 제안해 중국 황제 제사를 지내는 곳)를 복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며, 이른바 황묘를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명나라에 대하여 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왔고, 임진년(1592)에는 재조(再造)해 주었으니 만대를 두고 잊지 못할 은혜가 있으니, 만대를 두고 반드시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또한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황은(명나라 황제)의 혜택이 깃들어 있으니, 집집마다 시동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들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대 임금의 거룩한 뜻이, 어찌 그저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기만 하고 그것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의리에서만 나온 것이겠습니까?"

이 처럼 최익현은 중국을 황제나라, 아버지의 나라로 조선은 그 신하, 자식의 나라로 여기는 뼈속까지 깊은
소중화주의자였으며 사대주의자 였다.

최익현이 어렸을 때 부터 성리학의 중화질서만 배워왔고 그 속에 빠져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최익현의 이런 사고에서는 우리 민족만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생각이 나올 수 없다.

최익현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 조선성리학 사대부들의 한계였다. 동학혁명 편에서도 나오지만 농민혁명에 선봉에선 현재도 민중의 지도자라고 일 컷는 전봉준도 이와 비슷한 한계를 보인다.

사실 냉철하게 최익현 상소문 내용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최익현이 일본을 그토록 싫어하고 외세를 배격한 위정척사의 목표는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대한 예의와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최익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해 준 것을 만대를 거쳐서 갚아야 할 은혜라고 봤다.

명나라가 조선을 원병을 보낸 것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중국의 대외전략 차원이었다. 또 일본이 조선을 침범할 때 '정명가도'( 명을 정벌하기 위한 것이니 조선은 길을 내주라)를 부르짖었기에 조선에 원병을 보낸 것 뿐이었다.

사실, 역사상 우리나라를 가장 많이 침략한 나라가 중국 이었다는 것을 완전 도외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 최익현의 상소에는 조선의 현실을 어느 정도는 인지 하고는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저들이 대포를 겨누며 화친을 하자고 하니 이건 믿을 수 없는 화친이다.

-저들이 파는 건 사치품이지만 우리가 파는 건 생필품이니 민생에 해를 끼칠 것이다.

-저들은 말이 왜인이지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다.

-저들이 우리나라에 올라오면 재물과 부녀자를 취할 것이다.

-저들은 재물과 부녀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를 모르니 화친은 말이 되지 않는다.

윗 내용은 최익현의 개항오불가론(병자척화소)이다. 이것은 당시 위정척사파의 입장을 가장 잘 정리한 상소이다. 또한 일제의 야욕을 정확히 파악한 내용이기도 하다.

최익현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러나 최익현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성리학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폐단이 있던 중국의 망해버린 나라의 황제나 모시는 서원을 철폐하자는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했던 점에서, 또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후 만동묘등을 복원하고 서원을 다시 되살렸던 최익현이나 위정척사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생각에서 외세를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최익현의 예는 적극적인 매국이나 기회주의 뿐 아니라 꽉 막힌 애국적인 태도 역시 나라와 민족에는 해악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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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푸른항해 | 작성시간 20.11.27 알찬내용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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