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타2

박명자

작성자낭만대통령|작성시간26.06.10|조회수3 목록 댓글 0

[박명자 시인의 자서전] - 교정본

<생활 전선에 끼어들다>

초등학교 졸업 후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집안 살림은 올케언니가 했고 큰언니는 결혼했고,둘째 언니도 선을 봤다.
나와 내 위 언니는 서로 조카들을 업고 놀러 다니려고 싸우곤 했다.
집안일은 올케언니가 도맡아 꾸려 갔다.
그러던 차에 전남방직에서 직원을 모집한다고 우리 동네 친구들이 응시하러 가자고 했다.
다른 친구는 회사 간부 집에서 애 봐주고 1~2년 있다가 근무하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친구는 중학교 졸업 후 응시했는데 나는 1차로 합격해서 그달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자취를 했다.
그 후 기숙사 들어가서는 생활이 편했다.
큰 식당에서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에 식사를 못하면 밖에 나가서 사먹야만 했다.
방에서도 방장이 있고 사물함도 벽에 부착이 돼 있어서 열쇠로 관리를 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은 스피커로 항상 말을 하였다.
청소며 모든 걸 밤 9시까지 하고 기숙사에도 밤 9시까지 돌아와야 했다.  
규율이 아주 엄격했다.
목욕탕, 독서실, 세탁실 두루 편하게 갖추어져 생활이 편했다.
주로 3교대로 이루어졌고 항상 일하는 곳은 더웠다.
방직과에서 일하기에 온도가 안 맞으면 실이 끊어지기에 온도가 높았나 보다.
나는 금방 진급이 되었다. 몸이 빨라 일을 잘 했다.
조장 언니한테도 이쁨을 받았다. 그리고 기숙사 방에서도 방장이 빨리 됐다.
방장은 청소 같은 걸 안 하고 7~8명으로 구성된 인원의 책임자로 책임도 컸다.
제일로 하기 싫은 심야 작업은 새벽 1시부터다.
기계가 24시간 가동하기에 무슨 동은 낮시간 다 정해져 있어 생활은 편했다.
나는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 지금의 광주역 근방에 있는 동양종합학원에 입학해서 영어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며 졸업했다.
정화영 원장 선생님은 우등상을 주면서 꾸준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요일이면 친구들하고 근거리 여행도 다니면서 즐겁게 지냈다.
언제나 25일이면 월급이 나오니까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리고 매월 저축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집에 필요한 것도 사다 주곤 했다.
약 5년 동안 결혼 자금을 마련했다.
친구 소개로 정미소 하는 남자 친구를 소개받고 몇 번 만났다. 외모는 건장하고 괜찮았는데 장남에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살림을 꾸리신다고 했다. 동생들은 많고 해서 송정리 사는 고모님이 알아보시고 고생 구덩이로 들어간다고 못 만나게 해서 헤어졌다. 그 남자는 회사 앞 빵집에서 만났던 장소에 몇 번을 와서 기다리다 갔다고 했다.
마음은 안 쓰러웠지만 꾹 참고 안 만났다.
또 한 번은 대구 청구대학생과 펜팔을 했다.
1960년 경에는 펜팔들을 했다.
주고 받고 마음이 통했는지 하루는 그 학생이 대구에서 주소 가지고 나를 만나러 왔다.
외모에서 낙점이었다. 키가 작았다. 금남로 다방에서 애기하고 저녁 먹고 내가 대접 후 대구로 보냈다.
안 가려고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몇 시간 있다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한참을 설득시켰다.
우선 맘에 안 드니까 달래서 보냈다. 그리고 편지가 왔는데 답장을 안 했다.
눈치를 챘는지 그 뒤로 서너 번 오더니 단념했다.
그 학생이 하는 말 < 기다림이란 참기 어려운 수양이라고> 이 말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가 있으니 회사를 퇴직하고 차분히 결혼 상대를 만나야겠기에 사표를 썼다.

<나의 신랑감을 만나다>

저축해 놓은 돈은 결혼 자금으로 넉넉했다.
중매로  나이가 6살 위인 내 남편을 만났다.
다방에서 만났는데 키가 큰 훤칠한 남자였다. 일단 외모에서 합격이다.
장남에다 서울 외삼촌 형님과 사업하다 안 되니까 집에 한 번 다녀가려고 내려왔다고 했다.
부모님은 나이도 있고 하니 일단은 선을 한 번 보라고 해서 나를 만나러 나왔다고 했다.
대화를 해 보니 무엇을 해도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그 순간 콩깍지가 씌었는지 집도 가난하고 직업도 없는데, 그런 사람을 그래도 끌려서 영화도 보고 밥도 먹으며 따라다녔다.
그때는 결혼할 조건으로 만났기에 진지했다.
양가에서는 혼기가 찾으니 결혼을 서둘렀다.
꽃잎에 나비가 날아왔다.
음력 춘삼월 드디어 한 가정이 새로이 태어났다.
시부모님은 쌀과 식품 가게를 하였다.
지금의 치평동이 크나큰 상무대였다.
포병, 헌병대, 기갑학교 등 김대중컨벤션 근처 호텔까지 전부 군 부대였다.
군인들을 보고 음식 장사에서부터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우리집은 장사는 그대로인데 식구는 늘어나고 내가 결혼하자 금방 아들 낳고 연년생으로 딸을 낳으니 경사 아닌 경사가 났다.
애들 아빠가 친구하고 한국 농어촌보라는 출판사업 동업을 했는데 자금만 들어가지 나오는 것은 없고 해서 나와버렸다.
또 친정 쪽 내 사촌오빠와 사료 사업을 했는데 그것도 손해만 봤다.
이래저래 가난은 악화됐다.
할 수 없이 시부모님이 가게를 우리 네 식구한테 물려주었다.
사업을 키우려면 자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내가 계모임 오야지가 돼서 곗돈으로 식품 도매업을 했다.
장사가 잘 됐다. 2년만에 많은 돈을 벌어 120평짜리 터가 넓은 집을 사서 시부모님께 드렸다.
그 집을 시부모님은 집세 받고 사셨다.
지금의 세정 아울렛 자리다.
금방 벌어서 땅 사고 논 사고 매년 매답했다.
가난을 너무 겪었기에 낭비라고는 없었다.
약 10년 만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큰아들 큰딸 속 썩이지 않고 공부를 잘 했다.
아들 재헌이는 3살로 말도 잘 못할 때 거리에 있는 간판 글자를 가르쳐주면 그 이튿날 그대로 대답을 해서 천재라고 소문이 났다.
우리 시동생도 결혼했다. 식구가 7식구로 늘었다. 나는 식구들 밥을 해주었다. 빨래하고 샘물도 우리하고 옆집 문화극장 세 사는 사람들하고 합동으로 쓰는 펌프질하는 샘이었다. 물을 길어다가 밥해 먹고 빨래는 문 밖에 있는 샘에서 했다. 물을 뿜어 받아서 나오면 깨끗한 물이 나왔다.
연탄불 옆에다 항아리를 묻고 물을 퍼다 부어 놓으면 한겨울에도 물이 미지근해 세수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연년생인 아들과 큰딸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웠다.
나는 시댁 식구들 뒷바라지를 했다.
큰시동생 장가 가고 미군 부대 다니면서 부모님을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또 그 아래 시동생도 간부 후보생 소위 계급 장교로 가게 되었다.
3남 1녀 중 막내 시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광주여고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부모님을 안 성가시게 했다. 시누 양반 만나서 지금은 광주에서 잘 살고 있다.
그런대로 우리 사업은 꾸준히 돈을 벌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의논하에 자식을 하나 더 놓았다.
그때는 아들을 바랬는데 딸을 낳아 많이 서운했다.
지금은 딸 둘에 아들 하나 1남 2녀가 좋은 거 같다.
사업도 번창하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커 주었다. 10년 터울로 막내딸을 키우면서 애들 뒷바라지에다 가게 보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때였다. 옆집에 참한 아주머니가 혼자 살았는데 막내딸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뒷바라지를 틈틈이 해줬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소식이 끊겼다.
가끔씩 나의 뇌를 두드린다. 보고 싶다고!
막내딸 3살 때 시부님이 돌아가셨다. 갑자기 쓰러져 조대 병원에 가니 뇌졸중이라 했다.
밤 9시를 못 넘기니 집으로 모시고 가라 해서 집에 와 돌아가셨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아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음력 10월 개를 키웠는데 개집 바람막이를 해 주다가 쓰러져서 병원으로 급히 갔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3살인 막내딸을 모르는 할머니한테 맡겼어도 집안에 큰일이 난 줄 알고 울지도 않고 할머니하고 잘 놀고 있었다.  
그때부터 착하고 기특했다.
그래서 사범대를 가서 대학 4년때 임용고시 합격했다.
그 해 최연소 합격자로 알고 있다.

<3남매 자랑>

지금까지 24년 후진 양성을 했지만 별 사고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잘 하고 있는 거 같다.
한 가지 흠이라면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를 누비다 보니 혼기를 놓쳐 아직 미혼이다.
항상 나의 마음은 뭔가 비워진 채 채워지지 않는다.
지금은 내 마음도 포기를 하니까 잘 견뎌내는 거 같다 가도 늘 가슴은 아려 온다.
하지만 막내딸이 영양제며 외출복이며 집안에 필요한 건 다 사다주기에 고맙다.
막내딸 어린 시절 쓰다 보니 순서가 바뀌어졌다.
아들 김재헌이는 자랑할 게 너무 많다.
기어다닐 때부터 밥상 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라고 조부모님이 말하면 절대 안 올라갔다.
할머니가 거의 키우다시피 하였다.
돌 전에는 엄마가 화장실 갔다 올게 여기 있어 하면 올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3살 때는 나들이 가면서 상가에 간판을 가르쳐 주면 그 다음날 잊지 않고 그대로 읽었다.
5살 때부터는 암산으로 천 단위까지 알아맞혔다. 손을 뒤로 하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이다.
유치원도 안 보내고 만 6세에 상무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아이들 3남매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는 항상 전교 1~2등을 했다. 그런데 체구가 날 닮아서 키가 적어 반장을 안 하려 했지만 워낙 공부를 잘 하니 우격 다짐으로 반장을 맡았다.
중학교 때부터 전남 중학교 영수경시대회를 대표로 나가서 금은상을 받았다.  
한번은 수학 선생님이 밥 사 먹이고 떨지 말라고 우황 청심환도 사 주었다.
나는 일 때문에 한 번도 따라가지 못하고 과목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었다.
전남북 제주도까지 합쳐서 60명 선발하는 과학고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과학고에서도 대표로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금상을 받았다.
고2때 전두환정권이 과학기술대라는 학교를 충남대덕 단지에 세웠다.
우리 아이 학교 전교생이 거의 2학년 때 대학을 합격해서 우리 나이 17세에 대학생이 되었다.
수영장까지 갖춘 영재들만 모인 학교라 기숙사며 식당, 당구장까지 잘 갖추어진 학교다.
대학 가서 사춘기가 있었는지 수학이 뛰어난 아들을 지도교수가 자기 밑에 두려 했는데 늦잠 자고 당구 치고 했다고 지도교수가 우리 내외한테 일러바쳤다.
과기대에서 석사 마치고 박사 학위는 서울대에서 받았다.
그때 유학길이 있었는데 기회를 놓치고 후회를 했다.
지금은 나이가 곧 정년할 때다. E.T.R.I 정보통신 연구소에서 지금 나왔다.
그곳은 한국전자통신 연구소다.
며느리는 회계사다. 3남매 낳아 잘 키우고 있다.
나의 큰딸 이야기가 남아 있다.
유년 시절부터 오빠한테 치어서 빛을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 반 꾸미는 일은 큰딸 은희가 꾸몄다.
붓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연년생인 오빠가 워낙 잘하니 아들한테만 신경을 썼더니, 4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은희도 공부며 그림이며 우등생이니 뒷바라지를 좀 해주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았다.
애당초 미대를 안 보내려고 신경을 안 썼는데 중3 때 신문 광고란에 나폴레옹을 그대로 그려냈다.
옆집에 미대생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상담을 했는데 재능이 아주 많다고 해서 연합고사 마치고부터 미술학원에 보냈다. 그때부터 저도 고생 나도 고생이었다. 수업 끝나고 도시락을 3개씩 싸가지고 다니면서 금남로에 있는 학원 가서 막차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밤 12시가 다 됐다.
3년 동안 아프지 않고 잘 견뎌냈다.
서울에 있는 홍대나 중앙대 간다고 밤새도록 울었는데 그림은 학교가 무슨 대수냐며 우리 내외가 설득해서 전남대 서양학과를 나왔다.
지금은 서울에서 개인전 16회, 삼성동에 있는 코엑스에서 1년에 전시회를 몇 번씩 한다.
촌놈이 서울 사람들 제치고 잘 하고 있다.
직선을 못 가고 곡선으로 돌아서 고생과 무시도 있었지만 묵묵히 견뎌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작품이 3점이나 소장돼 있다.
작년에는 서울 경찰청에서 전시회가 있었고 금년 8월에는 인천공항에서 전시회를 열어준다고 한다.
그림 값도 꽤 비싸다. 결혼 기간이 빠져서 두서 없이 진행했다. 학교 교사로도 5년 정도 했다.
사위가 현대자동차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아 큰 꿈을 안고 교사직을 사표 쓰고 몇 년 동안은 딸 낳아서 키웠다. 사위가 미국 미시칸주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미국서 3년 살다 왔었다.
우리 외손녀 박지담은 유년 시절에 미국 갔는데 지금은 대학 졸업하고 화장품 무역회사에 교수님 추천으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영어를 잘해서 상사들 영어 알바까지 하고 있어 다행이다.
어릴 적 미국 갔던 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과목은 못해도 ㅇㅇ어는 언제나 잘 했다.
큰딸 김은희 작가는 자신이 유명해지려고 애도 딸 하나만 낳고 마감을 했다.
손녀딸 박지담이 엄마, 동생 하나 낳아주면 키우겠다고 졸라댔지만 지담이 하나만 키웠다.
서울에서 자식 하나 키우려면 많은 투자를 해야기에 둘째를 안 낳았지 않을까 싶다.  
영어를 잘 하는 이유도 고3 때까지 비싼 영어 학원을 보내고 대학 가서도 미국으로 교환학생 갈 때 목돈 천만원 넘게 들어 내가 5백만원 도와줬다.
또 농림식품부에서 인턴사원으로 6개월간 뽑는데 합격해서 대학 시절을 보람 되게 잘 보내서 무역회사에 갔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손녀는 바빠서 못 오고 할머니 바르라고 화장품은 넉넉히 보내온다.
고맙다고 톡 보내면 앞으로 화장품은 제가 보낼 테니 잘 쓰시고 할머니 곱게 늙으시라고 말한다.
고맙다.

<나의 결혼생활>

내 나이 30세쯤 됐을 때다. 아들과 큰딸이 5세 4세쯤 됐을 때 세상이 너무 싫어졌다.
남편은 하는 일이 잘 안되니 항상 음주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린 애들은 아프면 병원도 가야 하고 나의 비상금도 바닥이 나고 세상을 이렇게 살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운천저수지, 그때는 맑은 물이 철철 넘치면서 수심도 깊어 해년마다 자살자가 나왔다.
나 또한 어느 날 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우리집에서 500미터도 안 된 운천 저수지에 밤에 혼자 올라갔었다. 한 바퀴 도는데 무서움증이 확 
들어 걸을 수가 없었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이 둑 주변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앞으로 이보다 더한 불행이 닥친다 해도 내 자식 내 남편 위해서 헤쳐나가자,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집으로 향했다.
마음을 새로이 고쳐 먹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후로 부모님께서 사업체를 물려주시고 전셋집을 따로 나가셨다. 사업 자금은 계장을 해서 곗돈으로 식품 도매업을 시작했다. 운이 돌아 왔는지 상무대 정문으로 출입이 가능한 민간 업체들이 각 부대마다 식당들 출입증을 제시하고 부대를 들락거리면서 장사를 했다.
정문 출입이 불가능해지고 남문 출입이 가능했다.
남문을 가는 길에 우리 가게가 있어서 거의 다 우리 집에서 물건을 싣고 가서 장사를 하고 밤에 퇴근시에 물건값을 갚고 해서 우리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10년 동안 꾸준히 사업을 하니까 집도, 논도, 땅도 매년 매답했다.
애들은 공부를 잘하고 해서 노산에 막내딸을 더 낳았다.
4월 달에 출산하고 그해 5.18이 터졌다.
하지만 군부대 상무대는 화정동에서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교통을 막았기에 이쪽 상무동 쪽은 아무 일이 없었다.
교통이 통제되니 우리 가게는 물건이 없어 못 팔았다. 라면 음료수 등 물건을 하나라도 더 가져다 팔려고 아수라장이었다.
인생은 살면서 운이 따라다닌다고 믿고 싶다.
운이 있어서 이루어졌지 싶다.
열심히 억척스럽게 살다보니 내 몸이 많이 아팠다.
허리, 팔, 다리를 너무 무리해서 내 몸이 70인데 100을 썼기에 아팠을 게다.
그때는 세탁기도 없기에 손 빨래를 하던 시절이다.
팔이 아파서 빨래를 못 할 정도라 내 위 셋째 언니가 와서 도와준 거 같다.
금팔찌를 팔아서 원광대 한방병원을 다니면서 약 먹고 침 맞으면서 꾸준히 치료하면서 사업을 접었다.
삶의 무게가 나의 어깨를 짓누를 때 하늘을 우러러 언제 60을 넘을까, 그 나이 되면 애들 뒷바라지가 끝날 것 같기에 한탄한 적도 있었다.
내 몸이 아프니 무거운 것 못 들고 아끼니까 사업이 점점 쇠퇴해 갔다. 내 나이 50세에 가게 3칸을 세받고 사업을 접었다.
지금 세상은 열심히만 살면 일거리도 많고 몸 관리만 잘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의 창작 시 한 편 소개한다.

[장미의 속삭임]

-박명자

분홍 노을이 산들바람에
흔들릴 때
긴 침묵 지나
오월이 다시 웃는다
꽃들은 수줍게 얼굴 붉히고
카네이션은 감사의 말 대신하며
푸른 나무들은 하늘 향해
더 큰 꿈 펼쳐 올린다

어디를 걸어도 햇살 한줌
따사롭게 내려앉고
거리의 미소에도
초록빛 온기 번진다

서두르지 않는 새싹들의 시간 속에서
바쁘게 살아온 마음들에게 잠시 행복해도 괜찮다고
다정히 말해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