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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GHQ, 진주군을 위한 위안명령(慰安命令) 2011-10-23 浮世風呂

작성자neowave|작성시간22.03.29|조회수17 목록 댓글 0

GHQ, 진주군을 위한 위안명령(慰安命令)

2011-10-23  浮世風呂 https://cafe.daum.net/flyingdaese/SdB9/1348

 

 

 

GHQ、進駐軍の為の慰安命令
2011-10-23



                                   GHQ, 진주군을 위한 위안명령(慰安命令)


                                                     2011-10-23  浮世風呂  번역  오마니나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정지발령으로부터 3일후인 1945년 8월 18일, 내무성이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을 각 현에 발령하고, 이것을 단서로, 점령군대책의 일환으로 26일에 설립되었다.

전후 진주군의 일본점령에 있어, 일본 부녀자의 정조가 진주군병사들에 의해 더럽혀질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성의 방파제를 만들어 일반 부녀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생각에서다. 점령군이 이런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명령했다는 속설이 일부 있지만, 내무부가 헤아려 자주적으로 만든 것을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가 허가한 것이다.

기본적인 발상으로 전시 중의 위안부시설과 같은 것이지만, 위안부처럼 중개업소를 통하지 않고, "일본여성의 방파제를 만들자"라는 슬로건 공모에 응해 온 일반여성들이 모였다.전시중에 있던 여자청년단이 종전 후, 반강제적으로 모은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또 경찰이 전시중에 비합법성매매(青線売春)로 검거한 자에게 위안부가 될 것을 요청한 사례까지 있었다.

당초는 접객업자를 고용할 예정이었지만 뜻대로 모이지 않아, "신일본 여성 구함, 숙소, 의복, 식료 모두 지급"등의 감언으로 긴자 등에 광고판을 설치하고, 또 신문광고로 일반여성을 모집했다.


자세한 내용은 광고에 나와 있지 않아, 이것을 보고 온 여성의 상당수는 접객업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대부분은 일의 내용을 듣고 떠났다. 그러나 그외 생활의 길이 막막한 전쟁미망인과 자녀들이 많았던 시대적 배경때문에, 첫번째의 모집에서는 단기간에 1,300여명의 여성이 협회에 등록했다.도쿄 시내에만도 30개소 이상, 전국에서 최번성기에는 7만명의 여성이 종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946년 1월 21일, 전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의 반대, 성병의 만연을 이유로 GHQ에 의해 특수위안시설이 폐지되었지만, 여성들에 대한 보상은 없었으며, 대부분은 당시 팡팡이라 불렸던 거리매춘부, 접객업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들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보상은 현재까지 일절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하루에 수십 명의 손님을 받는 등 가혹한 노동이었지만, 수입이 좋아, 오모리 해안의 오마치엔(小町園)위안소에서는, 당시의 금액으로 5만엔에 달하는 벌이를 하는 매춘부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위안소의 개설 후에도, 진주군의 불법행위는 숱하게 발생했다.최초에 미군이 요코스카에 상륙한 1945년 8월 30일에 벌써 강간사건이 발생했다. 특별고등경찰은 이러한 불법행위를 해산명령이 내려진 1945년 10월 4일까지 조사를 계속해, 내무성 경보국 외사과에서 "진주군의 불법행위"로 문서화되었다.이 미군에게 불명예스러운 문서는 일단 몰수되었지만, 1973년 12월에 일본으로 반환, 이듬해 1월부터 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위키백과에서)


 또한 RAA 이외에도, 미군을 위한 클럽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1945년 10월에 안도 아키라(安藤明)에 의해 만들어진 "다이안 클럽"이 있다. 여기에서는 미국측과의 공식협상으로 이어지는 민간외교의 역할이 기대되었다. 또한 연립주택인 하토 거리나 불에 탄 빌딩인 요시하라와 달리, 큰 댄스홀을 갖고 있어, 재즈를 좋아하는 미군에게 쾌적한 만족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곳은, 고이와 인터내셔널 팰리스(후의 도쿄팰리스)였으며, 여기에도 기숙사의 식당을 개조한 댄스홀이 설치되었다.

루스벨트 여사의 말 한마디에 폐지된 위안소지만, 그곳에서 내팽개쳐진 여성들에게 갈 곳은 없었다."위안소" 폐쇄 이후에도 점령군용 오락시설 운영주체로, 1949년까지는 존속했다.

경찰의 손으로 만든 위안시설에 위안부들이다.결국 경찰도 묵인하는 적선지대로 남기는 방법 밖에 없었다.


 항간에서는,"미군이 점령하의 일본에서 미군전용 매춘시설을 만들게 해 대대적으로 활용한 것 등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 속설도 유통되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의 역사적 사실관계는, 일본정부가 주체적으로 "미군전용 매춘시설을 만들게"한 것이며, 그 "미군전용매춘시설"을 폐쇄시킨 것은 점령군 당국측 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전시중의 위안부문제가, 군의 강제가 있었다는 증거도, 사실도 나오지 않았지만, 일본의 관여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 원인이 되고 있다.


「星の流れに」

「星の流れに身を占って
何処をねぐらの今日の宿
荒(すさ)む心でいるのじゃないが
泣けて涙も涸れ果てた
こんな女に誰がした」

「煙草ふかして 口笛吹いて      

 当もない夜のさすらいに   人は見返るわが身は細る
 

 街の灯影の侘びしさよ こんな女に 誰がした」

 

「飢えて今頃妹はどこに
 一目逢いたいお母さん
 唇紅(ルージュ)哀しや 唇かめば
 闇の夜風も泣いて吹く
 こんな女に誰がした」


 전쟁 전부터 경찰에서는, 유곽 등 유흥업소가 허용된 지역을, 지도에 빨간선으로 둘러 표시했으며, 이것이 적선(赤線)의 어원이라고 한다. 종전 후의 카스토리 잡지 등에서는 "특음가(特飲街:특수음식점거리)의 약자"라는 표현이 사용되었 으며, "적선"이라는 단어가 일반화된 것은, 구역외로의 진출이나 인신매매 사건 등이 큰 문제가 된 1950년대 이후이다.

 매춘방지법(1956년 제정)의 완전시행을 앞두고, 1958년 3월까지 적선 내의 카페 등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업소는, 바나 스낵, 요정 등 음식점으로 전향하는 자, 여관・러브호텔・아파트・하숙집을 운영하는 자, 은밀하게 유흥영업을 계속하는 사자 등으로 다양했다.

그 가운데는 간판은 요정이지만, 영업내용은 1958년 이전과 변함이 없는 것이 현재도 있다. 표면적으로 요정으로 전향함으로써, 요정내에서의 손님과 나카이(仲居:손님을 응대하는 하녀)와의 자유연애라는 탈법행위로서 매춘방지법을 피해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오사카의 토비타신치(飛田新地), 시노타야마 신치(信太山新地), 마쓰시마신치(松島新地)다. 오사카에는 조례로 소프란도라는 것이 없다.

 

                                                                      토비타신치(飛田新地)

 

                                      타이요시햐쿠방(鯛よし百番:이곳은 순전한 요정으로, 관광명소가 됨)

                                                              시노타야마신치(信太山新地)

                                                                      마츠시마신치松島新地



그 밖에도 나고야나카무라(名古屋中村), 쿄토고조라쿠엔(京都五条楽園)등, 일부가 남은 곳이나 그대로 요정으로서 자유연애를 하는 점포로 남은 곳이 현존한다.

                         http://www.youtube.com/embed/y1gEZCZOfC4?feature=player_embedded 

https://blog.goo.ne.jp/yamanooyaji0220/e/6e33e679fd9b315c2c9c8c9a1c25bbd2?fm=entry_awp_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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