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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자 3

작성자낭만대통령|작성시간26.06.10|조회수3 목록 댓글 0

 

 

[제3장](자서전) - 교정본

 

- 박명자

우리가 사업할 때는 1년 내내 거의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음력 설날 하루 쉬었던 것 같다. 그러니 몸이 엉망이었다.
남편은 워낙히 건강하게 태어나서 감기 같은 것은 아예 접근도 안 했다.
나보다는 더 편했지 싶다.
나는 1인 3역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애들 학교 갈 준비를 하며 도시락 싸고
빨래도 손빨래를 하면서 가게 일까지 하면서 틈틈이 살림을 했다.
아침에 도시락 가지고 애들은 학교 가면 하루 종일 물건 구입하고
물건 팔고 잠깐이라도 낮잠을 잘 시간도 없었다.
남편은 소심해서 한꺼번에 물건 사러 몰려오면 처리를 잘 못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없으면 화부터 내니 싸움도 잦았다.
눈만 뜨면 똑같은 생활을 해 지겨울 때도 많았다. 큰아들 재헌과 큰딸 은희
10살 아래인 막내까지 공부들을 잘해서 내가 버티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매상도 많이 올라 가게도 윤택해졌다.
언젠가 잠을 자고 있는데 쓱싹쓱싹 쇠를 가는 소리가 났다.
남편은 잠귀가 밝아서 그 소릴 듣고 나를 깨웠다.
도둑이 들었다고? 남편이 몽둥이를 들고 뒷문으로 가니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도망을 가버리고 없었다.
남편 뒤따라 갈 적에 어찌나 떨리고 무섭던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또 한 번은 2층집 상가를 지었다. 2층이 당구장이었는데
세가 나가지 않아 잠깐 남편이 운영을 했었다.
하루는 새벽 2시쯤 피곤해서 방문을 안 잠그고 잠이 살짝 들었다.
누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서 눈을 감고 당신이야? 이제 끝났어? 하고 말을 하니 도둑이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왔다가 내가 잠을 안 자는 걸 알고 그냥 나가 버렸다.
그 후로 생각만 하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몇 일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업하면서 도둑 안 맞고 잘 지켜왔다.
사업은 근면 성실 절약하면 돈은 모아진다고 생각한다.
수입보다 지출이 적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항상 일찍 일어나고 늦게 문 닫고
휴식이라는 게 없으니 몸은 항상 피로에 젖어 있었다.
월급 받는 사람들은 그 당시 토요일 오전 근무만 했다.
지금처럼 토 일 휴무가 아니었다.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변해도 너무 달라졌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얼핏하면 노동법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점주들도 함부로 했다가는 큰코다친다. 민주주의 평등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세대들은 가난을 너무 알기에 지난 달력 한 장 
버리는 것도 아까워 언제 쓸지 모를 메모지로 쓰려고 다듬어 놓는다.
한 번 먹고 버리는 빈 상자도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너무 아깝다.
너무도 풍족한 세대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복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요즈음 AI시대는 직업이 한두 개 가지고는 안 되는거 같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 지 예측이 안 된다.  
우리 고3 학생들이 1시간에 풀어도 못 푸는 문제를 AI가 2분 만에 
풀어내니 앞으로 로봇이 인간을 앞지르면 어떤 변화가 올까, 두렵기까지 한다. 몇 년 전에도 바둑계에서 알파고가 승리했지 싶다.
이제는 짜장면 만드는 것도 AI가 하는데 초보자 연봉보다 훨씬 작다고 한다. 앞으로 대학도 AI학과가 생길 것 같다.
우리 인간이 로봇을 조종하려면 한 단계 앞질러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변화하는 시대에 학생들도 옛 방식대로 수업을 받을 게 아니라
창의력에 따르는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AI 선구자 일론 머스크의 이야기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안에 세상이 많이 바뀔 거라고 했다.
내 나이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변하는 세상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젊은 세대들은 참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자식들 사는 것만 보아도 상상을 초월한다
하기야 옛날 이야기 해 봐야 지금 세상과는 너무 다르기에 소통이 안 된다.
요즈음 세대들은 부지런만 하면 무엇을 한들 자기 앞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 60년대에는 열심히 살려고 해도 길이 없었다.
보릿고개 하면 젊은 층은 라면 끓여 먹지 한다. 65년부턴가 어느 회사로 기억이 안 나는데 라면이 출시가 돼서 그때는 내가 돈을 벌 때라 
라면 1박스를 집에 사 가지고 갔다. 우리 큰오빠 새참거리로 
안성맞춤이라고 동네에 자랑을 많이 했다. 여동생인 내가 동네에서 방방 떴다. 60년 전의 일이니 가물거린다.
지금은 라면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숫자 파악이 안 된다.
그후 70년대 중반 라면 1개에 23원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인플레가 되서 지금은 신라면 1개에 1000원 정도 한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것은 몇몇 대기업들이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화를 벌어들여 이렇게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세계 10위권 안에 든 잘 사는 나라 어디서든 조그만한 나라 대한민국 Korea를 외치다 보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오려 한다.
이 좋은 나라를 후손들에게 잘 물려줘서 영원토록 후손 대대로 잘 가꾸어 나갔음 하는 나의 바램이다.
그러려면 현재 손쉽게 쓰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봉지 등 환경보호에 적극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라도 1회용 생필품은 줄이도록 노력해야겠다.
옛날 젊었을 때 냉장고도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같이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기에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가난하고 냉장고가 없어서 그리고 기온이 높지 않아서 땅을 파고 김치독을 묻어 놓고 먹었나 보다.
땅속은 온도 변화가 거의 일정하다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50세에 사업을 접다>

나의 허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무거운 짐을 들 수 없어 사업을 그만두었다.
그전에 2층 상가를 지어서 이사했기에 장사를 하지 않아도 밥은 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상무대 군부대가 장성으로 옮겨 가서 그 넓은 부지는 광주시와 국방부에서 싸게 인수받아 아파트와 상가를 분양했다.
지명을 상무1동에서 치평동으로 바꾸면서 광주에서 제일 가는 중심지로 바뀌었다.
땅값이 뛰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졌다.
우리도 금호3단지 33평짜리 아파트 분양권을 받았다.
지하철이 들어 있어 상무역이 도보 5분 거리다. 그때 분양가가 등록세 취득세 합쳐서 9천8백만원에 분양받았다.
32년 전 일이다. 그동안 시모님이 돌아가시고 애들은 막내가 대학을 다녔는데 애들이 공부를 모두 잘해서 국립대학을 모두 장학생으로 다녔다.

아들 재헌이는 서울대 박사 과정을 알바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훌륭하게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보통신연구소로 취업을 했고 ETRI 한국전자 통신연구원으로 이직해서 잘 다니고 있다.
피아노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얼마나 잘 치는지 모른다.
몇 년 있으면 정년할 나이다.
우리 아들 재헌이는 17세에 과학고에 진학했다. 고2 때 전두환 정권에서 충남대덕 단지 내에 한국과학기술대학을 설립했다. 입학 과정이
중학교에서 1등한 애들을 선발해서 과학고 진학을 했다. 그때는 전남.전북.제주도 합쳐서 60명이었다. 광주과학고에 들어간 재헌이는 2학년 때 시험을 봐서 대학을 들어갔다.
학교에 들어간 모든 돈은 무료였다.
그런데 수학 전공 공부는 안 해도 A+을 받았는데 정작 관심이 많았던 물리학이 조금 부족해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너무 잘해주신 수학과 교수님 지금도 생각난다.
우리 아들을 그 교수님 밑에서 대학교수로 키우고 싶었다 한다.
우리 큰딸 김은희는 서양화가다.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학과를 졸업 후 지도교수의 소개로 갤러리에서 잠깐 개인 지도를 했다.
대학 시절 성적이 30프로 이내에 들면 교사 자격증을 줬다.
그후 임용교시에 합격하여 나주로 발령받아 4년 정도 교직에 근무할 때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사위를 만났다. 결혼 후 사위가 서울로 발령나서 그만두게 되었다.
사위가 현대자동차 미국 미시칸주에 있는 디트로이트자동차 주재원으로 갔다. 그때 내 나이 60대 초반이라 막내딸 방학을 맞아 둘이서 1개월간 미국 여행을 했다.
막내딸 김상선은 전남대 사범대 생물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전에 시험 삼아 인천시 임용고시에 응시하였는데 합격했다.
전국 최연소 합격자였다
23세에 발령받아 교직에 있으며 아직 미혼이다.
미국 여행을 잠깐 소개하자면 미국은 정말 큰 나라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거의 비행기를 타고 다녔다.
막내딸과 둘이서 여행을 하는데 성격이 안 맞았다. 나는 가이드 옆에 따라다니면서 메모도 하고 그러는데 막내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맨 꼴찌에서 항상 따라다녔다.
우리 일행 중에 캘리포니아에서 모녀가 함께 탑승했는데 딸이 의사라고 했다. 내 기가 살짝 죽었다.
우리 딸도 대학 졸업 전에 임용고시 합격해서 나도 자랑할 만했건만 대한민국 교포들도 어디를 가나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의 교포들이 많았다. 나는 시를 낭송했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시를 낭송했는데 막내딸이 무슨 시를 낭송하냐고 핀잔을 준 바람에 시를 읊다가 까먹었다.
그 뒤부터 막내딸하고 저기압 수준으로 여행을 했다. 오는 길에 가던 길에 했던 틀린 낭송이 아까워서 다시 시 낭송을 했다. 그 뒤부터 막내딸과 더 사이가 냉랭해졌다.
그때 낭송했던 시를 잠깐 소개하겠다. 이 시는 어느 신문 광고에 실렸다.

<행복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세월과 사이가 좋은 사람
가는 시간은 아쉽게 떠나 보내고
오는 시간은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아들 딸의 고향이라는 생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느냐며
누구에게나 한결 같은 사람

모두 
사이 간間 자가 붙은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
이 세 단어와 사이가 좋은 사람

세상에 갑자기 생긴 것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
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
사람은 혼자선 살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

손 잡을 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깨달은 사람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시를 2007년에 미국 여행지에서 낭송을 했다.
낱말 하나하나 새기며 읊은 것은 정이 쏙쏙 드는 단어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나 혼자서도 외워본다.

화가인 큰딸이 미국에 사는 동안 말은 안 통했지만 미국 작가들과 합동전시회도 하고 꾸준히 노력을 해왔다.
귀국하면서는 작업실을 마련해 지금까지 크고 작은 개인 전시회를 16회나 했고 국립현대 미술관에 작품이 3점이나 소장되어 있다.
2025년에는 경찰청에서 전시회를 열어주고 26년도에는 인천공항에서 전시회가 있다고 한다. 지방대 나와서 직선으로 갈 길을 곡선으로
가는 게 부모로서 미안하다. 하지만 본인이 꾸준하게 노력한 결과 서울에서 잘 나가고 있는 것 같다.
항상 건강 보살피면서 열심히 살기를 기도한다.
나의 50대에는 허리가 아팠는데 여기저기 운동요법과 한방병원을 병행하면서 꾸준히 치료하고 에어로빅과 시민운동장 돌기를 매일 했다.
에어로빅 운동을 20년 넘게 코로나 오기 전까지 열심히 했다.
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엉덩이 드는 운동 300번을 날마다 3년째 하니 허리가 많이 좋아졌다. 내 생활에서 불편이 없을 정도다.
사업을 접고 집에만 있으니 우리 동네 새마을 부녀회장직을 맡으라 해서 상무지구 개발할 때 상무1동 부녀회장직을 맡았다.
기억에 남는 한 대목 남길까 한다.
경남 거창에 있는 사과 농장에 봉사하러 서구 동 부녀회장들이 버스 대절해서 갔다. 우리가 점심까지 싸가지고 사과를 따주러 아침 6시에 출발했다.
오전 10시쯤 도착했다. 높은 산에 있는 사과밭이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1박스씩 사과가 열려 있었다.
사과나무가 낮고 옆으로 퍼져 있어서 사과를 누워서 땄다.
일을 할 때는 맘껏 사과를 먹으라 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사과를 1박스씩 가지고 온 기억이 난다.
큰 사과 상자에 1박스씩 따서 둘이씩 조를 이루어 사과를 고르는 기계가 있는 창고까지 운반하는데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이번에는 배꽃이 피었을 때다.  
조그만 가지에 배꽃이 피었는데 그 중에서 약 5송이 피었으면 2개정도 튼실하고 건강한 걸 남겨두고 3개는 따서 버려야 나중에 배가 커서
상품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 초보자한테는 빠른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광산구 동곡면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다음에 배추 뽑는 일 연탄 나르는 릴레이식으로 서서 날라 준 거 같다. 그래서 내무부 장관상 2번 우리 애들 상무초등학교 졸업 때 모범생이어서 그랬는지 장한 어머니상을 탔다. 또 전남 중학교에서 장한 어머니상 2번을 탔다.
봉사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봉사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을 적어볼까 한다.
지금의 농성동 상록회관 자리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젊은 세대들은 모를 거다. 10년 전만 해도 해마다 벛꽃이 피면 시내 한복판에 꽃잔치가 열렸다. 20년 전에 꽃잔치는 우리 서구 새마을회에서 10일 정도 음식 장사를 했다. 각 동 부녀 회장들이 총 출동해서 일찍 시장 봐서 준비하고 오후부터 식사와 술안주를 직접 만들어 팔았다.
판매 수입 돈주머니는 내가 차고 밤 12시에 장사를 끝내고 집에 오면 남편한테 좋은 소리도 못 들었다. 그후 조금 빠른 11시에 끝내고 들어가도 불만이 많았다. 항상 현금이 틀린 적은 없었다.
계산을 잘 하고 속이지 않고 양심껏 열심히 했기에 수익금이 그때 돈으로 1700만원 정도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광천동 부녀회장이 서구 회장직을 맡고 내가 부회장을 맡았다.
그 회장님은 사위 따라서 서산으로 갔다 들었는데 연락이 안 된다.
버스 타고 상록회관을 지날 때면 창문 너머로 그때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60대 초반의 젊음이 있었기에 그 많은 일들을 척척 해낸 거 같다.
그때 봉사하였던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지나고 보니 그때는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던 거 같다.
그 수익금은 연말 때 불우 이웃 돕기에 썼다.
동회장을 그만 둘 때 선물을 받았다.
우리집은 시부모님이 계셔 손님들이 많이 온다. 명절 때 음식해서 대접하려면 내 마음부터 바쁘다.
옛날에는 설날 쑥 말려 놓은 것으로 춥고 미끄러워도 쑥떡을 해야 했다.
쑥으로 인절미를 하면 맛있었다.
또 추석에는 송편을 만들었다. 지금도 송편은 내가 모싯잎 삶아서 송편을 빚는다. 모싯잎이 많이 들어갈수록 쫄깃쫄깃 맛있다.
내가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돌아다닐 수 있는 한 송편을 만들 것 같다. 애들에게 송편을 싸주고 싶다.
지금도 김장해서 배추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동치미 다 담아서 주곤 한다.
김치 냉장고 2대에 항상 김치는 준비되어 있다.
여름에는 줄기가 있는 상추를 밥 많이 갈아 짤박짤박 담아 놓으면 맛있다.
여름에는 열무 양파 짱아찌 오이 등 밑반찬을 해 놓으면 반찬 걱정이 없다. 나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주려고 한다. 자식한테도 내가 많이 베풀어주고 싶다. 그냥 보내면 서운해서 가벼운 야채는 자급자족한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배추 무를 심어서 사지 않고 김장을 했다. 작년 다르고 금년 달라 땅을 팔 수가 없어 씨앗 심기가 애매하다. 힘이 없어 삽질하기도 힘들다.
지금은 양파 수확해서 2일 말려서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자식들은 밭을 일구지 말란다. 행여 아플까 봐 걱정이다.
지금도 무리하면 무릎 옆의 힘줄이 힘들다. 손목의 관절이 일을 그만하란다. 그래야지 하면서도 밭에 가봐야 된다는 걱정이 든다.

<환갑을 맞이하다>

환갑 전에 아들과 두 딸을 결혼시켰다. 막내 딸까지 취업이 되고 환갑이 언제 돌아올까 한탄도 했는데 환갑을 맞이했다.
환갑 기념으로 우리 아들 내외가 유럽 여행을 15박 일정으로 보내주었다.
친구들하고 4월에 한 팀을 이루어 5백만원 정도를 내고 갔던 거 같다.
런던으로 가는 직항이 아닌 독일을 경유해서 갔다.
영국 호텔에 투숙 후 다음날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 여행지는 버킹검 궁전을 조지 3세가 사들여 새롭게 건축을 한 건물이었다. 아치 입구에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은 인상적이었고
왕족이 런던 거주지로 1993년에 대중에게 공개했다 한다.
버킹검 궁전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름 휴가 기간 8월 초부터 2달 동안 개방 근위병 교대식 광경을 볼 수 있다. 세계의 3대 박물관 중 가장 큰 대영박물관을 구경했다. 런던 시가지는 산이 없고 공원이 많으며 지붕 위의 굴뚝은 방을 표시해 놓은 거다. 굴뚝이 5개면 방이 5개라고
유럽 문화는 교회와 성당이 차지하고 집들도 거의가 100년 150년 됐어도 튼튼하다. 이곳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일본 여자와 살고 불행한 사람은 독일 여자와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런던 궁중에는 템즈강이 흐르고 있다.
다이애나비가 죽은 주택 뒤에는 꽃다발이 큰 차로 30대 분량 나왔다고 말했다. 템즈강 주변에 런던 시청은 번데기 모양으로 잘도 지어놓았다.
웅장함과 멋스러움 우아함 더불어 조상님들의 덕분으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 파리는 종교가 카톨릭이다. 언어는 불어를 쓰고 낭만과 예술의 나라 유럽의 자존심 패션으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루부르 박물관 최고의 바티칸 미술관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작품 다빈치의 모나리자 밀러의 비너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 네 마리의 말들을 조각한 카르젤 개선문도 볼거리로 좋았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서 유람선을 타러 세느강 주변 가로수들 시가지를 벗어나 노틀담성당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했다. 배를 1시간 20분 탔다. 노틀담 대성당 Notre Dame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를 위해서 지었다.
자연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동물들은 넓은 초원 위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런던과 파리 경계선
자연 풍광의 경이로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벨기에~ 브르쉘~ 세계 최초로 유화 물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브르쉘에는 불이 났을 때 60cm 소년이 오줌을 싸서 불을 꺼줘 브르쉘시를 지켰다는 동상이 있다. 시청사는 고딕 양식의 르네상스 양식
각종 화려한 건축들이 조화를 이루고 웅장한 건물들 사이에 성심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럽 나라는 거의 카톨릭 신자들의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
튜울립과 오렌지가 생각나는 나라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다.
예술성 재능이 많은 램브란트 반아이크 고흐 등의 대화가를 배출한 나라다.
공예도 뛰어난 나라다. 자원이 부족하고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지형적으로 어렵지만 근면성과 신뢰성을 겸비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세계대전에 참가한 전사자를 기리는 위령탑 주위에는 왕궁과 왁스 박물관 등 오래된 건물들의 명소가 있다. 중심지의 비둘기떼의 한가로움이 눈에 띤다.
부채살 모양의 운하 풍차마을의 크고 작은 풍차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고 긴 강변을 끼고 풍차 4대가 돌고 있다.
그 외에도 나막신과 치즈 공장 변덕스러운 날씨 도랑 건너 강물이 흐르고 공기가 맑은 히딩크 감독이 사는 나라다.
이곳 교회는 돈을 내고 예배를 본다. 무역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다.
재건축이란 없단다. 해저터널 28개 공원 29개 해저터널 둑을 막아서 만든 나라다. 낚시꾼도 면허를 따야 낚시할 수 있는 나라다.  
동.식물 보호협회가 있어 고사리 꺾다 잡히면 많은 벌금을 내고 산과 들은 포도밭이 전부다.

독일 수도 베를린
인구는 우리나라 약 2배 정도다.
맥주의 나라다. 예쁜 도시다 많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로
경제적 혼란을 겪었으나 자동차 화학산업을 기반으로 현재는 건실한 
경제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독일어가 공용어이나 영어도 함께 쓴다.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계적 문학가를 배출했다.
괴테와 쉴러 헤르만 헤세 등의 작가와 하이네 릴케 등의 시인도 배출했다.
또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전 세계 클레식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음악의 나라 바흐와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베토벤 등
세계 거장의 음악가가 모두 독일에서 나왔다.
퀼른 대성당의 웅장함에 압도 당하는 곳이다. 국제적 수준의 다양한 박람회를
개최하는 국제 산업도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아름다운 요정의 노래 Lorelei 언덕 라인강 오른쪽 기슭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 요정의 바위라는 뜻이다.
프랑크 푸르트 금융과 상업의 도시 독일 최대 공항이 있고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도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품을 남긴 괴테가 태어나 
대학 입학까지 16년 살았던 집을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독일은 유명 관광지가 많다. 하이델 베르크성 엣다리 로덴버그 
라인강 마인강 넷쯔강 등이 있다.
언덕진 야산에는 그림 같은 집들이 숲과 나무와 꽃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마을에서 비후스틱과 스프를 먹고 면세 백화점에 들러
휘슬러 밥솥과 쌍둥이칼 스텐 비누 등을 샀다.
현지 가이드를 보내고 로덴버그로 이동 중에 유료 화장실을 1유료에 3명씩 썼다.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베를린 차범근 선수가 운동했던 곳이다.
라인강은 흘러 네덜란드로 흐른다. 경찰이 없는 나라다. 법규를 어기면 
평생 운전 면허 취소다. 도로세가 없고 계절은 우리나라와 같다.
축복받은 나라다. GNP 약 3만불이다.
통일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서로 헐뜯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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