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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심 뒷골목·허름한 건물, 애국자들의 본거지가 있다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2.14|조회수143 목록 댓글 0

 

 

[특별한 흔적들]

도심 뒷골목·허름한 건물, 애국자들의 본거지가 있다

상하이 도심의 뒷골목, 낡고 허름한 건물 사이로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을 본 사람들은 그 초라하고 왜소함에 놀란다.
이곳에 일본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며 나라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있었다.


  • 구성 및 제작 =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 입력 : 2017.08.14 08:51



    "국내에는 한 조각의 땅도 확보할 곳이 없고, 국외로 말하자면, 중국의 동삼성(東三省)과 노령 시베리아가 우리 한인 교포들이 가장 번성한 지역이지만 현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안전지대가 되지 못하며, 또 미국령의 각지는 본국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역시 적합한 위치가 아니다. 오직 중국의 상해는 동양의 교통요지로서, 비록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른 지역보다는 나은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은 1920년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상하이에는 외국이 관할하는 조계(租界)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 간섭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임시정부, 왜 상하이에 세웠을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전국서 모인 사람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즈음, 상해에는 국내외 여러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상해에는 300명이 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나라를 잃기 전 고국을 떠난 이들과 3·1운동의 함성을 들으며 망명을 선택한 이들이 섞여 있었다. 장년층부터 스물이 안 된 앳된 청년까지 연령층도 다양했고, 출신지는 서북(평안도·함경도)과 기호(경기도·충청도) 출신이 많았지만 전국에 걸쳤다. 명문 양반과 평민이 뜻을 같이한 동지가 되어 함께 어울렸다. 신분과 지역, 연령, 종교의 차이가 문제 되지 않았다. 망국(亡國)의 비애를 겪으며 독립이란 목표를 함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래픽= 이은경

    초기 임시정부를 주도한 지도자는 안창호·이승만·이동휘였다. 안창호는 연통제를 시행하고 특파원을 국내에 파견하는 등 국내 선전 활동과 자금모집을 주도했다. 그가 미주에서 가져온 자금은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는 바탕이 됐다. 통합 임시정부를 출범시키며 서북파의 중심이던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을 맡았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대미외교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기호파 명망가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전보와 편지로 정부를 운영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부터 6개월간 상해에 머물렀지만, 임시정부의 단합을 이루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왼쪽)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오른쪽)3·1운동 후 상해·연해주·한성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통합된 직후인 1919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안창호, 둘째 줄 오른쪽 끝이 김구. /국가기록원·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동휘는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개편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1921년 1월 국무총리를 사임했다. 임시정부 안에 사회주의 동조자를 확보하려고 한 이동휘와 이승만은 크게 대립했다. 이동휘의 참여로 임시정부는 좌우세력이 공존하는 정부로 출발할 수 있었으나, 그의 이탈 이후 194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좌우합작이 가능했다.

    이승만·이동휘·안창호의 세 지도자가 끌던 임시정부는 1921년까지 유지됐다. 이동휘와 안창호가 사임한 뒤에도 여전히 미국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이승만은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대통령에서 면직됐다. 이렇게 초기 세 지도자는 퇴장했지만, 임시정부는 건재했다.


    초기 이승만·이동휘·안창호 3각 체제로

    임시정부의 대표 주역들



    1920년대 중반 이후 임시정부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김구는 이때 경무국장이었다. 그는 내무총장에 취임한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원했다가 일본이나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경무국장을 맡았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이 궂은 역할을 5년이나 맡았다. 신채호는 임시의정원의 전원위원장으로 참여했지만, 위임통치 청원안을 제출한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다.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도 독립신문 사장으로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그래픽= 이은경

    독립운동 노선 차이와 이념 갈등도…
    임시정부는 점차 외교론과 무장투쟁론 같은 독립운동 노선 차이에 따른 대립과, 출신 지역이나 이념에 따른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외교활동이나 만주지역의 무장세력을 통괄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자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이 늘어났다.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개혁과 독립운동의 방침을 통일하자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제기되었는데, 안창호도 이에 호응하여 1921년 5월 임시정부를 사임했다.

    이후, 일본의 계속된 감시와 탄압으로 독립투사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난징(南京),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충칭(重慶) 등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청사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노선이나 지역·이념의 차이에 따른 대립과 다툼은 남아 있었으나, 이동녕·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정을 지킨 지도자들의 독립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임시정부를 27년 동안 지켜낼 수 있었다.


    조선에서 대한으로, 제국에서 민국으로
    통합 임시정부를 위한 갈등과 타협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일대는 상하이 구(舊)도심의 중심 지역으로, 루완구가 2003년부터 재개발 계획을 세웠고 지금은 명품 거리로 탈바꿈했다. 이 일대는 전체 면적이 6만6000㎡ 전후로 상하이 시내 대표적인 젊은이의 거리로 통하는 '신천지(新天地)'가 인접해 있다.

    2015년 재개관된 청사, 中정부가 비용 전액 부담
    1993·2001년 두 차례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는 지난 2013년 6월 한·중 정상회담 당시 우리 측이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 유적지 보존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새 단장에 들어가 2015년 9월 4일 재개관했다. 황푸(黃浦)구 마당(馬當)로 306농(弄)에 위치한 3층짜리 벽돌 연립주택의 길게 이어진 12호 중 4호가 1925년부터 1932년까지 7년간 청사로 사용됐는데, 현재는 4호뿐 아니라 3호와 5호가 전시 공간으로 추가로 사용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 (위 왼쪽, 오른쪽)청사 1층 회의실 모습. 안쪽에는 '한국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 협회'가 기증한 김구 선생의 동상이 전시돼 있다. (아래 왼쪽)청사 1층에 위치한 부엌과 식탁의 모습. (아래 오른쪽)청사 3층에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오종찬 기자

    청사는 5호 건물 3층에 '중국의 지원' 코너를 신설하는 등 중국과의 연대(連帶)를 강조했다.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 간 공문뿐 아니라, 공산당과의 공조를 강조한 자료도 이번에 발굴·전시됐다. 중국 '신화일보'에 실린 김구 선생의 '중국 항전과 한국 독립'이라는 글이다. "임시정부는 중국 당·정·군으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고 있다. 한·중 두 민족이 긴밀히 합작하면 일제 도둑(日寇)을 타도하고 중국 항전 승리와 한국 독립을 관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재개관 비용 약 7억 원을 전액 부담했다.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명의로 된 '임시정부 외교 활동을 알리는 성명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사진, 러시아 기자가 촬영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 영상도 처음 전시됐다. 국무위원회 회의실로 쓰였던 4호 건물 1층에는 김구 선생의 흉상이 들어섰다. 3호 건물 영상실에 있던 것을 태극기와 함께 재배치한 것이다.


    中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주변 세계적 명품 거리로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4월13일 아닌 4월11일"
    臨政 재개관 비용 부담한 中… '中의 지원' 코너 신설한 한국



    3·1 운동


    /화성시 공식 블로그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들이 거리로 나와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날 오후 2시, 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 모여 만세 삼창을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인근의 탑골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비폭력 평화 시위를 이어갔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5월 말까지 전국 218개 군(郡)에서 200만 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번졌다. 지식인·청년·학생·종교인은 물론, 농민·노동자·상인 등 계층을 뛰어넘어 민족 전체가 참가한 운동이었다. 참가자들이 많은 만큼 시위 양상도 다양했다.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이 치른 대가는 컸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그해 5월 말까지 3개월간 집회가 1542회, 참가자가 202만3098명,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이고 4만6948명이 체포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런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상여시위·산상(山上)횃불시위… 걸인·기생도 나서

    독립신문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호(1919.8.2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나라 안팎의 독립투쟁 상황을 보도하는 한편, 사설이나 논설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독립신문은 사장 겸 주필 이광수, 출판부장 주요한, 기자 조동호 등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창간 직후 주 2~3회 발간됐으나 자금난 등으로 1925년 제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제호도 창간 당시 '독립(獨立)'에서 1919년 10월 25일부터는 '독립신문'으로, 1924년 1월 1일자 제169호부터는 다시 ‘독립’으로 변경됐다.


    임정 기관지 '독립' 창간호 첫 공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영인본 발간

    독립운동 단체들



    (왼) 김좌진과 북로 군정서군. (오)한국광복군. /우리역사넷, 국가 보훈처 공식 블로그 '훈터'

    임시정부의 초기 무장 독립투쟁은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측면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김구가 1931년 10월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잇단 의거로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됐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임정의 군사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미국 멕시코 등 해외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지원했다.


    잊지 말아요… 3·1 운동 전후 '독립운동' 단체들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


    광복을 맞이하자 1945년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三均主義)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되어 광복 한국의 기초이념이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라고 하여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가 한국 독립의 모태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명시했다.



    대한민국헌법 전문 일부



    그동안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다. 특히 1969년에 개봉된 영화 '상해 임시정부'는 일제 강점기의 상해를 그리고 있다. 김구 선생의 일대기와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등의 독립투사들의 활동과 일본에 대한 독립 투쟁을 그린 영화다. 이 밖에도 '아나키스트(2000)', '암살(2015년)', '밀정(2016년)' 등 최근에도 상해를 배경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개봉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각 영화 스틸컷

    우리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깃든 곳, 서대문형무소
    일본의 학살로 참혹했던 그 곳, 제암리
    "배가 고파요"… 눈물과 한(恨) 서린 작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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