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고리로 찍고 말굽으로 짓밟고…
日총리 "세계가 모르게" 비밀 전보
입력 : 2019.03.04 03:00
[3·1운동 막전막후] [6] 외국 선교사들도 경악한 일제의 만세시위 탄압
평화적 시위 민중에 무차별 진압… 외국 선교사들 생생한 기록·증언
1919년 3·1 운동 첫날인 1일 오후 평양경찰서 앞에서 만세 시위를 하던 군중을 향해 소방대가 호수로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소방용 장대 끝에 달린 갈고리로 시위대를 내려찍기도 했다. 현장을 목격한 로버츠(Roberts) 평양신학교 교수는 "소방대의 갈고리가 그의 두개골을 관통해 반신불수가 됐다"고 보고했다. 다른 선교사도 "시위대에 갈고리로 무장한 소방대원이 공격해 부상자가 많이 생겼다"고 기록했다.
같은 날 저녁 평양 시위에서는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까지 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여선교사는 충격을 받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토요일(3월 1일) 저녁 군중은 다시 나가 (만세) 행진을 하였는데 군인들이 총을 쏴 3명이 맞았습니다. 비무장 평화적 군중에게 총을 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이는 단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다른 선교사도 "(3월 1일 평양 시위에서) 총에 맞아 부상당한 사람이 5명이나 병원에서 숨졌다. 당국의 명령으로 사인(死因)을 총상이라고 보고할 수 없었다"고 썼다.
3월 1일 평북 선천에서도 '(시위 시작) 1시간 반쯤 경과했을 때 일본군 선천수비대가 기마경찰과 함께 긴급출동해 시위 대열을 저지하며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신성(信聖) 학생들은 일본군에 저항했고, 일본군은 즉각 비폭력 군중에게 발포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시위를 하는 민중을 헌병과 경찰, 소방대까지 동원해 무차별 탄압했다.
하라 다카시 일본 총리는 3·1 운동 발발 열흘째인 1919년 3월 11일 하세가와 조선 총독에게 비밀 전보를 보냈다. '이번 소요 사건은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해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할 때 외국인이 주목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밀리에 무력 탄압을 지시하는 기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일제의 학살·파괴·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본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지휘하는 11명의 일본군과 일본인 순사 1명, 조선인 순사보 1명이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총을 쏜 뒤 불을 질러 23명을 죽였다. 이어 이웃 마을인 고주리에 가서 6명을 총살, 민간인 29명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제암리 학살은 선교사들이 학살 소식을 듣고 서울 주재 미국영사관에 요구해 커티스(Curtice) 영사가 현장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사건 다음 날인 16일 커티스 영사는 미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 AP통신원 테일러와 함께 현장을 돌아보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민 면담 보고서와 함께 보고하면서 미국 국무부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은 국제 여론까지 무시했다.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사령관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가 여론이 잦아들자 1919년 8월 군법회의에서 아리타 중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학살 행위는 인정하면서도 임무 수행에 필요한 수단이었고 범죄 의식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3·1 운동이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 시위가 아니었으면 일제 탄압과 만행을 정당화시키고 선교사들은 물론 세계 여론
공동기획: 한국민족운동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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