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민달팽이]
- 박덕은
달빛 한 줌 들어서기 비좁은 저녁을 밀면서 가고 있다
여름의 내륙으로 들어온 빗소리의 날들을 지나
축축한 비의 날개 떨어진 길을 온몸으로 밀면서 간다
방금 도착한 바람 소리 몇 낱 걸치고 느릿느릿 간다
둥근 곡선의 패각(貝殼)도 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몸을 숨길 패각이 없으니 아픔을 눕힐 곳도 마땅치 않다
패각을 버린 자유로움이 느릿느릿 길을 밀고 가 가뿐하다
한때 직장이라는 패각을 버리고 무작정 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
생계를 직장이라는 패각에 담고 생의 걸음을 걸어야 했지만
패각에 숨이 막혀 걸을 수가 없었다
지루함이라는 끈적한 점액질이 따라붙어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따끔거리는 가시광선 같은 반복은
낭만이라는 눈을 멀게 해 생기 없는 하루의 바닥을 기어가게 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사표를 낸 후
실업(失業)의 한낮과 우울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캄캄한 저녁을 이고 지나간 상춧잎은 커다랗게 구멍이 나 있다
잎에 서식한 초록의 시간은 비어 있고
텅 빈 문양 속으로 둥근 밤이 도착한다
상춧잎이 수확한 사각사각 소리를 자루에 담으면 족히 한 말쯤 될 성싶다
실업의 한낮을 가방에 쑤셔 넣고 무작정 바다로 향한다
패각을 버린 자유로움처럼 평일의 정오를 온몸으로 밀며 바닷가를 거닌다
중심을 세울 등뼈도 없이 어둡고 축축한 걸음으로 바닷가 거닌다
우울과 의기소침을 지우기 위해 걷고 또 걷는다
방향 잡을 때까지 청춘의 낮과 밤을 끈적끈적 밀며 나아간다
패각 같은 한낮의 집을 버린 밤이 느릿느릿 밀려들고 있다
밤은 사각사각 어둠을 갉아먹으며 흰 점액질 가득한 달빛 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