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욕망의 사다리인가?
창세기 38:10-15
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뒤였다. 그는 그 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베개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13.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들였죠.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 사실을 안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도망칩니다. 그리고 하란을 향하던 가던 야곱이 들판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꾼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습니다(창 25:19-28:22).
가나안 땅 브엘세바에 큰 부자인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지만, 하느님의 약속대로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의 나이 60세 되던 해였죠, 먼저 나온 아이는 붉은 털이 많아서 에서라 불렸고, 뒤이어 나온 아이는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기에 야곱이란 이름 주어졌습니다.
이 둘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는데 하느님은 리브가에게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창 25:23)"고 일러주었죠.
형 에서는 활을 메고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들판을 누비는 사냥꾼이 되었죠. 반면에 야곱은 조용히 장막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달랐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장남인 에서를 좋아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 아꼈습니다.
어느 날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지쳐 돌아왔습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은 창백했고 다리는 후들거렸습니다. 때마침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었죠. 배고픈 에서는 야곱에게서 떡과 팥죽을 얻어먹고 대신 장자권을 넘겨준다고 약속합니다. 그때는 그 일이 현실이 될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죠.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삭은 늙어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장자인 에서에게 축복을 주려 했습니다. "에서야, 사냥을 해와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다오.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그 말을 들은 리브가는 서둘러 야곱을 불렀습니다. "네 아버지가 에서를 축복하려 하신다. 네가 대신 축복을 받아야 한다." 야곱은 망설였습니다. "아버지께 들키면 저주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죠. 야곱이 새끼 염소 두 마리를 끌고 오자 리브가는 남편 구미에 맞는 별미를 만듭니다. 그런 다음 염소 가죽을 야곱의 팔에 붙여 털 많은 에서처럼 꾸미고 형의 옷까지 입히죠.
어머니가 들려준 별미와 구운 떡을 가지고 야곱은 떨리는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이삭은 이상하다고 느꼈죠. "목소리는 야곱 같은데…" 그러나 손을 만져 보니 털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다시 ”네가 에서냐?“고 묻지만 결국 ‘’그렇다는 야곱의 대답에 끝내 속아 장자의 축복을 빌어주죠.
그 일이 있은 직후에 에서가 돌아옵니다. 에서는 사냥한 것으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죠. 에서는 자신에게도 축복을 빌어달라고 애원하지만 야곱은 더 이상 빌어줄 복 없다고 대답합니다,.
에서는 분노로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 말을 전해 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외삼촌인 라반의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도망쳐 하란을 향해 가다 광야에서 해가 저뭅니다. 피곤에 지친 그는 돌배게를 베고 잠이 듭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가 있었고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야훼께서 자신 옆에 나타나 ‘지금 누워있는 땅(가나안)을 너와 후손에게 주며’, ‘네 후손은 불어나 사방으로 널리 퍼져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약속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벧엘(하느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이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요?
야곱과 에서는 기원전 2100~1500년 사이로 추정되는 성경의 족장 시대의 사람입니다. 족장 시대란 창세기 12장~50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시대를 말하죠.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까지를 다루지만 요셉을 족장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족장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나라를 만들기 전이었기 때문이죠. 가문은 생사를 지켜주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가문의 통솔자는 장자였기에 장남에게 주어지는 권리 또한 막강했죠. 장남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여 가문의 대표권을 행사했습니다. 재산의 가장 큰 몫을 상속했고 종교적·사회적 권위를 차지했죠.
그런데 이 전통적이고 절대적이었던 가문의 계승권이 뒤집힙니다. 태어날 때부터 경쟁자였던 동생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가로챈 것이죠. 야훼 하느님은 이 두 형제가 두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고 에서는 에돔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이죠. 이 두 민족은 형제이면서 이후 계속된 갈등 상황을 연출합니다.
에돔은 남유다 왕국의 아래인 사해 남동쪽, 오늘날의 남부 요르단 지역에 있었습니다. 험준한 산악 요새 지역으로 홍해로 통하는 아라비아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죠,
이 두 민족은 출애굽 때부터 부딪힙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던 중 형제국 에돔 땅 통과를 요청했으나 에돔 왕은 이를 거부하죠. 이스라엘은 형제간의 전쟁을 피해 가데스 광야에서 호르산으로 우회합니다(민수기 20장).
가나안 정착 후 사울 왕 때 에돔과의 충돌이 있었고 다윗왕은 에돔을 정벌합니다. 솔로몬 사후 왕국이 약화되자 에돔은 독립을 시도했고, 여호람 시대에 독림에 성공합니다. 이후 양국은 수세기에 걸쳐 반복적으로 충돌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갈등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함락 때 발생합니다.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에돔은 형제 민족을 돕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약탈에 참여했고 예루살렘의 몰락을 환영했습니다. 이 때문에 예언자들이 에돔을 강하게 비판하였죠. 성경에서 가장 짧은 예언서인 오바댜서는 거의 전부가 에돔에 대한 심판 선언입니다. "동기인 야곱의 후손을 무참히 죽인 죄로 너희는 치욕을 당하고 영영 망하게 되었다(1:10)"는 것이죠.
기원전 6~5세기 이후 바빌론의 압박을 받으며 에돔은 점차 쇠퇴합니다. 이후 "이두매(Idumea)"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헤롯 대왕도 이두매계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갈등은 개인의 경쟁으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과 에돔의 수백 년 역사 속 갈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민족 대립보다 "형제를 향한 책임과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흥미롭게도 두 형제는 개인적으로 화해했지만, 두 민족은 오랫동안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갈등, 이스라엘과 에돔의 충돌은 단순한 민족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혈연적 형제도 이해관계 앞에서는 적이 될 수 있다는 것,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죄라는 경고로 읽어야 합니다. 오바댜서가 비판하는 것은 에돔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고난받는 형제를 외면한 태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6.3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이번 선거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선거였죠. 내란 세력의 완전한 심판이라는 염원이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찜찜합니다. 전체적인 판세로 보면 민주당의 대승입니다. 하지만 12,3 내란이 있었고, 그 주동자들이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도 선거결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주고 있습니다.
선거전 모든 여론조사가 민주 진영의 압승을 예견하였고, 출구조사도 그에 부응했습니다. 하지만 받아든 결과는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죠. 승리가 예상되었던 서울과 경남에서 광역단체장 자리를 빨간당에 내주었습니다. 내란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추경호, 한동훈이 당선되었습니다. 온갖 불법을 저지른 윤석열 방통위 출신 이진숙과 김태규도 금뻿지를 거머줬습니다.
평택을은 민주당 귀책 사유로 치러진 선거인데 빨간당 출신 김용남을 전략 공천함으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모두 집약시킨 선거가 되었죠, 진보당 김재연 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황교안 등이 출사표를 던진 가운데 민주당 뉴 이재명 세력이 뛰어들어 결국 빨간당에 헌납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민주진영의 차기 대선 후보였던 조국의 위치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민주당 뉴박 세력이 잠재적 대권 주자인 조국을 견제하려 했고, 평택을 선거의 목표가 조국 낙선이었다는 평가도 들려옵니다.
이번 선거를 보며 다가올 정치지형을 우려하는 이들은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은 민주당내의 권력다툼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습니다. 통일된 선거전략이나 구호도 없었고, 너무 오만한 태도로 임했다는 것이죠. 김용남 비리 의혹이 끝없이 터져 나와도 당원들을 협박하며 민주당 후보이니 무조건 지지하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선거 결과를 만든 것은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반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지적이 옳은 것 같습니다. 민족적 대 전환 시기에 내란 세력을 완전히 박멸할 기회를 뉴박세력들이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방해했다는 것이죠. 뉴 이재명을 외치며 공소취소 모임을 만들고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며 문재인, 조국, 김어준, 정청래, 유시민을 싸잡아 비난하는 무리들이 벌인 짓들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출세길만 보였나 봅니다.
저는 외부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이번 선거를 치루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거는 차선울 뽑는 것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것이라는 자조섞인 목소리의 의미도 알게 되었고,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 중 진정으로 어떤 가치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인간 됨됨이를 갖춘 후보자는 욕심 가득한, 불법도 예사롭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밀려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트 선거의 모순을 생생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유시민 작가가 주장했던 가치와 욕심, 그 중간 어디엔가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는 소위 ABC 이론 중 가치 쪽에 해당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욕심에 가득차 있어 가치와 욕심 사이에 있는 이들 조차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죠. 민주당 내에도 자기 욕심 채우려는 이들이 대다수이며 그런 풍토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이번 응원봉혁명도 다음 대선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생기는 것은 저뿐만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노자 도덕경 66장에는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는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니라. 고(故)로 능위백곡왕(能爲百谷王)이니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강과 바다가 세상의 모든 골짜기들의 임금이 되는데 그 까닭은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강과 바다가 골짜기보다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이 당연한 사실에 대해 노자는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들의 아래에 있기를 좋아한다[善], 혹은 잘한다[善]고 해석합니다. 이 표현이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무엇인가요? 도를 따르는 이 세상의 이치는 자명하지만 그것이 사람 손에 들어오면 왜곡되기 일쑤여서 애써 도의 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조의 의미가 아닐까요?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할 것은 골짜기나 강, 바다라는 표상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모든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물은 골짜기와 강, 바다를 통해 순환을 하죠. 바다의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 올라가 구름을 만듭니다. 구름의 물방울들이 무거워지면 비가 되어 땅으로 내리죠. 빗물은 골짜기로 흘러들고 골짜기는 시내가 되어 물을 강과 바다로 흘려보냅니다. 이 순환이 순조로울 때 모든 생명은 빛을 발하게 되지만 이 순환이 막히면 천하의 생명들은 몸살을 앓고,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인생살이로 따진다면 계곡(谷)과 강(江), 바다(海)는 각각 자신들의 삶의 자리라 볼 수 있습니다. 규모가 작거나 조금 큰 골짜기가 자신의 자리일 수도 있고, 강의 상류나 하류, 그중 어떤 지점이 자기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가까운 갯벌, 혹은 먼 바다일 수도 있죠. 각자 맡은 자리가 자신과 걸맞는 자리라면 보다 인생살이가 순조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계곡, 강, 바다를 통해 흐르는 물이 자신의 인생 항로라고 본다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순리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혹 장애물이 생기더라도 기다렸다가 넘어가거나 휘돌아 내려가야 하는 것이죠. 지름길을 찾는다고 거꾸로 거슬러가거나 없는 길을 만들려고 하다간 인생만 고달파지게 될 뿐입니다. 자신이 있을 자리를 잘 알고 물처럼 순리를 따라 흐른다면 보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스런데 강과 바다가 백곡의 제왕이 되려면 순조로운 순환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표현이 바로 ‘선하지(善下之)’, ‘아래 있기를 좋아한다’의 의미가 아닐까요? 강에 보를 박아 물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바다에 둑을 쌓아 갯벌을 죽인다면 이 생명의 순환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어 이 순환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선거는 욕망의 사다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치루며 강하게 든 생각이었죠. 우리가 택한 이 선거제도를 가지고 세계를 이끄는 민주주의의 모범을 세울 수 있을까? 라는 회의도 생겼습니다. 야곱이 꿈에 경험한 ‘사다리’가 주는 의미가 새삼 다가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형과 경쟁을 했죠. 호시탐탐 장자권을 노렸고 속임수로 장자의 축복까지 가로챕니다. 그리곤 형의 진노를 피해 그 많은 재산과 지위를 포기하고 도망치죠. 성공을 노렸지만 광야에서 돌배게를 베고 누었을 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하느님은 사다리 꼭대기에 있지 않고 야곱의 곁에 서 있었죠. 벧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야곱에게 하느님이 친히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쫓겨난 사람, 미래가 불안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회적 약자의 곁에 먼저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다리는 2개의 의미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을 따라 올라가는 사다리, 또 하나는 은총이 내려오는 사다리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다리의 용도를 올라가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곱의 사다리는 낮아짐의 사다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생의 가장 낮은 순간에 처한 야곱을 찾아왔고, 가장 위대한 약속을 해 주셨죠,
많은 사람들이 선거를 통해 사다리를 오르려고 합니다. 더 높은 권력, 많은 돈과 명예를 거머쥐려고 말이죠. 그런데 그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은 그들이 오르는 욕망의 사다리를 붙들어 줄 뿐 그 이상은 없습니다. 욕망의 사다리애 오른 당선자들은 그들이 기어 올라왔던 땅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단하게 사다리를 붙들어 준 몇몇 사람하고만 달콤한 열매를 나눌뿐입니다.
그렇다고 욕망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성이기 때문이죠. 선거가 욕망을 표현하는 공간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순 없는 것입니다.
선거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면 욕망의 사다리가 될 것이고,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수단이 되면 봉사의 사다리가 될 것이며, 국민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이 되면 희망의 사다리도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선거에 임하는 출마자와 유권자들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정치인과 유권자의 성숙함이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이 기제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주권의 확립,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수적입니다.
권력의 집중이 아닌 분산,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대책이 강구되어야 합니다. 엘리트를 뽑는 선거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공간도 열어주어야 합니다. 요즘 서구에서 시행되고 있는 ‘시민의회’ 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라 생각됩니다. 선거제도나 사회대개혁과 같이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들은 국민 구성의 축소판인 추첨 방식의 ‘시민의회’를 통해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죠.
이번 선거는 민주당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이재명 정부가 이 민의를 잘 파악하고 무뎌진 개혁의 칼날을 다시 벼릴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나은 미래를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도록 우리 국민들이 더 지혜로와 지기를 바랍니다.
벧엘의 하느님이 이 민족을 들어 써 세상을 이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