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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일화해론자들의 준동

작성자황초롱이|작성시간22.08.14|조회수97 목록 댓글 0

 

https://m.lawtimes.co.kr/Content/Opinion?serial=154946 

교보문고에서 우연히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집었다. '제2판 34곳 삭제판'이라는 빨간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출판사의 마케팅 의도는 읽혔으나, 황당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수소문하여 삭제 전 원본을 구했다. 도대체가 삭제된 내용에서 ‘삭제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친 김에 박 교수의 전작(前作) '화해를 위해서'도 펼쳤다. 일본 유학 초기 위안부 프로젝트 ‘통역’을 하였던 그는, 사료(史料)를 기초로 한·일의 균열을 봉합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2005년作 '화해를 위해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도 선정되었다.

 

'제국의 위안부'는 ‘소녀상’ 이미지의 일반화(generalization)에 반대한다. 식민지 시대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을 기획하였고 간혹 이동 편의도 제공하였겠으나, '군과 경찰'이 14세 소녀를 총검으로 위협하여 끌고 간 상황의 ‘일반화’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20세 전후의 여성들이 업자(業者)를 통하여 취업한 사례가 많고, 소설 'Geisha'처럼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 딸을 팔았던 사례도 보이며, 속아서 따라갔다가 군 당국의 확인으로 귀향하거나 그들의 주선으로 달리 취업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업자의 일탈행위는 충분히 예상되고, 업자의 접대로 행정 말단 조직이 움직였을 수도 있다고 예상한다. 어쨌든 전시 적국인 중국, 네덜란드 여성들에 대한 가혹행위와 제국 2등 자국민에 대한 처우를 혼동하면 한·일간에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시각이다.

 

우리사회는 ‘다른’ 이야기를 듣는 데 몹시 인색하다. ‘소녀상’에 대한 통념은 위안부 운동가들이 ‘실수로’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있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 여학생 이미지는 근로정신대와는 겹친다. 제국주의는 2차 대전 종반에 ‘여자정신근로령’으로 어린 여학생들을 동원하였다. 법령에 의한 동원이므로 강제력과 할당이 있었을 것이고, 학교를 살리기 위하여 울면서 공장으로 갔다는 증언도 나온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05866#home

특히 목차에서 눈에 띈 ‘박유하 교수’라는 글자는 이 책을 더욱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만든다. 박 교수는 2013년 『제국의 위안부』란 책을 펴내 역사 왜곡 논란의 중심에 선 학자다. 지원단체에 의해 관련 법정 소송까지 휘말렸다. 그런 박 교수를 지켜본 저자는 주장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기존 상식에 도전하는 행위가 어떤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썼다.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006142109005

학계에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국내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여성주의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려면 위안부 동원에 기여한 가부장제 등 당시 여성차별 문제도 짚어야 한다. 1993년 재일동포 2세 여성학자인 야마시타 영애는 논문 <천황제 국가와 성폭력-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여성학적 시론>에서 위안부 문제 맨 밑바닥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유지를 위해 여성을 가사노동과 출산, 양육의 도구로, 혹은 성적 노리개로 전락시키고 있었던 복합적인 가부장적 폭력의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운동 단체와 주류 학계로부터 제국주의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 주요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윤 박사는 “위안부 문제는 민족주의 문제이자 여성주의 문제다. 여성주의 관점에서 보면 민족 내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민족 내부 문제를 지적하는 논의는 한국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정유진 전 교수도 “민족주의 관점에서 일본에 사과하라는 말은 쉽지만 위안부 문제에 한 요인이 된 민족 내부 체제를 지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피해자가 느끼는 현재의 고통은 일본의 법적 책임 부재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차별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역사적 반동과 탈진실의 시대, ‘듣는다’는 것의 의미: 2020년 5월 ‘이용수의 말’ 이후

 

 

과대평가되는 화해론

 

수년전부터 일본에서 화해라는 말이 종종 사용되기 시작해 이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화해를 논하는 저서와 특집까지 등장했다. 이런 시기에 세종대학교 교수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가 일본어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위안부 문제에 정통한 한국의 지인 말로는 한국에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으킨 반향은 적지 않았다. 자신을 "중간 입장"이라고 말하면서 국민기금을 평가하는 한편, 한국의 시민운동단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일본 시민운동 측에서도 반발이 일었다. 하지만 '리버럴'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박유하에게 동조하는 움직임과 발언이 눈에 띄었다. 

-피해자 부재의 화해론을 비판한다 니시노 루미코 2013-

 

 

 

 

 

 

제국의 위안부 성공의 대가는 너무나도 크다. 제국의 위안부는 피해의 실태를 밝히기는 커녕, 오히려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진정한 기억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따위는 없다, 제국의 위안부야말로 진정한 기억이다

이렇게 귓가에 속삭이며 위로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왜곡된 위안부 이미지의 최대희생자는 실제로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이다.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재판을, 마음에 들지 않는 역사인식을 베격하는 한국의 반일 내셔널리즘이 초래한 언론탄압 사건으로 보는 입장에 가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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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한국의 반일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예전에 서경식이 지적한 바 있는 일본의 시민파리버럴의 퇴락현상이다. 서경식은 2002년에 퇴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진지하고 솔직한말, 정직하고 순수한 태도, 정의에 대한 순수한 희구, 타자에 대한 동정과 동감, 성실한 반성과 자기비판- 이러한 것들을 많은 지식인이나 언론인들이 야유하고 냉소하는 사이에 퇴락은 가속화되어버렸다. '내셔널리즘이다' 라든가 '규탄이다 심문이다'라고 하면서 타자로부터의 비판이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이에 퇴락에서 벗어날 기회조차 붙잡지 못했다.

 

제국의 위난부를 예찬한 사람들은 서경식의 이 지적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영환 무엇을 위한화해인가-

 

 

 

 

 

 

길게보면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부터 시작된 (망각을 위한) (피해자없는) 화해담론이 

이용수 할머니의 정의연 공격에 탄력을 받고 대책없이 커졌네요

 

그 화해담론의 중핵인 박유하의 인식을 보면 위안소는 합법이고 일본은 그저 자발적 매춘부에게 도의적 책임을 져야할 뿐이라는 수준이라 거기 기반한 화해론이라는게 실제로는 중립적인 척하는 쿨질로밖에 이어질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박유하뽕을 처빨고있는 정치학 등 타분야 학자들보면 박유하가 억울하게 욕을 먹었다거나 화해를 위한 논의를 민족주의자들이 방해한다는 논리로나 빠지는거보면 참 기가 막힐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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