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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추적 –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에 무슨 일이 있었나 / KBS 20090131 방송

작성자天地人|작성시간21.06.05|조회수113 목록 댓글 2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에 의해 잔인하게 도륙된 양민들의 학살 현장 발굴

영상 자료출처 : https://youtu.be/QuMUG0yXiQY

 

 

[KBS역사저널 그날] - 2009년 1월 31일 방영

 

아래턱이 창에 의해 날카롭게 잘려나간 남자의 유골. 앉혀진 채로 위에서 칼로 세 차례나 살해를 당한 20대 여자의 유골. 조총이 뒤에서 뚫고 나간 흔적이 있는 5세 미만 유아의 부서진 두개골. 부산의 한 지하철 공사장에서 발굴된 유골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400년 만에 나타난 유골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동래성의 충격적 발굴현장

2005년 6월, 부산지하철 3호선 수안동 역. 이곳은 과거 동래성 자리이다. 예리하게 잘려나간 두개골과 구멍 난 유골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차에 걸쳐 이뤄진 발굴에 따라 최하 81개체에서 최대 114개체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함께 발견된 수많은 화살촉과 칼. 창날, 깍지, 찰갑, 투모들과 목익이 발견된다. 해자에 설치되는 나무 막대기인 목익이 수천 개가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동래읍성의 해자는 놀랍게도 목익과 함께 도심의 ‘지하’에 존재하고 있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해자가 유골들의 무덤이 되고만 것이다. 대체 이 유물과 유골들은 어느 시대, 누구의 것일까?

 

- 유골 분석

동아대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교수의 도움을 받아 유골을 심층 분석해 보기로 했다. 분석 결과 동래성에서 출토된 유골은 최소 남자 59개체, 여자 21개체, 유아 1개체이다. 치아 상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치아분석 결과 이들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판명됐다. 또 신장 체크를 해보면 당시 일본 에도인 들과 비교해볼 때 큰 편이었다. 두개골 분석 결과, 일본인의 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의 연령대별 분포는 어떨까? 분석 결과 20대에서 40대까지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구멍 뚫린 유골의 경우 5세 미만 유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 동래성엔 무슨 일이 있었나?

백년 간의 내전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최정예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앞에서 조선민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성안에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최대 5천여 명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했다. 당시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 상황을 기록한 동래부 순절도.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커다란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동래 부민들의 민족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동래성 순절도의 지붕 위에서 왜군을 향해 기와를 던지는 두 명의 부녀자를 볼 수 있다.

 

- 유골이 말해주는 것들

유골의 두개골에서는 날카로운 상흔들과 구멍이 발견됐다. 아래턱이 잘려나간 남자의 유골은 정면에서 칼을 맞고 고개를 돌린 상황에서 2차 가격을 당하고 다시 후두부에서 공격당해 살해당한 남자의 유골로 판명된다. 손상된 유골은 그가 살해당한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0대 젊은 여성의 유골. 주저앉혀진 상태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가해자에 의해 세 차례나 두개골이 칼로 찔린 후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5세 어린이의 유골. 유아 두개골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총알이 뒤쪽에서 뚫고서 나간 흔적을 보인다. 갑옷을 관통할 정도의 위력이 있는 조총탄이 유아의 머리를 관통한 것이다. 대부분의 유골들은 전투 이후에 처형,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

 

- 임진왜란은 조선인 말살 전쟁이었나?

1597년 정유재란 이후에도 조선 군민에 대한 학살은 계속되었다. 전사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아있는 조선인의 코를 베기도 했다. 또 다른 기록인 영산방문. 반항하거나 피하면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왜 이들은 이토록 처절하게 조선인을 말살하려고 했을까? 동래성 전투 후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들의 시신과 일상용품까지 모조리 다 해자에 버렸다.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14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시로 남겼다.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의 詩 동래맹하유감 中

...온 고을 사람 한꺼번에 성 안에서 피로 물들고...모두 죽어서 곡할 자 없는 이 그 얼마인지 모른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인 말살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 유골들이 400여년 만에 세상으로 나와 우리에게 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역사추적 9회 –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에 무슨 일이 있었나 (2009.1.31.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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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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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시리메테우스 | 작성시간 21.06.05 우짜겠습니까
    침략자 욕하지 맙시다
    못막은 병신들이 문제지요
    이미 다 알고있는 사실
    정쟁으로 모르쇠하는 기득권 인간들
    욕해야지요
  • 작성자天地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6.06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임진왜란으로 도륙되고도 또 다시 당해서 일제치하를 겪고 결국은 나라를 빼앗겼었지요.
    저렇게 왜구들에게 도륙당했던 동래에서 친일세력을 수장으로 앉혔으니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지금도 왜구들의 관종병은 우리나라를 향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왜구들은 그들의 선조들로 부터 물려받은 DNA가 이 나라를 빼앗고 싶은 열망이 심어져 있기에 그런게지요.
    내부의 적이 나라를 팔아먹었던 조선말기를 결코 잊어선 안되며, 또한 임진왜란, 또 더 멀리는 수도 없이 왜구 해적들이 동래와 한반도 남부에 침입하여 노략질과 살상을 일삼아 왔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사과없이 음흉하고 철면피한 외교를 하는 한 왈본은 결코 우리의 아군이 될 수는 없음을 직시하고 또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보수가 아닌 자들이 보수행세를 하며 젊은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을 펼치는에 총력을 다 하고 있는 친일매국 무리들이 이 사회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있으니 정말 소름끼칩니다.
    언제 또 다시 역사가 되풀이 되지는 않을런지 걱정이 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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