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독립선언서 인쇄 중 형사 들이닥치자, 거금 5000원으로 입막았다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2.13|조회수84 목록 댓글 0

 

 

독립선언서 인쇄 중 형사 들이닥치자,

거금 5000원으로 입막았다

  •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 입력 : 2019.02.26 03:08 | 수정 2019.02.26 03:09


    [3·1운동 100년 /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막전막후]'묵암 비망록'으로 본 독립선언서 비밀 인쇄작전

    '준비 상태는 물론 만점이다. 내일만은 실수 없이 신명을 바쳐 거사에 성공해야 한다. 꿈을 잘 꾸자.'

    1919년 2월 28일 묵암(默菴) 이종일(李鍾一·1858~1925)은 이렇게 일기('묵암 비망록')에 적었다. 자신이 사장인 보성사에서 인쇄를 마친 독립선언서를 손에 든 묵암은 그 감회를 '꿈을 잘 꾸자'란 문장에 압축했다.

    서울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 서 있는 이종일 선생 동상.
    서울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 서 있는 이종일 선생 동상. 독립선언서 인쇄의 총책임자이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종일 선생은 '묵암 비망록'을 통해 3·1운동 전후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고운호 기자


    1898년 순한글 '제국신문'을 창간한 그는 1910년까지 사장 겸 기자로서 개화와 계몽운동에 앞장선 언론인이자 교육자였다. 30평 푸른 벽돌 2층 건물의 보성사는 독립운동의 요람이었고, 직원 60명은 동지였다. 3·1운동 당시 핵심은 천도교였다. 천도교는 당시 전국에 300만명의 신자가 있었다. 현금 동원력도 막강했다. 이 조직과 자금력은 3·1운동의 바탕이 됐다. 보성사도 천도교가 운영하고 있었다.

    '묵암 비망록'은 독립선언서 인쇄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오늘부터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하기 시작하다. 좁은 인쇄소에서 문을 굳게 닫고 찍기 시작했다.'(2월 20일) '2만5000매를 1차로 인쇄 완료하여 천도교 본부로 운반하다.'(2월 25일) '1차로 인쇄된 것을 각계 동지들 7~8명에게 2000~3000매씩 배포했다. 이갑성에게 2500매가 전달됐다.'(2월 26일) '오늘까지 2차로 1만매를 더 인쇄하여 천도교당으로 가지고 가다가 파출소 경찰에 검문당했으나 족보라고 속이고 겨우 운반했다.'(2월 27일)


    현재 조계사 자리에 있던 보성학교 전경. 사진 오른쪽 회화나무 뒤 건물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로 추정된다. 보성사 건물은 3·1운동 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됐다. /천도교


    '묵암 비망록'과 '의암 손병희 선생 전기' '남강 이승훈 전기' 그리고 민족 대표 33인에 대한 일경(日警)의 취조서엔 3·1운동 전야(前夜)의 풍경이 생생하다. 스스로 "나는 과격한 사람"이라고 밝힌 묵암은 수시로 손병희를 찾아가 '결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번번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답만 들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당시 지식인들이 국제 정세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것(민족자결주의)은 패전국에 속해 있는 약소국의 자국 영토 처리권이라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일본이 패전해야만 우리의 독립이 올 것 아니겠는가.'(1918년 1월 27일) 1918년 2월에 접어들자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등이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 묵암은 다급해졌다. 1918년 1월 '천도교 단독이 아닌 다른 종교인 연합'이란 아이디어를 꺼낸 손병희는 그해 5월 마침내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독립운동의 3원칙을 정했다. 1918년 9월 9일을 거사일로 잡기도 했다. 계획이 무산된 것은 명망가들이 머뭇거렸기 때문. 묵암은 '나도 이젠 기진맥진이다'(1918년 12월 15일)라고 썼다.

    이듬해 1월 고종 승하 소식이 전해졌다. 동경 유학생들의 2·8선언도 터져 나왔다. 지도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손병희는 '속히 결단하지 못해 민망하다'(1919년 2월 15일, '묵암 비망록')고 했다. 개신교와의 접촉이 시작됐다. 오산학교 교장 남강 이승훈 장로가 접촉 창구였다. 2월 10일쯤 연락을 받은 그는 즉시 상경해 거사 계획을 들었다. 의기투합한 남강은 초인적으로 뛰었다. 선천으로 달려가 양순백·김병조·유여대·이명룡 등을 만나 동의를 얻고 바로 평양으로 이동, 복통(腹痛)을 핑계로 입원해 병실을 거점 삼아 손정도·길선주·신홍식 등 동지를 모으고 16일 밤 기차로 상경한다. 서울에서도 남강 이승훈은 이갑성·박희도·오기선·함태영·오화영·현순·이세환 등을 잇따라 접촉했다.

    공군 특수비행팀인 '블랙이글스'가 25일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광장 상공에서 사전 연습 비행을 하고 있다.
    광화문 하늘에 그린 태극기 - 공군 특수비행팀인 '블랙이글스'가 25일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광장 상공에서 사전 연습 비행을 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운동 자금을 모금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손병희는 최린을 통해 10원권 200장, 5원권 600장 합계 5000원을 개신교계에 지원했다. 보름 남짓 만에 개신교 측 민족 대표 16명이 모였다. 최린이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을 끌어들였다.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 등 민족 대표 33인이 정해졌다. 2월 28일 밤 서울 가회동 손병희 집에 모인 민족 대표들은 초면인 경우도 많았다. 통신·교통이 미비하던 시절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인적 네트워크가 이뤄낸 쾌거였다.

    가슴을 쓸어내린 일도 있었다. 26일 저녁 한창 독립선언서 인쇄가 진행되던 중 순찰하던 조선인 형사 신승희가 들이닥친 것. 묵암은 손병희에게 달려가 5000원을 받아 형사에게 줬다. 당시 자신이 받던 순사보 월급 40여원의 125배에 달하는 거금을 받은 조선인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학계에서는 33인에 대한 취조 기록 등을 근거로 독립선언서 인쇄 날짜를 2월 27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천도교 측은 '묵암 비망록'과 2월 26일 개성에서 독립선언서 인쇄본을 수령했다는 증언 등을 토대로 2월 20일부터 두 차례에 걸쳐 약 3만5000장을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묵암은 3·1운동 민족 대표로 참가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6개월 감옥에 있었다. 가출옥 후 1922년 제2의 3·1운동을 추진하다 발각됐고, 1925년 사실상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자료 더보기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