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구청 읍·면·동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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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덕천 1동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진면(水眞面)의 토월리(吐月里),신리(新里),정평리(亭坪里) 일부를 합쳐서 풍덕천리라 하였다.
방축골: 수지 제1택지개발지구에 포함되어 지금은 그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정축년 1월5일 전라병사 김준룡이 이끄는 근왕병이 이곳에 방진(方陳)을 구축 하였다. 방진에는 식량을 가운데두고 사방에서 적을 맞아 싸울 수 있게 구축된 진지(陳地)였으며, 이곳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후에 방진(方陳)을 구축한, 방축(方築)을 쌓았던 곳이라 하여 방축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자들: 마을에 정자나무가 있었으므로 정자 또는 정자뜰이라 하였다.
문정: 이 마을에 문정중학교가 있어서 문정이라 하였다. 문정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시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는 문정중학교의 전신은 심곡서원이므로 서원에 배향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시호를 따서 문정학원이라 하였다.
토월: 속칭 방축동이라고도 하였다. 이 마을에서 동편에 솟는 달을 맨 처음 볼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토월이라 하였다고 하는 속설이 있다.
풍 덕내: 풍덕천(川)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본내는 래(來)라고 하였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풍덕내라고 하고 있지만 이를 풀이하면 "덕이 크신 분이 풍덕에서 오신다"는 뜻인데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를 용인에 모시게 된 기연을맺어준 지명이라고 한다. 즉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 된 후 경기도 풍덕군에 일시 평장 되었다가 후에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코자 하였다. 그 면례(緬禮) 행렬이 수지읍 풍덕래에 이르자 면례행렬 앞에 세나고자 하면 행여가 움직이질 않아서 할 수 없이 명정이 떨어진 곳으로 가자는 뜻이라 하여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행여가 움직였고 그래서 장사를 모셨기로 용인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곳에 선생의 유택이 마련되었다는것이다.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고 하여 우연치 않은 지명대로 충혼의백을 맞이하였지만 1914년 지명 표기작업을 할 때 올래(來)자를 내천(川)자로 바꾸어 풍덕천(豊德川)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 풍덕천이 물이 깊어 명주 한필이 다 들어갔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풍덩풍덩 빠져죽어 풍덩내(川)라고 하던 것이 풍덕이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진면(水眞面)의 토월리(吐月里),신리(新里),정평리(亭坪里) 일부를 합쳐서 풍덕천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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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덕천 2동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진면(水眞面)의 토월리(吐月里), 신리(新里), 정평리(亭坪里)일부를 합쳐서 풍덕천리로 하였다. 마을 앞에 하천이 있어서 이를 풍덕내라 하였는데 하천의 이름을 따서 풍덕천리라 하였다
풍덕내:풍덕천(川)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본내는 래(來)라고 하였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풍덕내라고 하고 있지만 이를 풀이하면 "덕이 크신 분이 풍덕에서 오신다"는 뜻인데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를 용인에 모시게 된 기연을맺어준 지명 이라고 한다. 즉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 된 후 경기도 풍덕군에 일시 평장 되었다가 후에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코자 하였다.그 면례(緬禮) 행렬이 수지읍 풍덕래에 이르자 면례행렬 앞에 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서 지금의 묘소자리인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하단에 떨어졌는데 남쪽으로 길을 떠나고자 하면 행여가 움직이질 않아서 할 수 없이 명정이 떨어진 곳으로 가자는 뜻이라하여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행여가 움직였고 그래서 장사를 모셨기로 용인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곳에 선생의 유택이 마련 되었다는 것이다. 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고 하여 우연치 않은 지명대로 충혼의백을 맞이하였지만 1914년 지명 표기작업을 할 때 올래(來)자를 내천(川)자로 바꾸어 풍덕천(豊德川)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풍덕천이 물이 깊어 명주 한필이 다 들어 갔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풍덩풍덩 빠져죽어 풍덩내(川)라고 하던 것이 풍덕이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정자뜰:조선시대 용인이씨 집성촌이던 곳으로, 지금의 신봉동 자연부락 입구에서 동보3, 4차아파트에 이르는 길에 정자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예부터 정자 또는 정자뜰이라 하였다.
정평:정자뜰지역의 넓은 지역을 말하는데, 넓다는 뜻으로 일제시대에 한문식으로 바꾼 이름이라고 한다.
신촌:정평에서 분리되어 나온 작은 마을로, 새마을이라는 뜻이다.
신정마을:신촌과 정평을 합한 합성어로, 수지2비구택지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생긴 이름이다.
진산마을:임진산이라는 산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그 산터에 생긴 마을이라 해서 이름붙여졌다.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진면(水眞面)의 토월리(吐月里), 신리(新里), 정평리(亭坪里)일부를 합쳐서 풍덕천리로 하였다. 마을 앞에 하천이 있어서 이를 풍덕내라 하였는데 하천의 이름을 따서 풍덕천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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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동
- 이곳은 본래 용인군 수진면의 지역이었다. 신봉리의 유래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리(新里:지금의 신촌과 홍천말 일대)와 서봉동(捿鳳洞: 서봉, 중말, 양지말)을 병합할 때 신리의 신자와 서봉동의 봉자를 따서 신봉리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옛 지명은 시봉굴이었다. (웃 시봉굴, 아래 시붕굴이라 했음) 시봉굴은 서봉골의 사투리인데, 서봉골은 서봉산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서봉산은 광교산의 또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광교산은 고려태조 왕건이 산에서 나는 빛을 보고 명명(命名)했다고 한다.(처음 이름은 광옥산 이었음) 그렇기에 처음에는 광(光)과 같은 뜻의 서(서)를 썼으나 (예 : 서봉산 또는 서봉사) 임진왜란 때 서봉사가 소실된 이후에는 절터에 잡초가 우거지고 새들만 깃든다는 뜻에서 깃들 서(棲)자를 썼다. 신봉리 에서 봉(鳳)의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작은 말구리 우측에 있는 태봉암 과 태봉골 이다. 신봉리에는 지금 서봉과 신봉 두 개의 자연마을으로 구성 되어 있다. 신봉:신봉마을 안에는 다시 중말, 양지말, 혼천말이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중말과 양지말이 신원(新月)이라는 행정명으로 불렀으며 홍천말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가 나중에 신월과 합치면서 신봉이 된 것이다. 신봉리의 리명이 신리의 신자와 서봉동의 봉자가 합쳐서 되었듯이 신봉이라는 마을명의 유래는 신봉리의 유래와 같다. 그리고 신봉마을명은 신봉리에서 제일 큰 동네, 첫째 동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 신월(新月)은 초상달이라는 뜻이나 이 마을을 신월이라 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서봉:서봉 마을은 신봉리 맨 위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서봉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 뒤 광교산에 서봉사(瑞峯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서봉은 이것 발고도 광교산 골짜기에 있는 동네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서봉(瑞峰)이란 서봉산(瑞峰山)에서 따온 이름이요, 서봉산은 광교산의 또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홍천말:홍천말은 신봉리 초입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유래는 예전에 이 마을에 남양 홍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기에 홍천말이라고 했다하나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다만 남양 홍씨가 많이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명과는 관계가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 마을명으로 쓰는 홍천말은 홍은 넓은홍(洪)이 아닌 붉은홍(紅)을 쓰고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광교산에서 형제봉으로 내려오다 보면 다시 한 번 우뚝 솟은 봉이있는데 이 봉은 광교산과 형제봉 사이에 있다고 해서 가운데 봉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봉사 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를 용마등(龍馬嶝)이라 한다. 이 산줄기 가운데는 한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호령할 영웅이 나온다는 명당이 있다고 한다. 이런 기미를 안 일인들이 어느 때인가 이 산줄기를 끊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도 선연하다. 뿐만 아니라 이 혈을 끊은 자리에서 피가 샘솟아 홍천마을 앞까지 붉게 흘렀다고 한다. 이렇게 붉은 피가 흘렀다고 해서 홍천이라 했다 한다.
1996. 3. 1 : 수지면이 수지읍으로 승격
- 용인군이 도농복합도시 형태의 시로 승격
○ 2001.12.24 : 수지읍을 수지출장소로 승격
- 풍덕천1동, 풍덕천2동, 죽전1동, 죽전2동, 동천동, 상현동(6개동 분할)
○ 2005.10.31 : 수지출장소가 수지구로 승격
- 신봉동, 상현2동(2개동 신설)
◆ 2005. 6.17 : 분동체제로 전환을 위한 주민의견수렴과대동 체제 ⇒ 소 지역단위 분동체제 전환
◆ 2004. 8.23: 「행정동 설치 관련 기본계획 수립 및 실태조사」
◆ 2005. 2.23: 신봉동 명칭 최종확정(용인시 지명위원회)
◆ 2005. 7.18: 「일반구 및 행정동 설치」승인
◆ 2005. 8.30: 용인시 기구 및 정원 최종 승인(행정자치부)
- 청사 확보, 인력배치, 각종 시설 공사
○ 2005.11. 1: 신봉동 개소
- 이곳은 본래 용인군 수진면의 지역이었다. 신봉리의 유래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리(新里:지금의 신촌과 홍천말 일대)와 서봉동(捿鳳洞: 서봉, 중말, 양지말)을 병합할 때 신리의 신자와 서봉동의 봉자를 따서 신봉리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옛 지명은 시봉굴이었다. (웃 시봉굴, 아래 시붕굴이라 했음) 시봉굴은 서봉골의 사투리인데, 서봉골은 서봉산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서봉산은 광교산의 또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광교산은 고려태조 왕건이 산에서 나는 빛을 보고 명명(命名)했다고 한다.(처음 이름은 광옥산 이었음) 그렇기에 처음에는 광(光)과 같은 뜻의 서(서)를 썼으나 (예 : 서봉산 또는 서봉사) 임진왜란 때 서봉사가 소실된 이후에는 절터에 잡초가 우거지고 새들만 깃든다는 뜻에서 깃들 서(棲)자를 썼다. 신봉리 에서 봉(鳳)의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작은 말구리 우측에 있는 태봉암 과 태봉골 이다. 신봉리에는 지금 서봉과 신봉 두 개의 자연마을으로 구성 되어 있다. 신봉:신봉마을 안에는 다시 중말, 양지말, 혼천말이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중말과 양지말이 신원(新月)이라는 행정명으로 불렀으며 홍천말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가 나중에 신월과 합치면서 신봉이 된 것이다. 신봉리의 리명이 신리의 신자와 서봉동의 봉자가 합쳐서 되었듯이 신봉이라는 마을명의 유래는 신봉리의 유래와 같다. 그리고 신봉마을명은 신봉리에서 제일 큰 동네, 첫째 동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 신월(新月)은 초상달이라는 뜻이나 이 마을을 신월이라 한 유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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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전1동
- 죽전동 죽전리는 수지읍 소재지의 풍덕천 동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용인군 수진면(옛 수지면의 이름)의 지역으로서 큰 못이 있어 대지 또는 죽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감바위, 점촌, 풍덕내, 일부를 병합하여 죽전리라 해서 읍삼(구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1983호에 의하여 다시 수지면에 편입되었다. 이곳 지명 유래는 이곳으로부터 약 10리 되는 모현면 능원리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와 관계가 깊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 공양왕 4년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정몽주 선생의 시신은 개성 근처 풍덕이라는 곳에 모셨다. 그 후 19년 되인 1411년(태종 11년 신묘) 선생의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이장하기 위해 풍덕천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 상여에 영정이 날아올라 지금의 묘소에 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영정을 따라가 보니 가히 명당이라 여겨 여기다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몽주 선생을 모신 영정과 상여가 이 땅을 지나갔기에 만고에 충신을 사모하는 민초들에 의해 이곳의 지명을 죽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죽이란 대나무로 충신을 뜻하며 절은 마디가 있는 나무이니 역시 대나무라 충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곳 말고도 정몽주 선생으로 인해 지명이 바뀐 곳이 선죽교이다. 이곳은 처음 이름이 선지교였으나 선행 피살 후 죽자를 넣어 선죽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죽절이 죽전으로 변했다. 그후에는 죽전과 선생의 인연은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선조 9년(1576, 병자년)에 선비들이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죽전서원이라 했다. 이 서원은 선조 25년에 있었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선조 41년(1608)에 모현면 능원리에 다시 세워 충렬서원이라 했다. 죽전동는 원래, 대지, 감바위, 내대지, 세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요즘은 인구증가로 여러 동네로 분동되었으며, 지금처럼 아파트단지가 계속 들어서면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죽전동은 산으로 자지산이 있고 이 산에는 어름박골 이라는 약수터와 괸바위, 덤바위, 지경바위가 있으며 기묘 명현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큰 물로는 대지 앞에 장장포 라는 곳이(용인현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평범한 하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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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전2동
- 죽전동 죽전리는 수지읍 소재지의 풍덕천 동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용인군 수진면(옛 수지면의 이름)의 지역으로서 큰 못이 있어 대지 또는 죽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감바위, 점촌, 풍덕내, 일부를 병합하여 죽전리라 해서 읍삼(구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1983호에 의하여 다시 수지면에 편입되었다. 이곳 지명 유래는 이곳으로부터 약 10리 되는 모현면 능원리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소와 관계가 깊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 공양왕 4년 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정몽주 선생의 시신은 개성 근처 풍덕이라는 곳에 모셨다. 그 후 19년 되인 1411년(태종 11년 신묘) 선생의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이장하기 위해 풍덕천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 상여에 영정이 날아올라 지금의 묘소에 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영정을 따라가 보니 가히 명당이라 여겨 여기다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몽주 선생을 모신 영정과 상여가 이 땅을 지나갔기에 만고에 충신을 사모하는 민초들에 의해 이곳의지명을 죽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죽이란 대나무로 충신을 뜻하며 절은 마디가 있는 나무이니 역시 대나무라 충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곳 말고도 정몽주 선생으로 인해 지명이 바뀐 곳이 선죽교이다. 이곳은 처음 이름이 선지교였으나 선행 피살 후 죽자를 넣어 선죽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죽절이 죽전으로 변했다. 그후에는 죽전과 선생의 인연은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선조 9년(1576, 병자년)에 선비들이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죽전서원이라 했다. 이 서원은 선조 25년에 있었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선조 41년(1608)에 모현면 능원리에 다시 세워 충렬서원이라 했다. 죽전동는 원래, 대지, 감바위, 내대지, 세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요즘은 인구증가로 여러 동네로 분동되었으며, 지금처럼 아파트단지가 계속 들어서면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죽전동은 산으로 자지산이 있고 이 산에는 어름박골 이라는 약수터와 괸바위, 덤바위, 지경바위가 있으며 기묘 명현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큰 물로는 대지 앞에 장장포 라는 곳이(용인현지) 있었다 하나, 지금은평범한 하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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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동
- 동 막곡:예부터 광주군과 용인군의 경계가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동쪽에 마을 지어 표계(表界)를 삼아 동막이라 하였다는 속설도 있으며, 병자호란 때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와 큰 전투를 벌일 때 군대의 막사가 무수히 많아서 동막곡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머내:읍지, 기타 지리지등을 보면 옛지명에 험천 또는 험천점(險川店)으로 표기된 지명이 있다. 우리나라 말의 고어(古語)에 "머흐다"라는 말이 있는데 "머흐다"는 험하다는 뜻이며 "내"는 천(川)을 뜻하므로 한자의 의역하면 "험천(險川)"이 된다. 따라서 험천의 한자표기 지명을 우리말로 쓸 때는 "머흔천"이 되고 이것이 속음 탈락되면서 "먼-천" 또는 머내, 모내로 변형된 것인데, 다시 한자로 의역하여 원천(遠川)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본래의 표준 지명은 머흔천, 한자로는 험천이라 표기하는 것이 옳은 지명이다.
상손곡:손곡 손골이라고도 하는데 손(蓀)은 창포나 란과 같은 식물을 말하므로 손초(蓀草)가 자생한 골이라는 데서 연유된 지명인 것으로 추측된다. 아랫손골 위쪽에 마을이 이루어졌다하여 위손골, 상손골 등으로 불리워진다.
염광농원:수지읍 동천리에 딸린 마을 중의 하나로 본래 이마을은 음성나환자의 자활촌이었는데 나환자들이 병원을 설립하여 피부병 전문병원으로 전국에 이름이 나 있는 마을이 되었다. 지금은 가내공업과 가구단지로 급성장하여 현대식마을로 발전을 이루웠다.
중손곡:상손곡과 하손곡 중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중손골,중손곡이라 칭하게 되었다
하손곡:손골, 마을이 위 아래에 형성되어 있어 윗마을을 상손곡이라 한것에 따라 아랫마을을 하손곡이라 하였다.
- 동 막곡:예부터 광주군과 용인군의 경계가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동쪽에 마을 지어 표계(表界)를 삼아 동막이라 하였다는 속설도 있으며, 병자호란 때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와 큰 전투를 벌일 때 군대의 막사가 무수히 많아서 동막곡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머내:읍지, 기타 지리지등을 보면 옛지명에 험천 또는 험천점(險川店)으로 표기된 지명이 있다. 우리나라 말의 고어(古語)에 "머흐다"라는 말이 있는데 "머흐다"는 험하다는 뜻이며 "내"는 천(川)을 뜻하므로 한자의 의역하면 "험천(險川)"이 된다. 따라서 험천의 한자표기 지명을 우리말로 쓸 때는 "머흔천"이 되고 이것이 속음 탈락되면서 "먼-천" 또는 머내, 모내로 변형된 것인데, 다시 한자로 의역하여 원천(遠川)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본래의 표준 지명은 머흔천, 한자로는 험천이라 표기하는 것이 옳은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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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1동
- 수지는 1914년 수진면과 지내면의 두 글자를 합쳐 수지(水枝) 라 불리게 되었으며 마흔가리를 기점으로 물이 갈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속칭 깊은 말이라 하였는데 「용인현읍지」등에는 심곡(深谷)등으로 표기되었다. 효종 경인년에 사액된 심곡서원이 있어서 서원말이라고 한다. 상리의 상자와 만현을 현자를 합쳐 부르게된 上峴 동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던 심곡 서원이 있는 서원말과 독같치 생긴 바위가있는 옹암(독바위) 특히 이 마을은 독바위 줄다리기 민속놀이가 전승되고 있으며 깊은 말에는 조광조 선생을 묘소와 장수 바위가 있다.또한 가산은 군부대가 주둔 하고 느진재는 현재의 만현(晩峴) 마을로 옛날 사람들이 현청이있던 구성을 가기 위해 넘던 고개이다. 이외에도 솔개, 와야, 사동, 상막골, 분투골 등 몇 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역사와 전통을 지니며 내려온 마을이다.
고려시대:수진면
1914. 3. 1:수진면과 지내면을 합쳐 수지면이 됨
1996. 3. 1:수지읍 승격
2001.12.24:수지읍에서 상현동으로 분동(용인시조례 288호)
2005.10.31:상현동에서 상현1동과 2동으로 분동(용인시조례 648호)
- 수지는 1914년 수진면과 지내면의 두 글자를 합쳐 수지(水枝) 라 불리게 되었으며 마흔가리를 기점으로 물이 갈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속칭 깊은 말이라 하였는데 「용인현읍지」등에는 심곡(深谷)등으로 표기되었다. 효종 경인년에 사액된 심곡서원이 있어서 서원말이라고 한다. 상리의 상자와 만현을 현자를 합쳐 부르게된 上峴 동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던 심곡 서원이 있는 서원말과 독같치 생긴 바위가있는 옹암(독바위) 특히 이 마을은 독바위 줄다리기 민속놀이가 전승되고 있으며 깊은 말에는 조광조 선생을 묘소와 장수 바위가 있다.또한 가산은 군부대가 주둔 하고 느진재는 현재의 만현(晩峴) 마을로 옛날 사람들이 현청이있던 구성을 가기 위해 넘던 고개이다. 이외에도 솔개, 와야, 사동, 상막골, 분투골 등 몇 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역사와 전통을 지니며 내려온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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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2동
- 수지는 1914년 수진면과 지내면의 두 글자를 합쳐 수지(水枝) 라 불리게 되었으며 마흔가리를 기점으로 물이 갈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속칭 깊은 말이라 하였는데 「용인현읍지」등에는 심곡(深谷)등으로 표기되었다. 효종 경인년에 사액된 심곡서원이 있어서 서원말이라고 한다. 상리의 상자와 만현을 현자를 합쳐 부르게된 上峴 동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던 심곡 서원이 있는 서원말과 독같치 생긴 바위가있는 옹암(독바위) 특히 이 마을은 독바위 줄다리기 민속놀이가 전승되고 있으며 깊은 말에는 조광조 선생을 묘소와 장수 바위가 있다.또한 가산은 군부대가 주둔 하고 느진재는 현재의 만현(晩峴) 마을로 옛날 사람들이 현청이있던 구성을 가기 위해 넘던 고개이다. 이외에도 솔개, 와야, 사동, 상막골, 분투골 등 몇 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역사와 전통을 지니며 내려온 마을이다.
고려시대:수진면
1914. 3. 1:수진면과 지내면을 합쳐 수지면이 됨
1996. 3. 1:수지읍 승격
2001.12.24:수지읍에서 상현동으로 분동(용인시조례 288호)
2005.10.31:상현동에서 상현1동과 2동으로 분동(용인시조례 648호)
- 수지는 1914년 수진면과 지내면의 두 글자를 합쳐 수지(水枝) 라 불리게 되었으며 마흔가리를 기점으로 물이 갈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속칭 깊은 말이라 하였는데 「용인현읍지」등에는 심곡(深谷)등으로 표기되었다. 효종 경인년에 사액된 심곡서원이 있어서 서원말이라고 한다. 상리의 상자와 만현을 현자를 합쳐 부르게된 上峴 동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던 심곡 서원이 있는 서원말과 독같치 생긴 바위가있는 옹암(독바위) 특히 이 마을은 독바위 줄다리기 민속놀이가 전승되고 있으며 깊은 말에는 조광조 선생을 묘소와 장수 바위가 있다.또한 가산은 군부대가 주둔 하고 느진재는 현재의 만현(晩峴) 마을로 옛날 사람들이 현청이있던 구성을 가기 위해 넘던 고개이다. 이외에도 솔개, 와야, 사동, 상막골, 분투골 등 몇 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역사와 전통을 지니며 내려온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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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복동
- 성동:성복 마을에서 동쪽에 있으므로 성동이라 하였다. 속칭 양지말이라고 한다.
성서:성복리 마을에서 서쪽에 자리 잡았다 하여 성서라 하였다. 마을 서북쪽을 도리실이라고 한다.
옹골:응곡, 응꼴, 매재골등으로 불리웠던 것을한자 표기로 응곡이라 한다. 속설에 매가 깃들었다하여 응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성남:예부터 이마을은 성주이씨의 집성촌이었는데 성복마을에서 그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성남이라 하였다고 함.
- 성동:성복 마을에서 동쪽에 있으므로 성동이라 하였다. 속칭 양지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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