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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현승 시 연구.17-박덕은

작성자낭만대통령|작성시간25.03.02|조회수267 목록 댓글 0

시인 김현승 시 연구.17

 

빼지 않은 칼은/

빼어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법//

빼어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저를 더 두려워한다//

빼어든 칼은/

이 어두운 밤 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말지만/

빼어들지 않은 칼은/

저를 지킨다/

이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우리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 [무기의 의미.1] 전문 

 

 1974년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실려 있는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무기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빼지 않은 칼은 빼어든 칼보다 더 날카롭다. 패러독스로 출발한다. 빼어든 칼은 빼지 않은 칼보다 한 수 아래다. 빼지 않은 칼로 상대를 제압할 줄 알아야 한 수 수 위다. 빼어든 칼은 원수를 두려워하지만, 빼지 않은 칼은 원수보다 강한 자신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빼어든 칼은 이 어두운 밤 이슬에 이윽고 녹슬고 만다. 결코 그 영향력이 길지 못하다. 그 헛점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다. 하지만, 빼어들지 않은 칼은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모든 자를 두렵게 한다. 언제까지? 어둠의 눈물이 소금이 되어 자신의 뺨에서 마를 때까지. 따라서, 함부로 칼을 빼어들어서는 안 된다. 인생 내내, 빼어든 칼보다는 빼지 않은 칼을 가슴에 마음에 영혼에 지니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가벼운 인물이 되지 말고, 묵직한 인물, 성숙한 인물, 깊이 있는 인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존경을 받는다. 이 조언과 경고를 요즘 정치인들이 가슴에 새겨주었으면 좋겠다. 보다 더 나은 나라, 보다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위해서. 

 

가장 날카로운 칼과/

가장 날카로운 고백은/

다르지 않다//

가장 날카로운 칼은/

그 칼날에/

그리하여 저의 낯을 비춰 본다//

그리하여/

가장 날카로운 칼은/

꽃잎 앞에도 무릎을 꿇고/

그 꽃잎은/

그 칼을 쥔 손목에/

입을 맞춘다//

그리하여/

칼집 속에/

칼을 잠들게 하고서/

우리는 승리를 얻는다//

밤 이슬에 녹슬지 않는 그 빛나는/

이름으로/

우리는 누구의 승리도 아닌......///

    - [무기의 의미.2]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발표된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무기의 또 다른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가장 날카로운 칼과 가장 날카로운 고백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가장 날카로운 칼은 그 칼날에 자신의 낯을 비춰 볼 수 있다. 또 가장 날카로운 칼은 꽃잎 앞에서도 무릎을 꿇는다. 이때 꽃잎은 그 칼을 쥔 손목에 입을 맞춘다. 또 칼집 속에 칼을 잠들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승리를 얻는다. 밤 이슬에 녹슬지 않은 그 빛나는 이름으로 승리를 거둔다. 그 승리는 그 누구의 승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장 날카로운 칼보다 가장 날카로운 고백을 선택하는 게 지혜롭지 않을까. 어차피 가장 날카로운 칼이 당대에게 승리를 안겨 주게 될 거라면, 출발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가장 날카로운 칼보다 가장 날카로운 고백을 선택해, 지혜로운 인생길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나라를 이끌어 가는 무리들이 이 시를 유심히 읽고 나아갈 길을 개척했으면 좋겠다.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절하기란/

머리를 숙여 아끼고 받들기란/

낡은 것도 새롭게 만들기란/

새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들기보다/

우리들의 세상에서 더욱 어렵다//

사랑의 품속엔/

사랑하는 이가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은 없다//

어버이의 따뜻한 품은/

아직도 따뜻하지만/

아들들의 문 밖에서 오히려 떨고 있다/

아침 안개와 저녁 바람에 떨고 있다/

내일의 꿈 안엔/

바라는 이가 없으니/

사람들의 품안에도/

내일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선/

다사로움엔 빵과 같이 굶주리고/

새로움엔 술과 같이 저마다 취한다//

모든 땅이/

새로움으로 황색과 같이 차갑게 빛날 때/

어디 가서 한줌의 흙을 찾을까/

그 흙속에 가난하게 핀/

한 송이의 들꽃을 어디 가서 입맞출 수 있을까,/ 

입맞출 수 있을까.///

   - [보존]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실려 있는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보존할 가치를 찾고 있다. 이 세상에 어려운 게 많다. 무릎 꿇고 다소곳이 절하기, 머리 숙여 아끼고 받들기, 낡은 것을 새롭게 만들기 등은 새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들기보다 더 어렵다. 알고 보니, 사랑의 품속에 사랑하는 이가 없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없더라. 어버이의 품은 여전히 따스하지만, 아들들의 문 밖에서 떨고 있더라. 내일의 꿈 안에 바라는 이가 없고, 바라는 이가 없으니 사람들의 품안에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슬픈 현실이다. 이 세상의 다사로움에 굶주림이 있고, 새로움에 취기가 있다. 모든 대지가 새로움으로 황토와 같이 차갑게 빛날 때, 어디 가서 한 줌의 흙을 찾을 수 있을까. 어디 가서 그 흙속에 가난하게 핀 한 송이 들꽃에 입맞춤 할 수 있을까. 암담한 현실이다. 그럴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보존해야 한다. 한 올의 희망과 꿈일지라도, 가슴에 안고, 가치 있는 것들을 보존해야 한다. 겸허, 존중, 창조, 효도, 배려, 새로움 추구, 따스한 마음 등을 찾고, 발굴하고, 일궈 일상과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 사는 맛이 난다. 그런 세상을 꿈꿔야 한다.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외로울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밤하늘에서 별을 찾듯/

책을 연다/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 듯/

조심스러이 책을 편다//

가장 기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나와 같이 그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을/

나의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나의 친구들을 거기서 만난다//

아ㅡ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주택들/

아ㅡ 가장 높은 정신의 성城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그들의 일생은 거기에 묻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괴롬과/

나의 희망을 노래하여 주는/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을/

나는 거기서 만난다ㅡ 그리고 힘주어 손을 잡는다.///

    - [책과의 여행]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수록된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독서의 효용성을 탐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가장 고요할 때 독서한다. 가장 외로울 때도 책을 읽는다.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책을 연다. 밤하늘에서 별을 찾듯,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 듯, 책을 편다. 가장 기쁠 때도,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책장을 넘긴다. 그때마다 만나는 존재들. 거기서 함께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친구들을 만난다.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주택들, 가장 높은 정신의 성城들,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거기에 묻혀 있는 그들의 일생, 슬픔과 괴로움, 희망을 노래해 주는 친구들의 썩지 않은 영혼 등도 만난다. 거기서 그 존재들과 힘주어 손을 잡고 악수하고 포옹한다. 이게 독서이고, 책과의 여행이다. 이게 독서의 가치이고, 독서의 진정한 효용성이다. 책 읽기, 독서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유용하고, 가치가 있고, 행복의 디딤돌인가를 여실히 알려 주고 있는 시라서, 더욱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슬픔을 기쁨으로/

그들의 꿈으로써 바꾸기 위하여/

그 기쁨을 어린아이보다/

더 기뻐하기 위하여//

그들은 가장 춥고/

그들은 가장 뜨겁게 있다//

시인들은 무엇하러 있는가/

그들은 땅속에 묻힌 황금잎보다도/

그들은 저 하늘 위의 별을 찾으며/

무엇하러 있는가/

그들은 소리로써 노래하지만/

그들은 말로써/

침울하고 듣기 위하여 있다//

겨울에는 마지막 잎새로/

봄에는 또한 첫눈으로 터지면서......///

 - [시인들은 무엇하러 있는가]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실린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시인의 존재이유를 캐고 있다. 시인은 누구일까. 시인은 어떤 존재일까. 시인은 무엇하러 이 땅에 왔나. 시인의 역할은 무얼까. 시인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시인은 슬픔을 꿈으로 바꾸기 위해 왔다. 시인은 기쁨을 어린아이보다 더 기뻐하기 위해 왔다. 시인은 가장 춥게 사는 존재이다. 또한 시인은 가장 뜨겁게 있는 존재다. 시인은 땅속에 묻힌 황금잎을 찾으러 왔다. 시인은 저 하늘 위의 별을 찾으러 왔다. 시인은 소리로 노래하고, 시인은 말로 침울하고 듣기 위해 왔다. 겨울에는 마지막 잎새가 되어, 봄에는 첫눈으로 터지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존재로 이 땅에 왔다. 모처럼 시인의 존재가지, 존재이유를 생각하고, 기뻐하고, 노래할 수 있어, 행복하다. 오늘부터 시인의 존재, 시인의 가치, 시인의 임무, 시인의 역할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시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을 하늘에 깊이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이 땅 위의 모든 선함도/

한 사랑의 뿌리로부터 피어나지만/

이 사랑도 나의 눈엔/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이 꽃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 꽃의 얼굴을 그 이름으로 가리우고 마는......//

시인들의 언어로/

시를 가리울 수는 없다/

저자들의 진리로도 진리를 헐 수는 없다//

이 꽃과 같이/

다만 이 꽃과 같이//

네 눈으로도/

네 입술로도/

입맞추지 말게 하라.///

   - [이 꽃과 같이]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실린 이 시의 시적 화자는 꽃의 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땅 위의 모든 선함이 소중하다. 하지만, 그 선함도 한 사랑의 뿌리로부터 피어난다. 그만큼 사랑은 소중하고 귀하다. 이런 사랑도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사랑보다 꽃이 더 소중하고 귀하다. 그래서 이 꽃엔 이름 붙일 수 없다. 그만큼 위대하다. 따라서 이 꽃의 얼굴을 그 이름으로 가릴 수는 없다. 이 꽃과 시는 같은 위치에 있다. 시는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고 위대하다. 그러므로 시인들의 언어로 시를 가릴 수는 없다. 또, 가려서도 안 된다. 저자들의 진리가 귀하지만, 그것으로도 참 진리를 가릴 수 없다. 참 진리는 꽃과 같이 소중하고 귀하고 위대하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가 살아 있는 사회, 시가 존중받는 사회, 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따라서, 꽃과 진리와 시는 그 어떤 눈으로도 입술로도 함부로 입맞추지 말아야 한다. 마치 존귀한 가치를 모시듯, 정중하게 대하고 모시고 다뤄야 한다. 부디, 이 땅에 진리를 따르고, 꽃을 사랑하고, 시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길 빈다. 

 

우리는 짧아졌다/

우리는 통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배와 배꼽 아래께서/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나 버렸다//

배는 먹고 또 씨앗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마른 통나무로/

쌓여 가고 있다//

넝쿨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저 구름에까지/

자라가기는 틀렸다/

깊이 생각할 뿌리는 말라/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도/

남아 도는 유희가 없다//

우리는 지금/

도끼 옆에 놓여 있다/

통나무가 부르는/

가장 천근한 이미지는/

도끼다/

손바닥의 침 뱉는/

든든한 도끼다.///

 - [동체시대]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발표된 이 시의 시적 화자는 통나무가 된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 통나무가 되어 버린 시대.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나 버린 통나무. 어느덧 마른 통나무 되어 쌓여 가고 있는 존재들. 배는 먹고 씨앗을 보존하면서, 미래를 꿈꾸고, 넝쿨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자라나 마침내 저 구름에까지 자라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는 시대, 아예 그 꿈마저 꾸지 못하고 웅크리고 살아가는 시대, 깊이 생각할 뿌리조차 말라 버려, 사색의 공간조차 없는 시대, 어른과 아이까지 남아 도는 유희마저 없는 시대, 그나마 통나무가 되어 도끼 옆에 놓여 있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젠 옆에 놓여 있는 도끼를 두려워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손바닥의 침 뱉는 든든한 도끼로 신실하게 믿음직하게 동반자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뭔가 짧아진 시대, 뭔가 조급한 시대, 뭔가 쫓기는 시대, 뭔가 불안한 시대, 뭔가 메마른 시대, 이 시대를 극복해내는 길, 힘, 방향은 없을까.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진취적이고, 평화롭고, 활기찬 시대가 도래하기를 소망해 본다. 

 

조간을 사서 드는/

한여름의 푸른 서울/

그 하늘 위로 한 점 흰 구름이/

핑퐁알처럼 가볍게 떠오르더니/

갑자기 커지면서/

요즘 국제극장에서 바라본 공룡의 얼굴로 뒤집혔다//

나는 그때 고속도로 연변/

푸른 풀밭에 누워/

앞으로 나아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갑자기 외신에서 쏟아지는/

검은 소낙비를 머리에 쓰고/

나는 어느새 닉슨의 처마 밑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생쥐처럼 젖은/

한국인의 내 어깨를 툭툭 털며/

나는 어느새/

오랜 우기로 접어드는/

서울의 뿌연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 [한여름 밤의 꿈]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수록된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어두운 시대의 한 면을 바라보고 있다. 조간을 펴서 읽는 순간, 휘몰려 오는 이상한 기류. 한여름의 푸른 서울, 그 하늘 위로 한 점 흰 구름이 떠오른다. 그 구름은 갑자기 커지면서 공룡의 얼굴이 되어 뒤덮는다. 마치 극장에서 만난 그 장면 같다. 시적 화자는 고속도로 연변 푸른 풀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갑자기 쏟아지는 불길한 외신 소식,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그 소낙비를 머리에 쓰고, 닉슨의 처마 밑에 엉거주춤 서서 검은 소낙비를 피한다. 생쥐처럼 젖은 한국인들의 어깨, 시적 화자는 그 어깨를 툭툭 턴다. 어느새 국제 정세는 오랜 우기로 접어든 상태, 그건 서울의 하늘을 뿌연 연기로 뒤덮고 있다. 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무겁고 착찹하다. 미래 정세가 불투명하고, 불안하고, 어둡다. 이를 뚫고 나아가야 할 비책은 없을까. 자아 탐구에만 몰입해 있지 않고, 좀더 큰 시야를 열어, 국제 정세까지 내다보는 시적 화자의 자세, 마음, 내면이 공감이 되고, 슬그머니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회, 국제 정세까지 가슴에 안아, 공감대를 갖고 기도해 주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엿보여, 숙연해지기도 한다. 

 

한 해의 육체를/

우리는 팔월까지 다 써 버리고/

이제는 영혼의 절반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가을이 아직은/

오지 않지만/

두고 온 쪽빛 먼 바다엔/

구름들이 바캉스를 떠나며/

흰 손수건을 바람에 흔든다//

가을이 아직은/

오지 않지만/

검은 살갗 검은 눈으로 바라보면/

파란 하늘 저쪽/

다정한 벗들의 흰 얼굴이 떠오른다//

가을이 아직은/

오지 않지만/

한결 고요해진 달빛 위에/

초저녁 쓰르라미 첫 울음을 얹으면/

일년의 저울추는/

햇빛에서/

그늘로/

잔에서/

잔의 탄식으로/

조금씩 기울어져 간다.///

 - [가을이 아직은 오지 않지만]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발표된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가을이 오기 전 여름 끝자락에서 사색하고 있다. 팔월까지 다 써 버린 여름, 이젠 영혼의 절반만이 남아 있다. 아직 가을은 오지 않았으나, 쪽빛 바다엔 구름들이 바캉스를 떠나며 흰 손수건을 바람에 흔들고 있다. 또, 검은 살갗 검은 눈으로 바라보니 파란 하늘 저쪽에 다정한 벗들의 흰 얼굴이 떠오른다. 또, 한결 고요해진 달빛 위에 귀또리 울음이 들려온다. 그러는 사이에, 한해의 저울추는 햇빛에서 그늘로, 잔에서 잔의 탄식으로 조금씩 기울어져 가고 있다. 여름 끝자락, 초가을 초저녁의 정경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 구현을 통해, 계절의 느낌과 촉감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다채로운 감성의 세계를 포착하는 시, 이 시가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 있다. 이미지 구현을 통해 시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형상화하는 시인의 솜씨가 멋지다.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 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가을] 전문 

 

 1974년에 발간된 [김현승 시선집]에 실려 있는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봄과 가을을 비교 분석해내고 있다.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인다. 그에 비해 가을은 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봄은 꽃잎을 이겨 살을 빚지만, 가을은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봄은 눈동자 먼 계절이지만, 가을은 입술을 다문 계절이다. 봄은 언어 가운데 너의 노래를 고르지만, 가을은 너의 노래를 헤치고 나의 언어 뼈마디를 고요한 밤에 고른다. 봄과 가을을 감각 이미지로 분별하면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시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독자에게 무수한 감성의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봄과 가을을 이미지로 구현해내고, 그 다채로운 감성의 세계를 낯설게 하기로 빚어낼 수 있는 시인, 그가 우리 곁에 있어서 참 행복하다. 우리가 외롭고 허무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이런 감성의 시들이 우리를 붙들어 주고, 이끌어 주고, 껴안아 주니, 어찌 고맙다 하지 않겠는가. 부디, 영원히 인류 곁에 시가 남아, 함께해 주기를 바란다. 함께해 주면서, 대화도 나눠 주고,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해 주고, 넘어질 때 끝까지 손잡아 이끌어 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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