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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과 명언

무채색의 미로

작성자허열웅|작성시간22.08.20|조회수120 목록 댓글 0

         무채색의 미로

                                                                                                          허 열 웅

  하얗게 부서지는 숨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온다. 누군가에게 스친 흔적도, 말을 나눈 적도 없는 순결한 백치가 무채색의 미로를 걷고 있다. 발자국도 없이 밤을 건너온 새벽안개는 하얀 날개를 펴고 하얀 물기를 머금고 회색빛 입김을 쏟아내고 있다. 은빛 거미줄에 가려진 희미하게 들뜬 저 세상의 커튼 안쪽에서 수런거리는 목소리에 생명의 온기가 느껴진다. 흔적을 지우며 강이나 호수에서 흘러왔을지도 모르는 물의 입자들이 투명과 불투명 사이로 해방군처럼 거리와 산과 마을을 점령하고 있다. 안개는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으로 구성된 지표면의 구름의 나들이다.

  요즈음의 세상도, 내 마음도 안개속이다. 마치 6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 시절에는 안개를 소재로 한 노래와 영화에 많은 눈길을 끌었다.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으므로 안개는 외로움과 슬픔을 내포하는 의미가 있었다. 현미의 노래 <밤안개>는 안개를 제목으로 한 노래의 서막을 열었다. 이어서 정훈희의 ‘안개’를 비롯해서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안개 속으로 가 버린 사랑>등이 있었다. 여기에 편승하여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을 소재로 만든 영화<안개>는 개봉과 동시에 관객이 몰려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내 나이 일흔의 고희를 넘어설 때 여든까지만 별 탈 없이 살았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 따라 세월은 덧없이 흘러 그 생각을 넘어 80 고개에 도착한 하얀 늙은이가 되었다. 안개 속을 더듬더듬 걸어온 시간, 긴 것도 같고 80살이라는 나이가 퀵 써비스로 배달되어 온 느낌도 든다. 인생의 시간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 끝으로 갈수록 빨리 풀리듯 젊었을 때는 더디 가든 시간이 나이가 들수록 초고속으로 흘러간다. 무심한 세월은 우두커니 그대로 서 있는데 내가 100m 경주하듯 달려온 것 같기도 하다. 그 누구도 백 살을 넘기기가 힘들 것이다. 지나간 날은 멀고, 올 날은 짧으며 오르기는 힘들고 내려오는 기세는 빠른 것이 우리의 삶이다.

 

  흘러간 젊음에 집착하지도, 그렇다고 젊음에 시비 걸지도 말아야겠다. 화려하고 싱싱한 꽃이 계속 활짝 피어있다면 그건 꽃이 아니라 조화일 것이다. 꽃이 아름다운 건 결국 시들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 곧 시들어 갈 것을 알기에 활짝 핀 꽃이 그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우리도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이제 늙는 것에 두렵거나 서러워하지 말고 나이에 걸 맞는 주름과 백발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며 세상과 소통해야겠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강과 호수근처에서 삼십년을 넘게 살았다. 아침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백마강 강변에서 시작하여 말년에는 대청 댐과 멀지 않은 대전 근방 신탄진에서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그래서인지 안개와 익숙해졌고 그와 연결된 글이나 영화 등에 매력을 느꼈다.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이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그 곳 삶에서 안개 같은 글을 쓰며 그 속으로 들어간 적이 가끔 있었다. 무채색의 안개가 산등성이를 지우고 진주해온 적군의 전차부대처럼 길을 막고 있었다. 저들이 퇴각하면 앞으로 펼쳐질 풍광은 얼마나 멋질까하는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세상은 안개 속을 헤매는 수수게기 같은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풀지 못한 스핑크스의 수수게기를 풀어낸 오디프스도 대답을 못할 것 같다.

 

  숨 막힐 듯 자욱한 안개 속에서 선명한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헤매다보니 백년마다 꽃이 핀다는 대나무 숲이 멀리 보인다. 안개가 걷히고 공중에 난 길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산은 청자 색깔로 윤기가 흐르고 새벽하늘은 홍시 빛이었다. 잉크처럼 번져가던 안개가 걷히고 아침 해가 떠오른 세상은 아침세수를 막 끝난 것처럼 맑고 향기로웠다. 안개가 걷히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까? 그 세상에서 우린 행복 할까?로 궁금했던 날의 해답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혼란스럽다.

  소망과는 달리 오늘의 세상은 숨 막힐 듯 자욱한 안개로 뒤덮고 있는 현상이다. 정치는 이전투구泥田鬪狗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깜깜한 밤중이고, 경제는 서민들의 아우성이 골목을 누비고 있다. 문맥조차 모호하여 독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 같은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그야말로 무채색의 미로다. 세상에서 가장 얕은 진리 “인간은 모두 죽는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고, 돈이 너무 많아 얼마인지 셀 수 없었던 이병철, 정주영 회장은 물론 스티브 잡스도 한 푼도 못 갖고 갔다”는 사실을 나를 비롯한 인간들은 왜? 모를까? 안개 걷힌 청명한 하늘이 펼쳐지기를~ 내나라 내 조국이 밝고 찬란해지기를 기원해 본다.

 

                            보이면서 아니 보이는 것/ 붙잡을 수 없길래 붙잡고 싶은 것/

                            텅 비면서 무궁하게 존재하는 것 (윤동주의 시 -안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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