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7
[도래의 시간](시) - 교정본 B안
- 조휘문
겨울의 의도를 흘림체로 써 내려가며
날아간 가창오리 떼는
발자국 남겨 놓는다
예민한 붉음의 신호 체계 완성한
노을 지는 시간,
허공에 찍힌 발자국들
풍경 가득 아찔하게 피어나는 넋두리
누구의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중에 핀 수만 평의 소리꽃이 낙화하지 않도록
깃털 파고들던 바람을
발톱 아래 묻고 갔을까
나는
발톱을 힘껏 움켜쥔다
저수지는 풀려 홀로 맑아지고
추위에 민감한 물의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 내자
바람이 구름을 마음껏 풀어놓는다
자꾸 올려다보는
북쪽 하늘
나는 돌아올 바다 건너
내려올 기억들을 기다린다
낮과 밤과 철새에게 볼모로 잡힌
허공
움켜쥔다
색과 음을 흘리며 날아가는 방식으로
일가 이룬 새떼
파르르 물결 일으켜 강물 들어올리며 불그레 물드는 나래
술렁이는 서녘과 야릇한 거래를 하는
노을 끌어당겨
발끝 말아쥐고 당신 기다린다
가창오리 떼 울음소리가
저수지의 귀를 덮는다.
12/17
[생강나무 언어](시) - 교정본 B안
조휘문
구례 산동 지나 반곡 마을 고갯길에
눈매에서 생강 향기가 나는 누이가 산다
급조된 춘분春分을 공중에 풀어놓는
이른 봄, 오가는 인기척에도
톡 쏘는 유전자가 대대로 이식되어 온
꽃등을 부풀려 화르르 웃을 뿐
냉기 가시지 않는 꽃그늘처럼 누이는 입속에서
말을 틔우지 못했다
삼월의 내륙으로 웃음소리 들어와
아찔한 잔설의 날 지우는 망각의 힘으로
저 아랫마을 산수유꽃이 시절이었지만
노란 부리로 햇살을 물어온 새처럼
누이는 가지마다 제 속엣말 매달아 흔들었다
상처는
어떤 걸 증명하는 암호인지 모른다
피를 보이고 난 후에 제 향기를 내밀고
무릎 꺾인 채 처음으로 제 이름 밝히는 누이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폭설의 시간과
혹독한 불면의 밤으로 가슴 절반이 무너진
맨몸에 걸친 샛노란 꽃차례들이 진저리쳤다
전생의 한때가 스며들어 마른 울음으로 절뚝이는
그 알싸한 입김에 얼굴을 묻고
나는 해가 질 때까지 그 나무 아래서
감출 수 없는 감정의 미열이 엿보이는
누이의 노란 속엣말을 가만가만 듣고 있었다.
[양귀비 꽃밭에서ㅡ현충일](시) - 교정본
김영자
차라리 꺼지지 않는
생의 불꽃
잠의 신 '히프노스'는
죽음의 신에게
빨간 입맞춤 건넨다
묵언의 이야기
뒤척이는 슬픔 완독하기 위해
핏빛보다 더 붉게 피어난 사랑
꿈과 위로의 망각
지복의 기쁨이여
그 향기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뜨겁게 사랑하고 아파했던
첫 키스의 화살촉처럼 날카롭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끝없이 속삭이는
저 외로운 갈망의 목소리
천년의 기다림
타는 저녁놀 휘감아
이별의 진혼곡으로 흐른다.
*히프노스;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잠의 신
11/17
[나비의 탄식](시) - 교정본 B안
- 조휘문
사월의 발단과 따스한 정오의 전개가 뒤섞여
어제보다 한 옥타브 올라앉은 봄볕
친애하는 식물성의 이야기 풀어놓으며
발랄한 안과 밖의 경계 완성하기 위해
울타리 아래 장다리꽃이 박자를 짓는다
무의 생각과 감정으로 일체감 이룬
연보랏빛 꽃잎 속에
나비 한 마리 날개를 접을 때는
햇볕도 바람도 모른 체 눈을 감는다
이윽고
아랫배가 불룩한 나비
꽃독에 다치는 일 없이 두근거리는 중심 맴돌다가
흠뻑 젖은 한낮의 아우성 펼쳐
선율 그리며 허공을 날면
달아오른 대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어법에 맞게 생의 겨울을 다정하게 쓰지 못해
언 강의 속울음 같던 내 노래도
먼 하늘 아래
그 언덕을 향해 목청을 틔운다
빈손 뒷짐 지고
봄볕 아래 바장이는 나도
장다리 꽃밭을 맴도는 한 마리 나비일러라
하나하나의 생각마다 꽃불 질러놓은
그 언덕
아직도 나를 기다려
한 사람 마주 걸어오고 있을까
나는 자꾸 없는 날개를 휘젓고.
[나의 유년 시절](자서전) - 교정본
-박명자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에서 살았다. 부모님은 하우스와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 박재석과 어머니 김아기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빠 2명 언니 3명 그리고 아래로는 남동생 1명이 있다.
합하여 3남 4녀 7남매 중 나는 여섯 번째다.
어머니는 나를 39세에 낳았으니 지금 같으면 첫 애도 그 나이에 낳는 시대다.
그때는 노산이지만 나의 남동생은 42세에 낳았다.
딸을 4명 낳다가 내가 남자애 터 팔았다고 나를 더 예뻐하신 것 같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6.25가 일어났다. 우리 큰집은 동하 마을에서 대밭도 넓고 사랑채 안채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집터가 아주 넓어서 총소리가 쾅쾅 나면 무서워서 큰집 대나무 밑으로 언니와 큰집 조카들이랑 조용히 숨은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입학 시기에 두 살 위인 언니와 함께 입학을 했다.
그때 전쟁이 터져 언니는 입학 시기를 놓쳤기에 나와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선생님은 우리 자매가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합반을 함께 해준 적은 없었다.
언니도 공부를 잘 했다.
1반 2반밖에 없었지만 1반은 71명, 2반은 75명정도 되었다.
교실이 없어 천막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비가 오면 다라이를 가져다가 빗물을 받아냈다.
그리고 오전반 오후반을 오가며 책가방도 없이 보자기에 책을 돌돌 말아서 허리춤에 묶고 달음질을 했다. 달리다 보면 양은으로 만든 필통에서는 연필심 부러지지 말라고 제재소에서 나뭇가루를 담아 필통 속에 넣어도 연필은 부러져 있었다.
비가 올 때는 지푸라기로 엮은 등받이 같은 걸로 둘러쓰고 약 11km 떨어진 학교에 갔다.
그 몰골로 천막 교실의 바닥은 흙에다 빗물이 고인데는 질퍽거리고 행여 바닥에 도구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히 행동했다.
그래도 친구들과는 재미있어서 소곤소곤 깔깔대다가 반장한테 들키면 책받침으로 머리통을 맞기도 했다.
지금도 나의 모교는 세하동에 송학초등학교로 후진 양성을 잘 하고 있다.
또 그때는 사친회비를 안 가져가면 점심 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
부모님들은 들에 나가 안 계신데도 돌려보냈다.
사친회비 밀린 사람 가져오라고 그러면 할 수 없이 집에 갔다.
빈털터리로 돌아와서 선생님과 눈을 못 맞추었다.
우선 배고픔 해결이 1순위이니까 어머니가 품앗이 일을 가면 점심 때는 졸랑졸랑 어머니 옆에서 밥을 얻어먹던 시절이었다.
200평 논 1마지기에 쌀 2가마 수확하는 시절이라 보릿고개를 겪고 6.25를 겪고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며 살았다.
보릿고개란 작년에 농사 지은 쌀은 떨어지고 보리 타작은 아직 이르고 하니 덜 익은 보리를 끊어다 도구통에 찧어서 보리죽을 끓여 먹은 것이다.
나도 어려서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어린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다. 배고픔이 풀린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대 외국에서 통일벼를 수입해다 심어서 논 200평당 쌀 7~8가마가 나왔으니 얼마나 배가 불렀겠는가.
그래서 식생활이 해결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태어나서 결혼 때까지 내가 살던 우리 마을은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연꽃 속 정각이 3곳이나 자리 잡고 있었다.
옛날에 성춘향전 영화도 촬영한 곳이다. 지금도 구름다리도 있고 경관이 좋아 서구 세화동에 만귀정이라고 문화재로 지정돼서 더 유명해진것 같다.
봄이면 학교 소풍 장소로도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동네가 변해서 입구부터 궁궐 같은 까페가 자리를 차지하고 주말이면 인파로 꽉 차 있다.
오랫동안 거주하던 동네 분들은 늙고 아프고 돌아가셨다.
나의 친정도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지는 50년이 됐다.
큰오빠 내외분도 돌아가신 지가 6~7년 됐나 싶다.
내가 키운 조카도 70이 된 것 같다.
도시 사람들이 외곽지역으로 땅을 사서 땅 값도 비싸고 집들도 삐까 번쩍 지어서 많이 변했다.
내가 어렸을 적 쏘다니던 오솔길 같은 골목길은 없고 차가 다닐 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장학금이 없던 시절이라 중학교는 아예 꿈도 못 꾸었다.
또한 1년에 1번씩 공동 우물을 친구들과 함께 샘물을 퍼서 버리고 샘 속에 들어가서 깨끗이 청소했다. 다음날 아침이면 맑은 물이 철철 흘러 넘쳤다.
청소한 보람이 있어 동네 어른들한테 칭찬을 많이 받았다.
[박명자 시인의 자서전] - 교정본
<생활 전선에 끼어들다>
초등학교 졸업 후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집안 살림은 올케언니가 했고 큰언니는 결혼했고,둘째 언니도 선을 봤다.
나와 내 위 언니는 서로 조카들을 업고 놀러 다니려고 싸우곤 했다.
집안일은 올케언니가 도맡아 꾸려 갔다.
그러던 차에 전남방직에서 직원을 모집한다고 우리 동네 친구들이 응시하러 가자고 했다.
다른 친구는 회사 간부 집에서 애 봐주고 1~2년 있다가 근무하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친구는 중학교 졸업 후 응시했는데 나는 1차로 합격해서 그달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자취를 했다.
그 후 기숙사 들어가서는 생활이 편했다.
큰 식당에서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에 식사를 못하면 밖에 나가서 사먹야만 했다.
방에서도 방장이 있고 사물함도 벽에 부착이 돼 있어서 열쇠로 관리를 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은 스피커로 항상 말을 하였다.
청소며 모든 걸 밤 9시까지 하고 기숙사에도 밤 9시까지 돌아와야 했다.
규율이 아주 엄격했다.
목욕탕, 독서실, 세탁실 두루 편하게 갖추어져 생활이 편했다.
주로 3교대로 이루어졌고 항상 일하는 곳은 더웠다.
방직과에서 일하기에 온도가 안 맞으면 실이 끊어지기에 온도가 높았나 보다.
나는 금방 진급이 되었다. 몸이 빨라 일을 잘 했다.
조장 언니한테도 이쁨을 받았다. 그리고 기숙사 방에서도 방장이 빨리 됐다.
방장은 청소 같은 걸 안 하고 7~8명으로 구성된 인원의 책임자로 책임도 컸다.
제일로 하기 싫은 심야 작업은 새벽 1시부터다.
기계가 24시간 가동하기에 무슨 동은 낮시간 다 정해져 있어 생활은 편했다.
나는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 지금의 광주역 근방에 있는 동양종합학원에 입학해서 영어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며 졸업했다.
정화영 원장 선생님은 우등상을 주면서 꾸준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요일이면 친구들하고 근거리 여행도 다니면서 즐겁게 지냈다.
언제나 25일이면 월급이 나오니까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리고 매월 저축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집에 필요한 것도 사다 주곤 했다.
약 5년 동안 결혼 자금을 마련했다.
친구 소개로 정미소 하는 남자 친구를 소개받고 몇 번 만났다. 외모는 건장하고 괜찮았는데 장남에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살림을 꾸리신다고 했다. 동생들은 많고 해서 송정리 사는 고모님이 알아보시고 고생 구덩이로 들어간다고 못 만나게 해서 헤어졌다. 그 남자는 회사 앞 빵집에서 만났던 장소에 몇 번을 와서 기다리다 갔다고 했다.
마음은 안 쓰러웠지만 꾹 참고 안 만났다.
또 한 번은 대구 청구대학생과 펜팔을 했다.
1960년 경에는 펜팔들을 했다.
주고 받고 마음이 통했는지 하루는 그 학생이 대구에서 주소 가지고 나를 만나러 왔다.
외모에서 낙점이었다. 키가 작았다. 금남로 다방에서 애기하고 저녁 먹고 내가 대접 후 대구로 보냈다.
안 가려고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몇 시간 있다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한참을 설득시켰다.
우선 맘에 안 드니까 달래서 보냈다. 그리고 편지가 왔는데 답장을 안 했다.
눈치를 챘는지 그 뒤로 서너 번 오더니 단념했다.
그 학생이 하는 말 < 기다림이란 참기 어려운 수양이라고> 이 말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가 있으니 회사를 퇴직하고 차분히 결혼 상대를 만나야겠기에 사표를 썼다.
<나의 신랑감을 만나다>
저축해 놓은 돈은 결혼 자금으로 넉넉했다.
중매로 나이가 6살 위인 내 남편을 만났다.
다방에서 만났는데 키가 큰 훤칠한 남자였다. 일단 외모에서 합격이다.
장남에다 서울 외삼촌 형님과 사업하다 안 되니까 집에 한 번 다녀가려고 내려왔다고 했다.
부모님은 나이도 있고 하니 일단은 선을 한 번 보라고 해서 나를 만나러 나왔다고 했다.
대화를 해 보니 무엇을 해도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그 순간 콩깍지가 씌었는지 집도 가난하고 직업도 없는데, 그런 사람을 그래도 끌려서 영화도 보고 밥도 먹으며 따라다녔다.
그때는 결혼할 조건으로 만났기에 진지했다.
양가에서는 혼기가 찾으니 결혼을 서둘렀다.
꽃잎에 나비가 날아왔다.
음력 춘삼월 드디어 한 가정이 새로이 태어났다.
시부모님은 쌀과 식품 가게를 하였다.
지금의 치평동이 크나큰 상무대였다.
포병, 헌병대, 기갑학교 등 김대중컨벤션 근처 호텔까지 전부 군 부대였다.
군인들을 보고 음식 장사에서부터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우리집은 장사는 그대로인데 식구는 늘어나고 내가 결혼하자 금방 아들 낳고 연년생으로 딸을 낳으니 경사 아닌 경사가 났다.
애들 아빠가 친구하고 한국 농어촌보라는 출판사업 동업을 했는데 자금만 들어가지 나오는 것은 없고 해서 나와버렸다.
또 친정 쪽 내 사촌오빠와 사료 사업을 했는데 그것도 손해만 봤다.
이래저래 가난은 악화됐다.
할 수 없이 시부모님이 가게를 우리 네 식구한테 물려주었다.
사업을 키우려면 자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내가 계모임 오야지가 돼서 곗돈으로 식품 도매업을 했다.
장사가 잘 됐다. 2년만에 많은 돈을 벌어 120평짜리 터가 넓은 집을 사서 시부모님께 드렸다.
그 집을 시부모님은 집세 받고 사셨다.
지금의 세정 아울렛 자리다.
금방 벌어서 땅 사고 논 사고 매년 매답했다.
가난을 너무 겪었기에 낭비라고는 없었다.
약 10년 만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큰아들 큰딸 속 썩이지 않고 공부를 잘 했다.
아들 재헌이는 3살로 말도 잘 못할 때 거리에 있는 간판 글자를 가르쳐주면 그 이튿날 그대로 대답을 해서 천재라고 소문이 났다.
우리 시동생도 결혼했다. 식구가 7식구로 늘었다. 나는 식구들 밥을 해주었다. 빨래하고 샘물도 우리하고 옆집 문화극장 세 사는 사람들하고 합동으로 쓰는 펌프질하는 샘이었다. 물을 길어다가 밥해 먹고 빨래는 문 밖에 있는 샘에서 했다. 물을 뿜어 받아서 나오면 깨끗한 물이 나왔다.
연탄불 옆에다 항아리를 묻고 물을 퍼다 부어 놓으면 한겨울에도 물이 미지근해 세수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연년생인 아들과 큰딸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웠다.
나는 시댁 식구들 뒷바라지를 했다.
큰시동생 장가 가고 미군 부대 다니면서 부모님을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또 그 아래 시동생도 간부 후보생 소위 계급 장교로 가게 되었다.
3남 1녀 중 막내 시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광주여고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며 부모님을 안 성가시게 했다. 시누 양반 만나서 지금은 광주에서 잘 살고 있다.
그런대로 우리 사업은 꾸준히 돈을 벌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의논하에 자식을 하나 더 놓았다.
그때는 아들을 바랬는데 딸을 낳아 많이 서운했다.
지금은 딸 둘에 아들 하나 1남 2녀가 좋은 거 같다.
사업도 번창하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커 주었다. 10년 터울로 막내딸을 키우면서 애들 뒷바라지에다 가게 보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때였다. 옆집에 참한 아주머니가 혼자 살았는데 막내딸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뒷바라지를 틈틈이 해줬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소식이 끊겼다.
가끔씩 나의 뇌를 두드린다. 보고 싶다고!
막내딸 3살 때 시부님이 돌아가셨다. 갑자기 쓰러져 조대 병원에 가니 뇌졸중이라 했다.
밤 9시를 못 넘기니 집으로 모시고 가라 해서 집에 와 돌아가셨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아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음력 10월 개를 키웠는데 개집 바람막이를 해 주다가 쓰러져서 병원으로 급히 갔으나 끝내 돌아가셨다.
3살인 막내딸을 모르는 할머니한테 맡겼어도 집안에 큰일이 난 줄 알고 울지도 않고 할머니하고 잘 놀고 있었다.
그때부터 착하고 기특했다.
그래서 사범대를 가서 대학 4년때 임용고시 합격했다.
그 해 최연소 합격자로 알고 있다.
<3남매 자랑>
지금까지 24년 후진 양성을 했지만 별 사고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잘 하고 있는 거 같다.
한 가지 흠이라면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를 누비다 보니 혼기를 놓쳐 아직 미혼이다.
항상 나의 마음은 뭔가 비워진 채 채워지지 않는다.
지금은 내 마음도 포기를 하니까 잘 견뎌내는 거 같다 가도 늘 가슴은 아려 온다.
하지만 막내딸이 영양제며 외출복이며 집안에 필요한 건 다 사다주기에 고맙다.
막내딸 어린 시절 쓰다 보니 순서가 바뀌어졌다.
아들 김재헌이는 자랑할 게 너무 많다.
기어다닐 때부터 밥상 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라고 조부모님이 말하면 절대 안 올라갔다.
할머니가 거의 키우다시피 하였다.
돌 전에는 엄마가 화장실 갔다 올게 여기 있어 하면 올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3살 때는 나들이 가면서 상가에 간판을 가르쳐 주면 그 다음날 잊지 않고 그대로 읽었다.
5살 때부터는 암산으로 천 단위까지 알아맞혔다. 손을 뒤로 하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이다.
유치원도 안 보내고 만 6세에 상무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아이들 3남매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는 항상 전교 1~2등을 했다. 그런데 체구가 날 닮아서 키가 적어 반장을 안 하려 했지만 워낙 공부를 잘 하니 우격 다짐으로 반장을 맡았다.
중학교 때부터 전남 중학교 영수경시대회를 대표로 나가서 금은상을 받았다.
한번은 수학 선생님이 밥 사 먹이고 떨지 말라고 우황 청심환도 사 주었다.
나는 일 때문에 한 번도 따라가지 못하고 과목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었다.
전남북 제주도까지 합쳐서 60명 선발하는 과학고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과학고에서도 대표로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금상을 받았다.
고2때 전두환정권이 과학기술대라는 학교를 충남대덕 단지에 세웠다.
우리 아이 학교 전교생이 거의 2학년 때 대학을 합격해서 우리 나이 17세에 대학생이 되었다.
수영장까지 갖춘 영재들만 모인 학교라 기숙사며 식당, 당구장까지 잘 갖추어진 학교다.
대학 가서 사춘기가 있었는지 수학이 뛰어난 아들을 지도교수가 자기 밑에 두려 했는데 늦잠 자고 당구 치고 했다고 지도교수가 우리 내외한테 일러바쳤다.
과기대에서 석사 마치고 박사 학위는 서울대에서 받았다.
그때 유학길이 있었는데 기회를 놓치고 후회를 했다.
지금은 나이가 곧 정년할 때다. E.T.R.I 정보통신 연구소에서 지금 나왔다.
그곳은 한국전자통신 연구소다.
며느리는 회계사다. 3남매 낳아 잘 키우고 있다.
나의 큰딸 이야기가 남아 있다.
유년 시절부터 오빠한테 치어서 빛을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 반 꾸미는 일은 큰딸 은희가 꾸몄다.
붓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연년생인 오빠가 워낙 잘하니 아들한테만 신경을 썼더니, 4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은희도 공부며 그림이며 우등생이니 뒷바라지를 좀 해주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았다.
애당초 미대를 안 보내려고 신경을 안 썼는데 중3 때 신문 광고란에 나폴레옹을 그대로 그려냈다.
옆집에 미대생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상담을 했는데 재능이 아주 많다고 해서 연합고사 마치고부터 미술학원에 보냈다. 그때부터 저도 고생 나도 고생이었다. 수업 끝나고 도시락을 3개씩 싸가지고 다니면서 금남로에 있는 학원 가서 막차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밤 12시가 다 됐다.
3년 동안 아프지 않고 잘 견뎌냈다.
서울에 있는 홍대나 중앙대 간다고 밤새도록 울었는데 그림은 학교가 무슨 대수냐며 우리 내외가 설득해서 전남대 서양학과를 나왔다.
지금은 서울에서 개인전 16회, 삼성동에 있는 코엑스에서 1년에 전시회를 몇 번씩 한다.
촌놈이 서울 사람들 제치고 잘 하고 있다.
직선을 못 가고 곡선으로 돌아서 고생과 무시도 있었지만 묵묵히 견뎌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작품이 3점이나 소장돼 있다.
작년에는 서울 경찰청에서 전시회가 있었고 금년 8월에는 인천공항에서 전시회를 열어준다고 한다.
그림 값도 꽤 비싸다. 결혼 기간이 빠져서 두서 없이 진행했다. 학교 교사로도 5년 정도 했다.
사위가 현대자동차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아 큰 꿈을 안고 교사직을 사표 쓰고 몇 년 동안은 딸 낳아서 키웠다. 사위가 미국 미시칸주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미국서 3년 살다 왔었다.
우리 외손녀 박지담은 유년 시절에 미국 갔는데 지금은 대학 졸업하고 화장품 무역회사에 교수님 추천으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영어를 잘해서 상사들 영어 알바까지 하고 있어 다행이다.
어릴 적 미국 갔던 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과목은 못해도 ㅇㅇ어는 언제나 잘 했다.
큰딸 김은희 작가는 자신이 유명해지려고 애도 딸 하나만 낳고 마감을 했다.
손녀딸 박지담이 엄마, 동생 하나 낳아주면 키우겠다고 졸라댔지만 지담이 하나만 키웠다.
서울에서 자식 하나 키우려면 많은 투자를 해야기에 둘째를 안 낳았지 않을까 싶다.
영어를 잘 하는 이유도 고3 때까지 비싼 영어 학원을 보내고 대학 가서도 미국으로 교환학생 갈 때 목돈 천만원 넘게 들어 내가 5백만원 도와줬다.
또 농림식품부에서 인턴사원으로 6개월간 뽑는데 합격해서 대학 시절을 보람 되게 잘 보내서 무역회사에 갔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손녀는 바빠서 못 오고 할머니 바르라고 화장품은 넉넉히 보내온다.
고맙다고 톡 보내면 앞으로 화장품은 제가 보낼 테니 잘 쓰시고 할머니 곱게 늙으시라고 말한다.
고맙다.
<나의 결혼생활>
내 나이 30세쯤 됐을 때다. 아들과 큰딸이 5세 4세쯤 됐을 때 세상이 너무 싫어졌다.
남편은 하는 일이 잘 안되니 항상 음주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린 애들은 아프면 병원도 가야 하고 나의 비상금도 바닥이 나고 세상을 이렇게 살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운천저수지, 그때는 맑은 물이 철철 넘치면서 수심도 깊어 해년마다 자살자가 나왔다.
나 또한 어느 날 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우리집에서 500미터도 안 된 운천 저수지에 밤에 혼자 올라갔었다. 한 바퀴 도는데 무서움증이 확
들어 걸을 수가 없었다.
소복 입은 처녀 귀신이 둑 주변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앞으로 이보다 더한 불행이 닥친다 해도 내 자식 내 남편 위해서 헤쳐나가자,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집으로 향했다.
마음을 새로이 고쳐 먹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후로 부모님께서 사업체를 물려주시고 전셋집을 따로 나가셨다. 사업 자금은 계장을 해서 곗돈으로 식품 도매업을 시작했다. 운이 돌아 왔는지 상무대 정문으로 출입이 가능한 민간 업체들이 각 부대마다 식당들 출입증을 제시하고 부대를 들락거리면서 장사를 했다.
정문 출입이 불가능해지고 남문 출입이 가능했다.
남문을 가는 길에 우리 가게가 있어서 거의 다 우리 집에서 물건을 싣고 가서 장사를 하고 밤에 퇴근시에 물건값을 갚고 해서 우리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10년 동안 꾸준히 사업을 하니까 집도, 논도, 땅도 매년 매답했다.
애들은 공부를 잘하고 해서 노산에 막내딸을 더 낳았다.
4월 달에 출산하고 그해 5.18이 터졌다.
하지만 군부대 상무대는 화정동에서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교통을 막았기에 이쪽 상무동 쪽은 아무 일이 없었다.
교통이 통제되니 우리 가게는 물건이 없어 못 팔았다. 라면 음료수 등 물건을 하나라도 더 가져다 팔려고 아수라장이었다.
인생은 살면서 운이 따라다닌다고 믿고 싶다.
운이 있어서 이루어졌지 싶다.
열심히 억척스럽게 살다보니 내 몸이 많이 아팠다.
허리, 팔, 다리를 너무 무리해서 내 몸이 70인데 100을 썼기에 아팠을 게다.
그때는 세탁기도 없기에 손 빨래를 하던 시절이다.
팔이 아파서 빨래를 못 할 정도라 내 위 셋째 언니가 와서 도와준 거 같다.
금팔찌를 팔아서 원광대 한방병원을 다니면서 약 먹고 침 맞으면서 꾸준히 치료하면서 사업을 접었다.
삶의 무게가 나의 어깨를 짓누를 때 하늘을 우러러 언제 60을 넘을까, 그 나이 되면 애들 뒷바라지가 끝날 것 같기에 한탄한 적도 있었다.
내 몸이 아프니 무거운 것 못 들고 아끼니까 사업이 점점 쇠퇴해 갔다. 내 나이 50세에 가게 3칸을 세받고 사업을 접었다.
지금 세상은 열심히만 살면 일거리도 많고 몸 관리만 잘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의 창작 시 한 편 소개한다.
[장미의 속삭임]
-박명자
분홍 노을이 산들바람에
흔들릴 때
긴 침묵 지나
오월이 다시 웃는다
꽃들은 수줍게 얼굴 붉히고
카네이션은 감사의 말 대신하며
푸른 나무들은 하늘 향해
더 큰 꿈 펼쳐 올린다
어디를 걸어도 햇살 한줌
따사롭게 내려앉고
거리의 미소에도
초록빛 온기 번진다
서두르지 않는 새싹들의 시간 속에서
바쁘게 살아온 마음들에게 잠시 행복해도 괜찮다고
다정히 말해준다.
[제3장](자서전) - 교정본
- 박명자
우리가 사업할 때는 1년 내내 거의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음력 설날 하루 쉬었던 것 같다. 그러니 몸이 엉망이었다.
남편은 워낙히 건강하게 태어나서 감기 같은 것은 아예 접근도 안 했다.
나보다는 더 편했지 싶다.
나는 1인 3역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애들 학교 갈 준비를 하며 도시락 싸고
빨래도 손빨래를 하면서 가게 일까지 하면서 틈틈이 살림을 했다.
아침에 도시락 가지고 애들은 학교 가면 하루 종일 물건 구입하고
물건 팔고 잠깐이라도 낮잠을 잘 시간도 없었다.
남편은 소심해서 한꺼번에 물건 사러 몰려오면 처리를 잘 못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없으면 화부터 내니 싸움도 잦았다.
눈만 뜨면 똑같은 생활을 해 지겨울 때도 많았다. 큰아들 재헌과 큰딸 은희
10살 아래인 막내까지 공부들을 잘해서 내가 버티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매상도 많이 올라 가게도 윤택해졌다.
언젠가 잠을 자고 있는데 쓱싹쓱싹 쇠를 가는 소리가 났다.
남편은 잠귀가 밝아서 그 소릴 듣고 나를 깨웠다.
도둑이 들었다고? 남편이 몽둥이를 들고 뒷문으로 가니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도망을 가버리고 없었다.
남편 뒤따라 갈 적에 어찌나 떨리고 무섭던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또 한 번은 2층집 상가를 지었다. 2층이 당구장이었는데
세가 나가지 않아 잠깐 남편이 운영을 했었다.
하루는 새벽 2시쯤 피곤해서 방문을 안 잠그고 잠이 살짝 들었다.
누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서 눈을 감고 당신이야? 이제 끝났어? 하고 말을 하니 도둑이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왔다가 내가 잠을 안 자는 걸 알고 그냥 나가 버렸다.
그 후로 생각만 하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몇 일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업하면서 도둑 안 맞고 잘 지켜왔다.
사업은 근면 성실 절약하면 돈은 모아진다고 생각한다.
수입보다 지출이 적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항상 일찍 일어나고 늦게 문 닫고
휴식이라는 게 없으니 몸은 항상 피로에 젖어 있었다.
월급 받는 사람들은 그 당시 토요일 오전 근무만 했다.
지금처럼 토 일 휴무가 아니었다.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변해도 너무 달라졌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얼핏하면 노동법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점주들도 함부로 했다가는 큰코다친다. 민주주의 평등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세대들은 가난을 너무 알기에 지난 달력 한 장
버리는 것도 아까워 언제 쓸지 모를 메모지로 쓰려고 다듬어 놓는다.
한 번 먹고 버리는 빈 상자도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너무 아깝다.
너무도 풍족한 세대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복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요즈음 AI시대는 직업이 한두 개 가지고는 안 되는거 같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 지 예측이 안 된다.
우리 고3 학생들이 1시간에 풀어도 못 푸는 문제를 AI가 2분 만에
풀어내니 앞으로 로봇이 인간을 앞지르면 어떤 변화가 올까, 두렵기까지 한다. 몇 년 전에도 바둑계에서 알파고가 승리했지 싶다.
이제는 짜장면 만드는 것도 AI가 하는데 초보자 연봉보다 훨씬 작다고 한다. 앞으로 대학도 AI학과가 생길 것 같다.
우리 인간이 로봇을 조종하려면 한 단계 앞질러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변화하는 시대에 학생들도 옛 방식대로 수업을 받을 게 아니라
창의력에 따르는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AI 선구자 일론 머스크의 이야기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안에 세상이 많이 바뀔 거라고 했다.
내 나이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변하는 세상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젊은 세대들은 참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자식들 사는 것만 보아도 상상을 초월한다
하기야 옛날 이야기 해 봐야 지금 세상과는 너무 다르기에 소통이 안 된다.
요즈음 세대들은 부지런만 하면 무엇을 한들 자기 앞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 60년대에는 열심히 살려고 해도 길이 없었다.
보릿고개 하면 젊은 층은 라면 끓여 먹지 한다. 65년부턴가 어느 회사로 기억이 안 나는데 라면이 출시가 돼서 그때는 내가 돈을 벌 때라
라면 1박스를 집에 사 가지고 갔다. 우리 큰오빠 새참거리로
안성맞춤이라고 동네에 자랑을 많이 했다. 여동생인 내가 동네에서 방방 떴다. 60년 전의 일이니 가물거린다.
지금은 라면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숫자 파악이 안 된다.
그후 70년대 중반 라면 1개에 23원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인플레가 되서 지금은 신라면 1개에 1000원 정도 한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것은 몇몇 대기업들이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화를 벌어들여 이렇게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세계 10위권 안에 든 잘 사는 나라 어디서든 조그만한 나라 대한민국 Korea를 외치다 보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오려 한다.
이 좋은 나라를 후손들에게 잘 물려줘서 영원토록 후손 대대로 잘 가꾸어 나갔음 하는 나의 바램이다.
그러려면 현재 손쉽게 쓰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봉지 등 환경보호에 적극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라도 1회용 생필품은 줄이도록 노력해야겠다.
옛날 젊었을 때 냉장고도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같이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기에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가난하고 냉장고가 없어서 그리고 기온이 높지 않아서 땅을 파고 김치독을 묻어 놓고 먹었나 보다.
땅속은 온도 변화가 거의 일정하다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50세에 사업을 접다>
나의 허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무거운 짐을 들 수 없어 사업을 그만두었다.
그전에 2층 상가를 지어서 이사했기에 장사를 하지 않아도 밥은 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상무대 군부대가 장성으로 옮겨 가서 그 넓은 부지는 광주시와 국방부에서 싸게 인수받아 아파트와 상가를 분양했다.
지명을 상무1동에서 치평동으로 바꾸면서 광주에서 제일 가는 중심지로 바뀌었다.
땅값이 뛰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졌다.
우리도 금호3단지 33평짜리 아파트 분양권을 받았다.
지하철이 들어 있어 상무역이 도보 5분 거리다. 그때 분양가가 등록세 취득세 합쳐서 9천8백만원에 분양받았다.
32년 전 일이다. 그동안 시모님이 돌아가시고 애들은 막내가 대학을 다녔는데 애들이 공부를 모두 잘해서 국립대학을 모두 장학생으로 다녔다.
아들 재헌이는 서울대 박사 과정을 알바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훌륭하게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보통신연구소로 취업을 했고 ETRI 한국전자 통신연구원으로 이직해서 잘 다니고 있다.
피아노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얼마나 잘 치는지 모른다.
몇 년 있으면 정년할 나이다.
우리 아들 재헌이는 17세에 과학고에 진학했다. 고2 때 전두환 정권에서 충남대덕 단지 내에 한국과학기술대학을 설립했다. 입학 과정이
중학교에서 1등한 애들을 선발해서 과학고 진학을 했다. 그때는 전남.전북.제주도 합쳐서 60명이었다. 광주과학고에 들어간 재헌이는 2학년 때 시험을 봐서 대학을 들어갔다.
학교에 들어간 모든 돈은 무료였다.
그런데 수학 전공 공부는 안 해도 A+을 받았는데 정작 관심이 많았던 물리학이 조금 부족해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너무 잘해주신 수학과 교수님 지금도 생각난다.
우리 아들을 그 교수님 밑에서 대학교수로 키우고 싶었다 한다.
우리 큰딸 김은희는 서양화가다.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학과를 졸업 후 지도교수의 소개로 갤러리에서 잠깐 개인 지도를 했다.
대학 시절 성적이 30프로 이내에 들면 교사 자격증을 줬다.
그후 임용교시에 합격하여 나주로 발령받아 4년 정도 교직에 근무할 때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사위를 만났다. 결혼 후 사위가 서울로 발령나서 그만두게 되었다.
사위가 현대자동차 미국 미시칸주에 있는 디트로이트자동차 주재원으로 갔다. 그때 내 나이 60대 초반이라 막내딸 방학을 맞아 둘이서 1개월간 미국 여행을 했다.
막내딸 김상선은 전남대 사범대 생물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전에 시험 삼아 인천시 임용고시에 응시하였는데 합격했다.
전국 최연소 합격자였다
23세에 발령받아 교직에 있으며 아직 미혼이다.
미국 여행을 잠깐 소개하자면 미국은 정말 큰 나라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거의 비행기를 타고 다녔다.
막내딸과 둘이서 여행을 하는데 성격이 안 맞았다. 나는 가이드 옆에 따라다니면서 메모도 하고 그러는데 막내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맨 꼴찌에서 항상 따라다녔다.
우리 일행 중에 캘리포니아에서 모녀가 함께 탑승했는데 딸이 의사라고 했다. 내 기가 살짝 죽었다.
우리 딸도 대학 졸업 전에 임용고시 합격해서 나도 자랑할 만했건만 대한민국 교포들도 어디를 가나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의 교포들이 많았다. 나는 시를 낭송했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시를 낭송했는데 막내딸이 무슨 시를 낭송하냐고 핀잔을 준 바람에 시를 읊다가 까먹었다.
그 뒤부터 막내딸하고 저기압 수준으로 여행을 했다. 오는 길에 가던 길에 했던 틀린 낭송이 아까워서 다시 시 낭송을 했다. 그 뒤부터 막내딸과 더 사이가 냉랭해졌다.
그때 낭송했던 시를 잠깐 소개하겠다. 이 시는 어느 신문 광고에 실렸다.
<행복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세월과 사이가 좋은 사람
가는 시간은 아쉽게 떠나 보내고
오는 시간은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아들 딸의 고향이라는 생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느냐며
누구에게나 한결 같은 사람
모두
사이 간間 자가 붙은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
이 세 단어와 사이가 좋은 사람
세상에 갑자기 생긴 것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
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
사람은 혼자선 살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
손 잡을 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깨달은 사람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시를 2007년에 미국 여행지에서 낭송을 했다.
낱말 하나하나 새기며 읊은 것은 정이 쏙쏙 드는 단어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나 혼자서도 외워본다.
화가인 큰딸이 미국에 사는 동안 말은 안 통했지만 미국 작가들과 합동전시회도 하고 꾸준히 노력을 해왔다.
귀국하면서는 작업실을 마련해 지금까지 크고 작은 개인 전시회를 16회나 했고 국립현대 미술관에 작품이 3점이나 소장되어 있다.
2025년에는 경찰청에서 전시회를 열어주고 26년도에는 인천공항에서 전시회가 있다고 한다. 지방대 나와서 직선으로 갈 길을 곡선으로
가는 게 부모로서 미안하다. 하지만 본인이 꾸준하게 노력한 결과 서울에서 잘 나가고 있는 것 같다.
항상 건강 보살피면서 열심히 살기를 기도한다.
나의 50대에는 허리가 아팠는데 여기저기 운동요법과 한방병원을 병행하면서 꾸준히 치료하고 에어로빅과 시민운동장 돌기를 매일 했다.
에어로빅 운동을 20년 넘게 코로나 오기 전까지 열심히 했다.
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엉덩이 드는 운동 300번을 날마다 3년째 하니 허리가 많이 좋아졌다. 내 생활에서 불편이 없을 정도다.
사업을 접고 집에만 있으니 우리 동네 새마을 부녀회장직을 맡으라 해서 상무지구 개발할 때 상무1동 부녀회장직을 맡았다.
기억에 남는 한 대목 남길까 한다.
경남 거창에 있는 사과 농장에 봉사하러 서구 동 부녀회장들이 버스 대절해서 갔다. 우리가 점심까지 싸가지고 사과를 따주러 아침 6시에 출발했다.
오전 10시쯤 도착했다. 높은 산에 있는 사과밭이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1박스씩 사과가 열려 있었다.
사과나무가 낮고 옆으로 퍼져 있어서 사과를 누워서 땄다.
일을 할 때는 맘껏 사과를 먹으라 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사과를 1박스씩 가지고 온 기억이 난다.
큰 사과 상자에 1박스씩 따서 둘이씩 조를 이루어 사과를 고르는 기계가 있는 창고까지 운반하는데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이번에는 배꽃이 피었을 때다.
조그만 가지에 배꽃이 피었는데 그 중에서 약 5송이 피었으면 2개정도 튼실하고 건강한 걸 남겨두고 3개는 따서 버려야 나중에 배가 커서
상품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 초보자한테는 빠른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광산구 동곡면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다음에 배추 뽑는 일 연탄 나르는 릴레이식으로 서서 날라 준 거 같다. 그래서 내무부 장관상 2번 우리 애들 상무초등학교 졸업 때 모범생이어서 그랬는지 장한 어머니상을 탔다. 또 전남 중학교에서 장한 어머니상 2번을 탔다.
봉사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봉사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을 적어볼까 한다.
지금의 농성동 상록회관 자리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젊은 세대들은 모를 거다. 10년 전만 해도 해마다 벛꽃이 피면 시내 한복판에 꽃잔치가 열렸다. 20년 전에 꽃잔치는 우리 서구 새마을회에서 10일 정도 음식 장사를 했다. 각 동 부녀 회장들이 총 출동해서 일찍 시장 봐서 준비하고 오후부터 식사와 술안주를 직접 만들어 팔았다.
판매 수입 돈주머니는 내가 차고 밤 12시에 장사를 끝내고 집에 오면 남편한테 좋은 소리도 못 들었다. 그후 조금 빠른 11시에 끝내고 들어가도 불만이 많았다. 항상 현금이 틀린 적은 없었다.
계산을 잘 하고 속이지 않고 양심껏 열심히 했기에 수익금이 그때 돈으로 1700만원 정도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광천동 부녀회장이 서구 회장직을 맡고 내가 부회장을 맡았다.
그 회장님은 사위 따라서 서산으로 갔다 들었는데 연락이 안 된다.
버스 타고 상록회관을 지날 때면 창문 너머로 그때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60대 초반의 젊음이 있었기에 그 많은 일들을 척척 해낸 거 같다.
그때 봉사하였던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지나고 보니 그때는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던 거 같다.
그 수익금은 연말 때 불우 이웃 돕기에 썼다.
동회장을 그만 둘 때 선물을 받았다.
우리집은 시부모님이 계셔 손님들이 많이 온다. 명절 때 음식해서 대접하려면 내 마음부터 바쁘다.
옛날에는 설날 쑥 말려 놓은 것으로 춥고 미끄러워도 쑥떡을 해야 했다.
쑥으로 인절미를 하면 맛있었다.
또 추석에는 송편을 만들었다. 지금도 송편은 내가 모싯잎 삶아서 송편을 빚는다. 모싯잎이 많이 들어갈수록 쫄깃쫄깃 맛있다.
내가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돌아다닐 수 있는 한 송편을 만들 것 같다. 애들에게 송편을 싸주고 싶다.
지금도 김장해서 배추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동치미 다 담아서 주곤 한다.
김치 냉장고 2대에 항상 김치는 준비되어 있다.
여름에는 줄기가 있는 상추를 밥 많이 갈아 짤박짤박 담아 놓으면 맛있다.
여름에는 열무 양파 짱아찌 오이 등 밑반찬을 해 놓으면 반찬 걱정이 없다. 나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주려고 한다. 자식한테도 내가 많이 베풀어주고 싶다. 그냥 보내면 서운해서 가벼운 야채는 자급자족한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배추 무를 심어서 사지 않고 김장을 했다. 작년 다르고 금년 달라 땅을 팔 수가 없어 씨앗 심기가 애매하다. 힘이 없어 삽질하기도 힘들다.
지금은 양파 수확해서 2일 말려서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자식들은 밭을 일구지 말란다. 행여 아플까 봐 걱정이다.
지금도 무리하면 무릎 옆의 힘줄이 힘들다. 손목의 관절이 일을 그만하란다. 그래야지 하면서도 밭에 가봐야 된다는 걱정이 든다.
<환갑을 맞이하다>
환갑 전에 아들과 두 딸을 결혼시켰다. 막내 딸까지 취업이 되고 환갑이 언제 돌아올까 한탄도 했는데 환갑을 맞이했다.
환갑 기념으로 우리 아들 내외가 유럽 여행을 15박 일정으로 보내주었다.
친구들하고 4월에 한 팀을 이루어 5백만원 정도를 내고 갔던 거 같다.
런던으로 가는 직항이 아닌 독일을 경유해서 갔다.
영국 호텔에 투숙 후 다음날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 여행지는 버킹검 궁전을 조지 3세가 사들여 새롭게 건축을 한 건물이었다. 아치 입구에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은 인상적이었고
왕족이 런던 거주지로 1993년에 대중에게 공개했다 한다.
버킹검 궁전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름 휴가 기간 8월 초부터 2달 동안 개방 근위병 교대식 광경을 볼 수 있다. 세계의 3대 박물관 중 가장 큰 대영박물관을 구경했다. 런던 시가지는 산이 없고 공원이 많으며 지붕 위의 굴뚝은 방을 표시해 놓은 거다. 굴뚝이 5개면 방이 5개라고
유럽 문화는 교회와 성당이 차지하고 집들도 거의가 100년 150년 됐어도 튼튼하다. 이곳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일본 여자와 살고 불행한 사람은 독일 여자와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런던 궁중에는 템즈강이 흐르고 있다.
다이애나비가 죽은 주택 뒤에는 꽃다발이 큰 차로 30대 분량 나왔다고 말했다. 템즈강 주변에 런던 시청은 번데기 모양으로 잘도 지어놓았다.
웅장함과 멋스러움 우아함 더불어 조상님들의 덕분으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 파리는 종교가 카톨릭이다. 언어는 불어를 쓰고 낭만과 예술의 나라 유럽의 자존심 패션으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루부르 박물관 최고의 바티칸 미술관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작품 다빈치의 모나리자 밀러의 비너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 네 마리의 말들을 조각한 카르젤 개선문도 볼거리로 좋았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서 유람선을 타러 세느강 주변 가로수들 시가지를 벗어나 노틀담성당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했다. 배를 1시간 20분 탔다. 노틀담 대성당 Notre Dame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성모 마리아를 위해서 지었다.
자연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동물들은 넓은 초원 위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런던과 파리 경계선
자연 풍광의 경이로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벨기에~ 브르쉘~ 세계 최초로 유화 물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브르쉘에는 불이 났을 때 60cm 소년이 오줌을 싸서 불을 꺼줘 브르쉘시를 지켰다는 동상이 있다. 시청사는 고딕 양식의 르네상스 양식
각종 화려한 건축들이 조화를 이루고 웅장한 건물들 사이에 성심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럽 나라는 거의 카톨릭 신자들의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
튜울립과 오렌지가 생각나는 나라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다.
예술성 재능이 많은 램브란트 반아이크 고흐 등의 대화가를 배출한 나라다.
공예도 뛰어난 나라다. 자원이 부족하고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지형적으로 어렵지만 근면성과 신뢰성을 겸비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세계대전에 참가한 전사자를 기리는 위령탑 주위에는 왕궁과 왁스 박물관 등 오래된 건물들의 명소가 있다. 중심지의 비둘기떼의 한가로움이 눈에 띤다.
부채살 모양의 운하 풍차마을의 크고 작은 풍차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고 긴 강변을 끼고 풍차 4대가 돌고 있다.
그 외에도 나막신과 치즈 공장 변덕스러운 날씨 도랑 건너 강물이 흐르고 공기가 맑은 히딩크 감독이 사는 나라다.
이곳 교회는 돈을 내고 예배를 본다. 무역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다.
재건축이란 없단다. 해저터널 28개 공원 29개 해저터널 둑을 막아서 만든 나라다. 낚시꾼도 면허를 따야 낚시할 수 있는 나라다.
동.식물 보호협회가 있어 고사리 꺾다 잡히면 많은 벌금을 내고 산과 들은 포도밭이 전부다.
독일 수도 베를린
인구는 우리나라 약 2배 정도다.
맥주의 나라다. 예쁜 도시다 많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로
경제적 혼란을 겪었으나 자동차 화학산업을 기반으로 현재는 건실한
경제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독일어가 공용어이나 영어도 함께 쓴다.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계적 문학가를 배출했다.
괴테와 쉴러 헤르만 헤세 등의 작가와 하이네 릴케 등의 시인도 배출했다.
또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전 세계 클레식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음악의 나라 바흐와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베토벤 등
세계 거장의 음악가가 모두 독일에서 나왔다.
퀼른 대성당의 웅장함에 압도 당하는 곳이다. 국제적 수준의 다양한 박람회를
개최하는 국제 산업도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아름다운 요정의 노래 Lorelei 언덕 라인강 오른쪽 기슭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 요정의 바위라는 뜻이다.
프랑크 푸르트 금융과 상업의 도시 독일 최대 공항이 있고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도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품을 남긴 괴테가 태어나
대학 입학까지 16년 살았던 집을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독일은 유명 관광지가 많다. 하이델 베르크성 엣다리 로덴버그
라인강 마인강 넷쯔강 등이 있다.
언덕진 야산에는 그림 같은 집들이 숲과 나무와 꽃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마을에서 비후스틱과 스프를 먹고 면세 백화점에 들러
휘슬러 밥솥과 쌍둥이칼 스텐 비누 등을 샀다.
현지 가이드를 보내고 로덴버그로 이동 중에 유료 화장실을 1유료에 3명씩 썼다.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베를린 차범근 선수가 운동했던 곳이다.
라인강은 흘러 네덜란드로 흐른다. 경찰이 없는 나라다. 법규를 어기면
평생 운전 면허 취소다. 도로세가 없고 계절은 우리나라와 같다.
축복받은 나라다. GNP 약 3만불이다.
통일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서로 헐뜯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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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7
도래의 시간
조휘문
날아간 가창오리 떼는
발자국 남겨 놓는다
노을 지는 시간,
허공에 찍힌 발자국들
누구의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깃털 파고들던 바람을
발톱 아래 묻고 갔을까
나는
발톱을 힘껏 움켜쥔다
저수지는 풀려 홀로 맑아지고
바람이 구름을 마음껏 풀어놓는다
자꾸 올려다보는
북쪽 하늘
나는 돌아올 바다 건너
내려올 기억들을 기다린다
허공
움켜쥔다
일가 이룬 새떼
파르르 물결 일으켜 강물 들어올리며 불그레 물드는 나래
노을 끌어당겨
발끝 말아쥐고 당신 기다린다
가창오리 떼 울음소리가
저수지의 귀를 덮는다
11/17
나비의 탄식 - 원본
조휘문
어제보다 한 옥타브 올라앉은 봄볕
울타리 아래
장다리꽃이 박자를 짓는다
연보랏빛 꽃잎 속에
나비 한 마리 날개를 접을 때는
햇볕도 바람도 모른 체 눈을 감는다
이윽고
아랫배가 불룩한 나비
선율 그리며 허공을 날면
달아오른 대지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언 강의 속울음 같던 내 노래도
먼 하늘 아래
그 언덕을 향해 목청을 틔운다
빈손 뒷짐 지고
봄볕 아래 바장이는 나도
장다리 꽃밭을 맴도는 한 마리 나비일러라
그 언덕
아직도 나를 기다려
한 사람 마주 걸어오고 있을까
나는 자꾸 없는 날개를 휘젓고
12/17
생강나무 언어
조휘문
구례 산동 지나 반곡 마을 고갯길에
눈매에서 생강향기가 나는 누이가 산다
이른 봄, 오가는 인기척에 꽃등을 부풀려
화르르 웃을 뿐
냉기 가시지 않는 꽃그늘처럼 누이는 입속에서
말을 틔우지 못했다
저 아랫마을 산수유꽃이 시절이었지만
노란 부리로 햇살을 물어온 새처럼
누이는 가지마다 제 속엣말 매달아 흔들었다
상처는
어떤 걸 증명하는 암호인지 모른다
피를 보이고 난 후에 제 향기를 내밀고
무릎 꺾인 채 처음으로 제 이름 밝히는 누이
맨몸에 걸친 샛노란 꽃차례들이 진저리쳤다
그 알싸한 입김에 얼굴을 묻고
나는 해가 질 때까지 그 나무 아래서
누이의 노란 속엣말을 가만가만 듣고 있었다
[양귀비 꽃밭에서]ㅡ현충일에/원본
김영자
차리리 꺼지지 않는
생의 불꽃
잠의 신 '히프노스'는
죽음의 신 에게
새빨간 입맞춤을 건넨다
묵언의 이야기
뒤척이는 슬픔을 완독하기 위해
핏빛 보다 더 붉게 피어난 사랑
꿈이며 위로의 망각
그리고 지복의 기쁨이여
그 향기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뜨겁게 사랑하고 아파했던
첫키스의 화살촉처럼 날카롭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끝없이 속삭이는
저 외로운 갈망의 목소리
천년의 기다림
타는 저녁놀을 휘감아
이별의 진혼곡으로 흐른다.
*히프노스;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잠의 신
[나의 유년시절](자서전) - 원본
-박명자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하우스와 농사를 지음
아버지 박재석씨 어머니 김아기씨 사이에 오빠2명 언니 3명 나 아래로 남동생 1명
합하여 3남4녀 7남매중 여섯번째다
어머니는 나를 39세에 낳았으니 지금 같으면 첫애도
그 나이에 낳는 시대
그때는 노산이지만 나의 남동생은 42세에 낳았다
딸을 4명 낳다가 내가 남자애 터 팔았다고 나를
더 예뻐하신거 같다
초등학교 들어가기전 6.25가 일어났다 우리 큰집은 동하 마을에서 대밭도 넓고 사랑채 안채가 뚝뚝 떨어져 있어 집터가 아주 넓어서 총소리가 쾅쾅나면 무서워서 큰집 대나무 밑으로
언니와 큰집 조카들이랑 조용히 숨은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입학시기에 언니와 함께(2살위) 입학을 했다
그때 전쟁이 터져 언니는 입학시기를 놓쳤기에 나와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항상 선생님들께서 합반을 함께 해준적은 없었다
언니도 공부를 잘 했다
1반 2반 밖에 없었지만 1반 71명 2반 75명정도
교실이 없어 천막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비가 오면 다라이를 가져다가 빗물을 받아 냈다
그리고 오전반 오후반을 오가며 책가방도 없이 보자기에
책을 돌돌 말아서
허리춤에 묶고 달음질 하다보면 양은으로 만든 필통에서는 연필심 부러지지 말라고 제제소에서 나뭇가루를 담아 필통속에 넣어도 연필은 부러졌다
비가 올때는 지푸라기로 엮은 등받이 같은걸로 둘러쓰고 약 11km 떨어진 학교를 갔다
그 몰골로 천막교실의 바닥은 흙에다 빗물이 고인데는 질퍽거리고 행여 바닥에 도구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히 행했다
그래도 친구들과는 재미있어서 소곤소곤 깔깔 대다가 반장한테 들키면 책받침으로 머리통을 맞기도 했다
지금도 나의 모교는 세하동에 송학초등학교로 후진 양성을 잘 하고 있다
또 그때는 사친회비를 안가져 가면 점심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낸다
부모님들은 들에 나가 안계신데...
사친회비 밀린사람 가져오라고 그러면 할수 없이 집에 갔다
빈털터리로 와서 선생님과 눈을 못 맞춘다
우선 배고픔 해결이 1순위이니까 어머니가 품앗이 일을 가면
점심때는 졸랑졸랑 어머니 옆에서 밥을 얻어 먹던 시절이다
200평 논 1마지기에 쌀 2가마 수확하는 시절이라 보릿고개를 겪고 6.25를 겪고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보릿고개란 작년 농사 지은 쌀은 떨어지고 보리 타작은 아직 이르고 하니 덜 익은 보리를
끊어다 도구통에 찧어서 약간 보리죽을 끌여 먹은 것
나도 어려서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어린 나의 생각 배고픔이 풀린 것은 박정희 전대통령께서
1970년대 외국에서 통일벼를 수입해다 심어서 논 200평당 쌀 7~8가마가 나왔으니 얼마나 배가 불렀겠는가
그래서 식생활이 해결되지 않았을까(나의생각)
내가 태어나서 결혼때까지 내가 살던 우리 마을은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연꽃 속 정각이 3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옛날에 성춘양전 영화도 촬영 한곳 지금도 구름다리도 있고 경관이 좋아 서구 세화동에 만귀정이라고 문화재로 지정돼서
더 유명 해진것 같다
봄이면 학교 소풍 장소로도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동네가 변해서 입구부터 궁궐같은 까페가 자리를 차지하고 주말이면 인파로 꽉차 있다
본 동네 분들은 늙고 아프고 돌아가시고
나의 친정도 부모님 돌아가신지는 50년이 됐다
큰오빠 내외분도 돌아가신지가 6~7년 됐나 싶다
내가 키운 조카도 70이 된거 같다
도시 사람들이 외곽지역으로 땅을 사서 땅 값도 비싸고
집들도 삐까 번쩍 지어서 많이 변 했다
내가 어렸을적 쏘다니던 오솔길 같은 골목길은 없고 차가 다닐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장학금이 없던 시절이라 중학교는 아예 꿈도 못 꾸어었다
또한 1년에 1번씩 공동 우물을 친구들 하고 샘물을 퍼서 버리고 샘속에 들어가서 깨끗이 청소해 다음날 아침이면 맑은 물이 철철 흘러 내렸다
청소 한 보람이 있어 동네 어른들 한테 칭찬을 많이 받았다.
박명자 시인님의 자서전
<생활 전선에 끼어 들다> - 원본
초등학교 졸업후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집안 살림은 올케언니가 했고
큰 언니는 결혼 했고,둘째 언니도 선을 봤다.
나와 내 위 언니는 서로 조카들을 업고 놀러 다니려고 서로 싸우곤 했다
집안 일은 올케언니가 도맡아 꾸려 같다
그러던차 전남방직에서 직원을 모집한다고 우리 동네 친구들이 응시하러 가잔다
다른 친구는 회사간부 집에서 애 봐주고
1,2년 있다가 근무하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친구는 중학교 졸업후 응시 했는데 나는 1차로 합격해서 그달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 몇달 동안은 자취를 했다
그 후 기숙사 들어가서는 생활이 편했다
큰 식당에서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에 식사를 못하면 밖에 나가서 사먹야만 했다
방에서도 방장이 있고 사물함도 벽에 부착이 돼 있어서
열쇠로 관리를 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께서 스피커로 항상 말씀 하셨다
청소며 모든걸 밤 9시까지 하고 기숙사에도 밤 9시까지 돌아와야 했다
규율이 아주 엄격 했다
목욕탕,독서실,세탁실 두루 편하게 갖추어져 생활이 편했다
주로 3교대로 이루어 졌고 항상 일하는 곳은 더웠다
방직과에서 일이기에 온도가 안 맞으면 실이 끊어지기에
온도가 높았나 보다
나는 금방 진급이 되었다 몸이 빨라 일을 잘 했다
조장 언니 한테도 이쁨을 받았다그리고 기숙사 방에서도
방장이 빨리 됐다
방장은 청소 같은걸 안하고 7,8명으로 구성된 책임자
책임도 컸다
제일로 하기 싫은 심야 작업은 새벽 1시 부터다
기계가 24시간 가동 하기에 무슨동은 낮시간 다 정해져 있어
생활은 편했다
나는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 지금 광주역 근방에 동양종합 학원에
입학해서 영어기초와 한문을 졸업했다
정화영 원장 선생님께서 우등상을 주시면서 꾸준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셔다
일요일이면 친구들하고 근거리 여행도 다니면서 즐겁게 지냈다
언제나 25일이면 월급이 나오니까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리고 매월 저축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집에 필요한것도
사다주곤 햬다
약 5년동안 결혼자금을 마련 했다
친구 소개로 정미소 하는 남자 친구를 소개받고 몇 번 만났는데 외모는 건장하고 괜찮았는데 장남에다 엄마가 돌아 가시고
할머니가 살림을 꾸리신다고
동생들은 많고 해서 송정리 사는 고모님께서 알아보시고
고생 구덩이로 들어 간다고
못 만나게 해서 헤어졌는데 그 남자는 회사 앞 빵집에서 만났던 장소에 몇 번을 와서 기다리다 갔다고 했다
마음은 안쓰러웠지만 꾹 참고 안 만났다
또 한번은 대구 청구대학생과 펜팔을 했다
1960년 경에는 펜팔들을 했다
주고 받고 마음이 통했는지 하루는 그 학생이 대구에서
주소 가지고 만나로 왔다
외모에서 낙점
키가 작았다 금남로 다방에서 애기하고 저녁먹고 내가 대접후
대구로 보냈다
안가려고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몇시간 있다 갈수 없단다
한참을 설득 시켰다
우선 맘에 안드니까 달래서 보냈다 그리고 편지가 왔는데 답장을 안했다.
눈치를 챘는지 그 뒤로 서너번 오더니 단념 했다
그 학생이 하는 말< 기다림이란 참기 어려운 수양이라고> 이 말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나이가 있으니 회사를 퇴직하고 차분히 결혼상대를 만나야겠기에 사표를 썼다
<나의 신랑감을 만나다>
저축해 놓은 돈은 결혼 자금으로 넉넉했다
중매로 나이가 6살 위인 내 남편을 만났다
다방에서 만났는데 키가 큰 훤칠한 남자였다 일단 외모에서 합격이다
장남에다 서울 외삼촌 형님과 사업하다 안되니까 집에 한번 다녀 가려고 내려 왔단다
부모님께서 나이도 있고 하니 일단은 선을 한번 보라고 해서 나를 만나로 나왔다고 했다
대화를 해 보니 무엇을 해도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그순간 콩깍지가 씌었는지 집도 가난하고 직업도 없고..그런 사람을 그래도 끌려서
영화도 보고 밥도 먹으며 따라 다녔다
그때는 결혼할 조건으로 만났기에 진지 했다
양가에서는 혼기가 찾으니 결혼을 서둘렀다
꽃잎에 나비가 날아 왔다
음력 춘삼월 드디어 한가정이 새로이 태어났다
시부모님은 쌀과 식품가게를 하셨다
지금의 치평동이 크나큰 상무대였다
포병,헌병대,기갑학교...김대중컨벤션 근처 호텔까지 전부 군 부대였다
군인들을 보고 음식장사에서 부터 필요한건 다 있었다
우리집은 장사는 그대로인데 식구는 늘어나고
내가 결혼 하자 금방 아들 낳고
연년생으로 딸을 낳으니 경사아닌 경사가 났다
애들 아빠가 친구하고 한국농어촌보라는
출판사업 동업을 했는데 자금만 들어가지 나오는 것은 없고 해서
나와버렸다
또 친정쪽 내사촌 오빠와 사료 사업을 했는데 그것도 손해만 봤다
이래저래 가난은 악화 됐다
할수없이 시부모님께서 가게를 우리 네식구한테 물려주시고
당신들은 나가셨다 사업을 키우려면 자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내가 계모임 오야지가 돼서 곗돈으로 식품 도매업을 했다
장사가 잘 됐다 2년만에 많은 돈을 벌어 120평짜리 터가 넓은 집을 사서 시부모님께 드렸다
그 집을 시부모님은 집세 받고 사셨다
지금의 세정 아울렛 자리다
금방 벌어서 땅사고 논사고 매년 매답 했다
가난을 너무 겪었기에 낭비라고는 없었다
약 10년만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큰아들 큰딸 속 썩이지 않고 공부를 잘 했다
아들 재헌이는 3살 말도 잘못할 때 거리에 간판 글자를 가르쳐주면 그 이튿날 그대로
대답을 해서 천재라고 소문이 났다
참 우리 시동생 이야기가 빠졌다
결혼해서 식구가 7식구 나는 식구들 밥해주고 빨래하고 샘물도 우리하고 옆집 문화극장 세 사는 사람들하고 합동으로 쓰는 뽐뿌 샘이었다 물을 길어다가 밥해먹고 빨래는 문밖에 있는
봄뿌샘이 철분이 많아 모래,숯,유황을 넣어 거르는 곳 물을 품어 받혀서 나오면 깨끗한 물이 나왔다
연탄불 옆에다 항아리를 묻고 물을 퍼다 부어 놓으면 한겨울에도 물이 미지근해
세수도 하고 설것이도 했다
연년생인 아들과 큰딸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셨다
나는 시댁 식구들 뒷바라지를 햇다
큰시동생 장가 가고 미군부대 다니면서 부모님을 성가시게 하지 않았고
또 그 아래 시동생도 간부 후보생 소위계급 장교로 가게 되었다
3남1녀중 막내 시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광주여고 졸업하고 직장을 다녔으며 부모님을 안성가시게 했다 시누양반 만나서 지금은 광주에서 잘 살고 있다
그런데로 우리 사업은 꾸준히 돈을 벌었다
그래서 우리부부는 의논하에 자식을 하나 더 놓았다
그때는 아들을 바랬는데 딸을 낳아 많이 서운 했다
지금은 딸 둘에 아들 하나 1남2녀가 좋은거 같다
사업도 번창하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커 주었다 10년 터울로 막내딸을 키우면서 애들 뒷바라지에다 가게보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때 옆집에 참한 아주머니가 혼자 살았는데
막내딸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뒷바라지를 틈틈이 해 줬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소식이 끊겼다
가끔씩 나의 뇌를 두드린다 보고 싶다고!
막내딸 3살 때 시부님이 돌아가셨다 갑자기 쓰러져 조대 병원에 가니
뇌졸중이라 했고
밤 9시를 못 넘기니 집으로 모시고 가라 해서 집에 와 돌아 가셨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죽음이라 생각 했다
아프시지도 않으셨는데 그때 음력 10월 개를 키웠는데 개집 바람막이를 해 주시다가 쓰러지셔 병원으로 급히 갔으나 끝내 돌아 가셨다
3살인 막내딸 모르는 할머니 한테 맡겼어도 집안에 큰일이 난줄 알고
울지도 않고 할머니하고 잘 놀고 있었다
그때부터 착하고 기특 했다
그래서 사범대를 가서 대학4년때 임용고시 합격했다
그 해 최연소 합격자로 알고 있다
<3남매 자랑>
지금까지 24년 후진 양성 했지만 별 사고 없이 맡은바 임무를 잘 하고 있는거 같다
한가지 흠이라면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를 누비다 보니 혼기를 놓쳐
아직 미혼이기에
항상 나의 마음은 뭔가 허허 비워진채 채워지지 않는다
지금은 내 마음도 포기를 하니까 잘 견뎌내는거 같다가도 늘 가슴은 아려 온다
하지만 막내딸이 영양제며 외출복이며 집안에 필요한건 다 사다주기에 고맙다
막내딸 어린시절 쓰다보니 순서가 바뀌어 졌다
아들 김재헌이는 자랑할게 너무 많다
기어다닐 때부터 밥상위에 올라가면 안된다 라고 조부모님께서
말씀하시면 절대 안올라 갔다
할머니가 거의 키우다시피 하셨다
돌 전에는 엄마가 화장실같다 올게 여기 있어 하면 올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3살때는 나들이 가면서 상가에 간판을 가르쳐 주면
그 다음날 잊지 않고 그대로 읽었다
5살때부터는 암산으로 천단위까지 알아 맞추었다 손을 뒤로 하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이다
유치원도 안보내고 만 6세에 상무초등학교에 입학 했다
우리 이이들 3남매가 이 학교를 졸업 했다
공부는 항상 전교 1,2등을 했다 그런데 체구가 날 닮아서
키가 적어 반장을 안하려 했지만
워낙 공부를 잘 하니 우격 다짐으로 반장을 맡았다
중학교때부터 전남 중학교 영수경시대회를 대표로 나가서
금은상을 받았다
한번은 수학 선생님께서 밥 사먹이고 떨지 말라고 우황청심환도 사 주셨단다
나는 일 때문에 한번도 따라가지 못하고 과목선생님께서 알아서 하셨다
전남북 제주도까지 합쳐서 60명 선발하는 과학고에 좋은성적으로 입학
과학고에서도 대표로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금상을 받았다
고2때 전두환정권이 과학기술대라는 학교를 충남대덕 단지에 세웠다
우리 아이학교 전교생이 거의 2학년때 대학을 합격해서 우리나이 17세에 대학생이 되었다
수영장까지 갖춘 영재들만 모인 학교라 기숙사며 식당 당구장까지 잘 갗추어진 학교다
대학가서 사춘기가 있었는지 수학이 뛰어난 아들을 지도교수가 자기 밑에 두려 했는데
늦잠자고 당구치고 했다고 지도교수가 우리 내외한테 일러 바쳤다
과기대에서 석사 마치고 박사학위는 서울대에서 받았다
그때 유학길이 있었는데 기회를 놓치고 후회를 했다
지금은 나이가 곧 정년할때다 E.T.R.I 정보통신 연구소에서 지금 나왔다
(한국전자통신 연구소)다
며느리는 회계사 3남매 낳아 잘 키우고 있다
나의 큰딸 이야기가 남아 있다
유년시절부터 오빠한테 치어서 빛을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때부터 자기반 꾸미는 일은 큰딸 은희가 꾸몄단다
붓글씨도 잘쓰고 그림도 잘그리고 공부도 잘 했다 하지만 연년생인 오빠가 워낙 잘하니
아들 한테만 신경을 썼더니 4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은희도 공부며 그림이며 우등생이니
뒷바라지를 좀 해주시라고 부탁아닌 부탁을 받았다
애당초 미대를 안보내려고 신경을 안썼는데 중3때
신문 광고란에 나폴레옹을 그대로 그려냈다
옆집에 미대생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상담을 했는데 재능이 아주 많다고 해서 연합고사 마치고부터 미술학원에 보냈다그때부터 저도 고생 나도 고생 수업 끝나고 도시락을 3개씩 싸가지고 다니면서 금남로에 있는 학원가서 막차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밤 12시가 다 됐다
3년동안 아프지 않고 잘 견뎌 냈다
서울에 있는 홍대나 중앙대 간다고 밤새도록 울었는데 그
림은 학교가 무슨 대수냐
우리 내외가 설득해서 전남대 서양학과를 나왔다
지금은 서울에서 개인전 16회 삼성동에 있는 코엑스에서 1년에 전시회를 몇 번씩 한다
촌놈이 서울 사람들 제치고 잘 하고 있다
직선을 못가고 곡선으로 돌아서 고생과무시도(학벌) 있었지만 묵묵히 견뎌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3점이나 소장돼 있다
작년에는 서울 경찰청에서 전시회가 있었고 금년 8월에는 인천공항에서 전시회를 열어준단다
그림값도 꽤 비싸단다 결혼기간이 빠져서 두서 없이 진행했다 학교교사로도 5년정도 했는데
사위가 현대자동차 서울 본사로 발령받아 큰 꿈을 안고 교사직을 사표쓰고 몇 년동안은 딸 낳아서 키우다 사위가 미국미시칸주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미국서 3년 살다 왔었다
우리 외손녀 박지담 유년시절에 미국 갔는데 지금은 대학 졸업하고 화장품 무역회사에 교수님 추천으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영어를 잘해서 상사들 영어 알바까지 하고 있어 다행이다
어릴적 미국 갔던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과목은 못해도 ㅇㅇ어는 언제나 잘 했단다
큰딸 김은희 작가는 자신이 유명해지려고 애도 딸 하나만 낳고
마감을 했다
손녀딸 박지담이 엄마! 동생 하나 낳아주면 키우겠다고 졸라댔지만 지담이 하나만 키웠다
서울에서 자식하나 키우려면 많은 투자를 해야기에 둘째를 안 낳았지 않을까
영어를 잘 하는 이유도 고3때까지 비싼 영어 학원을 보내고 대학가서도 미국으로 교환학생 갈 때 목돈 천만원 넘게 들어 내가 5백만원 도와줬다
또 농림식품부에서 인턴사원으로 6개월간 뽑는데 합격해서 대학시절을 보람되게 잘 보내서 무역회사에 갔지 않았을까
아무튼 손녀는 바빠서 못오고 할머니 바르라고 화장품은 넉넉히
보내온다
고맙다고 톡 보내면 앞으로 화장품은 제가 보낼테니 잘 쓰시고 할머니 곱게 늙으시란다
고맙다
<나의 결혼생활>
내 나이 30세쯤 됬을즈음 아들과 큰딸 5세 4세쯤 됐을 때 세상이 너무 싫어졌다
남편은 하는일이 잘 안되니 항상 음주에 노출되 있고 어린 애들은 아프면 병원도 가야 하고 나의 비상금도 바닥이 나고 세상을 이렇게 살수 없다라고 해서 지금의 운천저수지 그때는 맑은물이 철철 넘치면서
수심도 깊어서 해년마다 자살자가 나왔단다
나 또한 어느날 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우리집에서 500미터도 안된 운천 저수지에 밤에 혼자 올라 갔었다 한바퀴 도는데 무서움증이 확
들어 걸을수가 없었다
소복입은 처녀 귀신이 뚝 주변에서 나올것만 같은...
그래 앞으로 이보다 더한 불행이 닥친다 해도 내 자식 내 남편위해서 헤쳐나가자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집으로 향했다
마음을 새로이 고쳐 먹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후로 부모님께서 사업체를 물려주시고 전셋집을 따로
나가시고 사업자금은 계장을
해서 곗돈으로 식품 도매업을 시작 했는데 운이 돌아 왔는지 상무대 정문으로 출입이 가능한 민간 업체들이 각 부대마다 식당들 출입증을 제시하고 부대를 들락거리면서 장사를 했다
정문 출입이 불가능 해지고 남문 출입이 가능 했다
남문을 가는 길에 우리가게가 있어서 거의 다 우리 집에서 물건을 싫고 가서 장사를 하고 밤에 퇴근시에 물건값을 갚고 해서 우리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 10년동안 꾸준히 사업을 하니까 집도,논도,땅도 매년 매답했다
애들은 공부를 잘하고 해서 노산에 막내딸을 더 낳았다
4월달에 출산하고 5,18(1980년)이 터졌다
하지만 군부대 상무대는 화정동에서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교통을 막았기에 이쪽 상무동쪽은 아무 일이 없었다
교통이 통제되니 우리 가게는 물건이 없어 못 팔았다 라면 음료수등 물건을 하나라도 더 가져다 팔려고 아수라장었다
인생은 살면서 운이 따라 다닌다고 믿고 싶다
운이 있어서 이루어졌지 싶다
너는 가난하게 살지 말아라 라는 운이 말이다
열심히 억척스럽게 살다보니 내 몸이 많이 아팠다
허리,팔,다리를 너무 무리 해서 내 몸이 70인데 100을 썼기에
아팠을게다
그때는 세탁기도 없기에 손 빨래 하던 시절이다
팔이 아파서 빨래를 못할정도라 내 위 셋째 언니가 와서 도와준거 같다
금팔찌를 팔아서 원광대 한방병원을 다니면서 약먹고 침 맞으면서 꾸준히 치료 하면서 사업을 접었다
삶의 무게가 나의 어깨를 짓누를 때 하늘을 우러러 언제 60을 넘을까 그 나이 돼면 애들 뒷바라지가 끝날 것 같기에 한탄 한적도 있었다
내 몸이 아프니 무거운 것 못 들고 아끼니까 사업이 점점 쇄태해 갔다 내 나이 50세다 가게 3칸을 세받고 사업을 접었다
지금 세상은 열심히만 살면 일거리도 많고 몸 관리만 잘하면 잘 살수 있을거라 생각 한다
나의 창자시 한편 소개 한다
[장미의 속삭임](시)
-박명자
분홍 노을이 산들바람에
흔들릴 때
긴 침묵 지나
오월이 다시 웃는다
꽃들은 수줍게 얼굴 붉히고
카네이션은 감사의말 대신 하며
푸른 나무들은 하늘 향해
더 큰 꿈 펼쳐 올린다
어디를 걸어도 햇살 한줌
따사롭게 내려앉고
거리의 미소에도
초록빛 온기 번진다
서두르지 않는 새싹들의 시간속에서
바쁘게 살아온 마음들에게 잠시 행복해도 괜찮다고
다정히 말해준다.
제 3장
우리가 사업할때는 1년 내내 거의 쉬어 본적이 없었다
음력 설날 하루 쉬었던 것 같다 그러니 몸이 엉망이었다
남편은 워낙히 건강하게 태어나서 감기 같은 것은 아예 접근도 안했다
나보다는 더 편햇지 안았나 싶다
나는 1인 3역 새벽에 일어나 애들 학교갈 준비 도시락 싸고
빨래도 손빨래 하면서 가게 일 하면서 틈틈이 살림을 했다
아침에 도시락 가지고 애들은 학교 가면 하루종일 물건 구입 하고
물건 팔고 잠깐이라도 낮잠을 잘 시간도 없었다
남편은 소심해서 한꺼번에 물건 사러 몰려오면 처리를 잘못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없으면 화부터 내니 싸움도 잦았다
눈만 뜨면 똑 같은 생활 지겨울때도 많았지만 큰아들 재헌 큰딸 은희
10살 아래인 막내까지 공부들을 잘해서 내가 버티지 않았을까
그리고 매상도 많이 올라 가게도 윤택해졌다
언젠가 잠을 자고 있는데 쓱싹쓱싹 쇠를 가는 소리가 났다
남편은 잠귀가 밝아서 그 소릴 듣고 나를 깨웠다
도둑이 들었다고? 남편이 몽둥이를 들고 뒷문으로 가니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 도망가버리고 없었다
남편 뒤따라 갈적에 어찌나 떨리고 무섭던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또 한번은 2층집 상가를 지어서 2층이 당구장이었는데
세가 나가지 않아 잠깐 남편이 운영을 했었다
하루는 새벽 2시쯤 피곤해서 방문을 안잠그고 잠이 살짝 들었는데
누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서 눈을 감고 당신이야? 이제끝났어? 하고 말을 하니 도둑이 신발을 신은채로 들어왔다가 내가 잠을 안자는걸 알고 그냥 나가 버렸다
그후로 생각만 하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몇일간 잠을 잘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업하면서 도둑 안맞고 잘 지켜왔다
사업은 근면 성실 절약하면 돈은 모아진다고 생각한다
수입보다 지출이 적기 때문이다
장사 하는게 쉬운일은 아니다 항상 일찍 일어나고 늦게 문닫고
휴식이라는게 없으니 몸은 항상 피로에 젖어 있었다
월급 받는 사람들은 그당시 토요일 오전 근무만 했다
지금 같이 토 일 휴무가 아니었다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변해도 너무 달라졌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얼핏하면 노동법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점주들도 함부러 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민주주의 평등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세대들은 가난을 너무 알기에 지난 달력 한장
버리는 것도 아까워 언제 쓸지 모를 메모지로 쓰려고 다듬어 놓는다
한번 먹고 버리는 빈 상자도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너무 아깝다
너무도 풍족한 세대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복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요즈음 AI시대는 직업이 한두개 가지고는 안되는거 같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이 안된다
우리 고3 학생들이 1시간에 풀어도 못푸는 문제를 AI가 2분만에
풀어내니 앞으로 로봇이 인간을 앞지르면 어떤 변화가 올까
두렵기까지 한다 몇 년전에도 바둑계에서 알파고가 승리 했지 싶다
이제는 짜장면 만드는 것도 AI가 하는데 초보자 연봉보다 훨씬 작다고 한다 앞으로 대학도 AI학과가 생길 것 같다
우리 인간이 로봇을 조종하려면 한단계 앞질러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변화 하는 시대에 학생들도 옛방식대로 수업을 받을게 아니라
창의력에 따르는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AI선구자 일론머스크의 이야기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안에 세상이 많이 바뀔거라고 했단다
내 나이는 살날이 얼마 안남았지만 변하는 세상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젊은 세대들은 참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자식들 사는것만 보아도 상상을 초월 한다
하기야 옛날 이야기 해 봐야 지금 세상과는 너무 다르기에 소통이
안된다
요즈음 세대들은 부지런만 하면 무엇을 한들 자기 앞을 꾸릴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 60년대에는 열심히 살려고 해도 길이 없었다
보리고개 하면 젊은층은 라면 끓여 먹지 한다 65년부턴가 어느 회사로 기억이 안나는데 라면이 출시가 돼서 그때는 내가 돈을 벌 때라
라면 1박스를 집에 사가지고 가니 우리 큰오빠 새참거리로
안성맞춤이라고 동네에 자랑을 많이 해서 여동생인 내가 동네에서 방방 떴다. 60년전의 일이니 가물 거린다
지금은 라면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숫자 파악이 안된다
그후 70년대 중반 라면 1개에 23원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인플레가 되서 지금은 신라면 1개에 1000원정도 한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 한 것은 몇몇 대 기업들이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화를 벌어들여 이렇게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았을까
세계의 10위권 안에 든 잘 사는 나라 어디서든 조그만한 나라 대한민국
Korea를 외치다 보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오려 한다
이 좋은 나라를 후손들에게 잘 물려줘서 영원토록 후손대대로 잘 가꾸어나갔음 하는 나의 바램이다
그러려면 현재 손 쉽게 쓰는 플라스틱이나 비닐봉지등 환경보호에
적극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라도 1회용 생필품은 줄이도록 노력 해야겠다
옛날 젊었을 때 냉장고도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같이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기에 살수 있지 않았을까
가난하고 냉장고가 없어서 그리고 날씨 온도가 높지 않아서
땅을 파고 김치독을 묻어 놓고 먹었나 보다
땅속은 온도 변화가 거의 일정하다는 과학적 근거로...
<50세에 사업을 접다>
나의 허리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무거운 짐을 들수 없어 사업을
그만 두었다
그전에 2층 상가를 지어서 이사 했기에 장사를 하지 않아도 밥은 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상무대 군부대가 장성으로 옮겨가서 그 넓은 부지는
광주시와 국방부에서 싸게 인수 받아 아파트와 상가를 분양하고
지명을 상무1동에서 치평동으로 바꾸면서 광주에서 제일가는 중심지로
바뀌었다
땅값이 뛰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졌다
우리도 금호3단지 33평짜리 아파트 분양권을 받았다
지하철이 들어있어 상무역이 도보 5분거리다 그때 분양가가
등록세 취득세 합쳐서 9천8백만원에 분양 받았다
32년전 일이다 그동안 시모님이 돌아가시고 애들은 막내가 대학을 다녔는데 애들이 공부를 모두 잘해서 국립대학을 모두 장학생으로 다녔다
아들 재헌이는 서울대 박사과정을 알바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고
훌륭하게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보통신연구소로 취업을 했고ETRI 한국전자 통신연구원으로
이직해서 잘 다니고 있다
피아노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얼마나 잘치는지 모른다
몇 년 있으면 정년할 나이다
우리아들 재헌이는 17세에 과학고에 진학했다 고2때 전두환정권에서
충남대덕단지내에 한국과학기술대학을 설립했는데 입학과정이
중학교에서 1등한 애들을 선발해서 과학고 진학(그때는 전남.북.제주도 합쳐서 60명) 광주과학고에 들어간 재헌이는 2학년때 시험을
봐서 대학을 들어갔다
학교에 들어간 모든 돈은 무료였다
그런데 수학전공 공부는 안해도 A+을 받았는데 정작 관심이 많았던 물리학이 조금 부족해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너무 잘해주신 수학과 교수님 지금도 생각 난다
우리 아들을 그 교수님 밑에서 대학교수로 키우고 싶었다 한다
우리 큰딸 김은희 서양화가다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학과를 졸업후 지도교수의 소개로 갤러리에서 잠깐 개인지도를 했다
대학시절 성적이 30프로 이내에 들면 교사자격증을 줬다
그후 임용교시에 합격하여 나주로 발령받아 4년정도 교직에 근무할 때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사위를 만나 결혼후 사위가 서울로 발령나서 그만두게 되었다
사위가 현대자동차 미국 미시칸주에 있는 디트로이트자동차 주재원으로
갔을 때 내나이 60대초반 막내딸 방학을 맞아 둘이서 1개월간 미국 여행을 했다
막내딸 김상선
전남대 사범대 생물교육학과 졸업
졸업전에 시험삼아 인천시 임용고시에 응시 하였는데 합격
전국최연소 합격자였다
23세에 발령받아 교직에 있으며 아직 미혼이다
미국여행을 잠깐 소개 하자면 미국은 정말 큰 나라다
다른 지역을 여행 하려면 거의 비행기를 타고 다녔다
막내딸과 둘이서 여행을 하는데 성격이 안맞아 나는 가이드 옆에
따라다니면서 메모도 하고 그러는데 막내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맨 꼴찌에서 항상 따라 다녔다
우리 일행중에 캘리포니아에서 모녀가 함께 탑승 했는데 딸이 의사라고 했다 내 기가 살짝 죽었다
우리 딸도 대학 졸업전에 임용고시 합격해서 나도 자랑할만 했건만
대한민국 교포들도 어디를 가나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안에서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의 교포들이
많았다 나는 시를 낭송했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시를 낭송 했는데 막내딸이 무슨 시를 낭송하냐고 핀잔을 준바람에 시를 읊다가 까먹었다
그 뒤부터 막내딸하고 저기압 수준
여행을 하고 오는 길에 가던길에 했던 틀린낭송이 아까워서 다시
시 낭송을 했다 그 뒤부터 막내딸 하고 더 사이가 냉랭해졌다
그때 낭송 했던 시를 잠깐 소개 하겠다
<행복한 사람> (이 시는 어느 신문광고에 나옴)
행복한 사람은 세월과 사이가 좋은 사람
가는 시간은 아쉽게 떠나 보내고
오는 시간은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아들 딸의 고향이라는 생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은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사람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어디 있느냐며
누구에게나 한결 같은 사람
모두
사이 간間 자가 붙은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
이 세단어와 사이가 좋은 사람
세상에 갑자기 생긴 것이 어디 있냐고 묻는 사람
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
사람은 혼자선 살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
손 잡을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깨달은 사람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시를 2007년에 미국여행지에서 낭송을 했다
낱말 하나하나 새기며 읊은 것은 정이 쏙쏙 드는 단어들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나 혼자서도 외워본다
화가인 큰딸이 미국에 사는동안 말은 안통했지만 미국작가들과
합동전시회도 하고 꾸준히 노력을 해 왔다
귀국 하면서는 작업실을 마련해 지금까지 크고작은 개인전시회를
16회나 했고 국립현대 미술관에 3점이나 소장되어 있다
2025년에는 경찰청에서 전시회를 열어주고 26년도에는 인천공항에서
전시회가 있다고 한다 지방대 나와서 직선으로 갈 길을 곡선으로
가는게 부모로서 미안하다 하지만 본인이 꾸준하게 노력한 결과
서울에서 잘 나가고 있지 않을까
항상 건강 보살피면서 열심히 살기를 기도한다
나의 50대에는 허리가 아팠는데 여기저기 운동요법과 한방병원을
병행 하면서 꾸준히 치료하고 에어로빅과 시민운동장 돌기를 매일 했다
에어로빅 운동을 20년 넘게 코로나 오기 전까지 열심히 하고
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엉덩이드는 운동 300번 날마다 3년째 하니 허리가 많이 좋아졌다 내 생활에서 불편이 없을 정도다
사업을 접고 집에만 있으니 우리동네 새마을 부녀회장직을 맡으라 해서
상무지구 개발할 때 상무1동 부녀회장직을 맡았다
기억에 남는 한 대목 남길까 한다
경남 거창에 있는 사과 농장에 봉사하러 서구 동 부녀회장들이 버스 대절해서 우리가 점심까지 싸가지고 사과를 따주러 아침 6시에 출발 했다
오전 10시쯤 도착 했다 높은 산에 있는 사과밭이었다
사과나무 한그루에 1박스씩 사과가 열려 있었다
사과나무가 낮고 옆으로 퍼져 있어서 사과를 누워서 땄다
일을 할때는 맘껏 사과를 먹으라 했다
그리고 돌아올때는 사과를 1박스씩 가지고 온 기억이 난다
큰 사과상자에 1박스씩 따서 둘이씩 조를 이루어 사과를 고르는
기계가 있는 창고까지 운반하는데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이번에는 배 꽃이 피었을때다
조그만 가지에 배꽃이 피었는데 그 중에서 약 5송이 피었으면 2개정도
튼실하고 건강한걸 남겨두고 3개는 따서 버려야 나중에 배가 커서
상품가치가 있단다 상당히 어렵다 우리 초보자 한테는 빠른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광산구 동곡면이었던거 같다
그리고 다음에 배추 뽑는 일 연탄 나르는 릴레이식으로 서서 날라 준거 같다 그래서 내무부 장관상 2번 우리 애들 상무초등학교 졸업때 모범생이어서 그랬는지 장한 어머니 상을 탔다 또 전남 중학교에서 장한 어머니상 2번탔다
봉사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 한다
봉사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을 적어볼까 한다
지금의 농성동 상록회관 자리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젊은 세대들은 모를거다 10년전만 해도 해마다 벛꽃이 피면 시내 한복판에 꽃잔치가 열렸다 20년전에 꽃잔치는 우리 서구 새마을 회에서 10일정도 음식장사를 했다 각 동 부녀 회장들이 총 출동해서 일찍 시장 봐서 준비하고 오후부터 식사와 술안주 직접 만들어 팔았다
판매수입 돈주머니는 내가 차고 밤 12시에 장사를 끝내고 집에 오면
남편한테 좋은 소리도 못 들었다 그후 조금빠른 11시에 끝내고 들어가도 불만이 많았다 항상 현금이 틀린 적은 없었다
계산을 잘 하고 속이지 않고 양심껏 열심히 했기에 수익금이 그때 돈으로 1700만원정도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광천동 부녀회장이 서구회장직을 맡고 내가 부회장을 맡았다
그 회장님은 사위 따라서 서산으로 갔다 들었는데 연락이 안된다
버스타고 상록회관을 지날때면 창문너머로 그때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60대 초반의 젊음이 있었기에 그 많은 일들을 척척 해낸거 같다
그때 봉사 하셨던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안계신다
지나고 보니 그때는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던거 같다
그 수익금은 연말 때 불우 이웃돕기에 썻다
동회장을 그만 둘 때 선물을 받았다
우리집은 시부모님이 계셔 손님들이 많이 온다 명절 때 음식해서 대접 하려면 내 마음부터 바쁘다
옛에는 설날 쑥 말려 놓은 것으로 춥고 미끄러워도 쑥떡을 해야 했다
쑥으로 인절미를 하면 맛있었다
또 추석에는 송편을 만들었다 지금도 송편은 내가 모싯잎 삶아서 송편을 빚는다 모싯잎이 많이 들어갈수록 쫄깃쫄깃 맛있다
내가 언제까지 일런지는 몰라도 돌아 다닐수 있는 한 송편을 만들 것 같다 애들 싸주려고...
지금도 김장해서 배추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동치미 다 담아서 주곤 한다
김치 낸장고 2대에 항상 김치는 준비 되어 있다
여름에는 줄기가 있는 상추를 밥 많이 갈아 짤박짤박 담아 놓으면
맛있다
여름에는 열무 양파 짱아찌 오이 등밑반찬을 해 놓으면 반찬 걱정이 없다 나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나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 주려고 한다 자싯 한테도 내가 많이 베풀어주고 싶다 그냥 보내면 서운해서
가벼운 야채는 자급자족 한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배추 무를 심어서
사지 않고 김장을 했다 작년 다르고 금년 달라 땅을 팔수가 없어 씨앗
심기가 애매하다 힘이 없어 삽질 하기도 힘들다
지금은 양파 수확해다 2일 말려서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자식들은 밭을 일구지 말란다 행여 아플까봐
지금도 무리하면 무릎옆의 힘줄이 힘들다 손목의 간절이 일을 그만 하란다 그래야지 하면서도 밭에 가봐야 된다는 걱정이 든다
<환갑을 맞이하다>
환갑전에 아들과 두딸을 결혼 시켰다 막내 딸까지 취업이 되고
환갑이 언제 돌아올까 한탄도 했는데 환갑을 맞이 했다
환갑기념으로 우리 아들 내외가 유럽여행을 15박일정으로 보내 주었다
친구들하고 4월에 한팀을 이루어 5백만원정도를 내고 갔던거 같다
런던으로 가는 직항이 아닌 독일을 경유해서 갔다
영국 호텔에 투숙후 다음날부터 여행을 시작 했다
첫 번째 여행지는 버킹검궁전을 조지3세가 사들여 새롭게 건축을 한
건물 이었다 아치 입구에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은 인상적이었고
왕족이 런던 거주지로 1993년에 대중에게 공개했다 한다
버킹검 궁전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름 휴가기간 8월초부터 2달동안 개방 근위병 교대식 광경을 볼수 있다 세계의3대 박물관중 가장 큰 대영박물관을 구경했다 런던 시가지는 산이 없고 공원이 많으며 지붕위의 굴뚝은 방을 표시해 놓은거란다 굴뚝이 5개면 방이 5개라고
유럽문화는 교회와 성당이 차지하고 집들도 거의가 100년 150년 됬어도 튼튼하단다 이곳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일본여자와 살고 불행한 사람은 독일 여자와 살고 있는 사람이란다
런던궁중에는 템즈강이 흐르고 있다
다이애나비가 죽은 주택뒤에는 꽃다발이 큰차로 30대분량 나왔다고
말했다 템즈강 주변에 런던시청은 번데기모양으로 잘도 지어놓았다
웅장함과 멋스러움 우아함 더불어 조상님들의 덕분으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 파리는 종교가 카톨릭이다 언어는 불어를 쓰고 낭만과 예술의나라 유럽의 자존심 팻션으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루부박물관 최고의 바티칸미술관 유럽에서도 대표적인작품 다빈치의모나리자 밀러의 비너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여신..등
네 마리의 말들을 조각한 카르젤개선문도 볼거리었다
파리의상징 에펠탑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옴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서
유람선을 타러 세느강주변 가로수들 시가지를 벗어나 노틀담성당
자유의여신상 배를 1시간20분 탔다 노틀담대성당 Notre Dame 이란
단어에서 알수 있듯이 성모마리아를 위해서 지었단다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동물들은 넓은
초원위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런던과 파리경계선
자연 풍광의 경이로움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벨기에~브르쉘~ 세계 최초로 유화물감을 만들었다고 한다
브르쉘에는 불이 났을 때 60cm소년이 오줌을 싸서 불을 꺼줘
브르쉘시를 지켰다는 동상이 있다 시청사는 고딕양식의 르네상스양식
각종 화려한 건축들이 조화를 이루고 웅장한 건물들 사이에 성심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럽나라는 거의가 카톨릭 신자들의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텔담
튜울립과 오렌지가 생각나는 나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나라
예술성 재능이 많은 램브란트 반아이크 고흐 등의 대화가를 배출한 나라
공예도 뛰어난 나라다 자원이 부족하고 해수면보다 낮은곳에 위치해
지형적으로 어렵지만 근면성과 신뢰성을 겸비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세계대전에 참가한 전사자를 기리는 위령탑 주위에는 왕궁과 왁스박물관등 오래된 건물들의 명소 중심지의 비둘기떼의 한가로움이 눈에 들어
띤다
부채살모양의 운하 풍차마을의 크고작은 풍차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고 긴강변을 끼고 풍차4대가 돌고 있다
그 외에도 나막신과 치즈공장 변덕스러운 날씨 도랑건너 강물이 흐르고
공기가 맑은 히딩크 감독이 사는 나라
이곳 교회는 돈을 내고 예배를 본단다 무역을 해서 먹고 사는 나라
재건축이란 없단다 해저터널 28개 공원 29개 해저터널 둑을 막아서
만든 나라 낚시꾼도 면허를 따야 낚시 할수 있는 나라
동,식물 보호협회가 있어 고사리 꺽다 잡히면 많은 벌금을 내고 산과들은 포도밭이 전부다
독일수도 베를린
인구는 우리나라 약 2배 정도다
맥주의 나라 예쁜도시 오랜역사 1990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로
경제적 혼란을 겪었으나 자동차 화학산업을 기반으로 현재는 건실한
경제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독일어가 공용어 이나 영어도 함께 쓴다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계적 문학가 배출
괴테와 쉴러 헤르만헤세등의 작가와 하이네릴케등의 시인...
또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전세계 클레식 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나라 바흐와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베토벤등
세계거장의 음악가가 모두 독일에서 나왔다
퀼른 대성당의 웅장함에 압도 당하는곳 국제적 수준의 다양한 박람회를
개최하는 국제산업도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있다
아름다운 요정의 노래 Lorelei 언덕 라인강 오른쪽 기슭에 솟아있는
커다란 바위 요정의 바위라는 뜻
프랑크 푸르트 금융과 상업의도시 독일 최대공항이 있고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도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품을 남긴 괴테가 태어나
대학입학까지 16년 살았던 집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독일은 유명 관광지가 많다 하이델 베르크성 엣다리 로덴버그
라인강 마인강 넷쯔강 등
언덕진 야산에는 그림같은 집들이 숲과 나무와 꽃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마을에서 비후스틱과 스프를 먹고 면세백화점에 들러
휘슬러 밥솥과 쌍둥이칼 스텐비누 등을 샀다
현지가이드를 보내고로덴버그로 이동중에 유료화장실을 1유료에 3명씩 썼다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곳 베를린 차범근선수가 운동했던곳
라인강은 흘러 네덜란드로 흐른단다 경찰이 없는 나라 법규를 어기면
평생 운전면허 취소 도로세가 없고 계절은 우리나라와 같다
축복받은나라 GNP 약 3만불
통일된지 30년이 지났지만 서로 헐뜯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