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란 무엇인가?
| 3, 40년 전만 해도 과학이란 실험실이나 강의실에서 주고받는 과학자들의 대화 속에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은 세상의 중심에 놓여 있다. 과학이라는 단어는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대중 매체들에 나오는 광고를 보면, 과학의 권위를 빌어 소비자들에게 상품에 대한 신용도를 높이려고 ‘과학’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함을 보게 된다. 사회적 초점이 되는 여러 사건을 봐도 과학이 이제는 생소한 분야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 현상, 광우병 파문, 줄기세포 연구, 원자력 발전소 건설 등의 사건들 한가운데에 과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쉽게 답을 하는 이가 드물다. 과학이 우리 생활과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나, 여전히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은 어렵고 지루하지만 최근 출간된 과학책들을 보면서 과학의 본질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겠다. 언제든 의심하며 생각을 열자 과학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라면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과학자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는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 천재로 평가되기도 하는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파인만은 1986년 챌린저 호가 발사 직후 폭발한 이유를 가장 먼저 밝혀내기도 했고, 자신을 초능력자로 주장한 유리 겔러가 사실은 사기꾼임을 실험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특히 파인만은 어려운 물리학 이론을 초보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강연하고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 초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는 전 세계 물리학도들에게 전설적인 책이고, 우리 나라에서도 번역되어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의약품의 발달은 더없이 기쁜 일이지만, 질병을 정복함으로써 출산율은 높아지고, 사망률은 현저히 줄어들면서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구 증가로 인한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 문제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심지어 박테리아에 관한 지식 하나만 보더라도 어떤 과학자는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지식을 사용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생물전 무기로 치명적인 박테리아를 비밀리에 개발하는 일에 이 지식을 사용한다.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13~14쪽) 그리고 파인만은 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의심할 수 있는 자유는 과학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이는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자신의 무지함을 떳떳이 인정하는 철학과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얻어 낸 진보의 가치를 아는 과학자로서 이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유의 가치를 알리고, 의심이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며, 인류의 새로운 잠재 능력을 가능케 하는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느낀다.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44쪽) 파인만은 두 번째 강연에서는 과학의 영역과 한계, 특히 과학과 종교(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의 생각을 정리하면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라고 했던 아인슈타인의 말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위대한 유산 위에 건설되었다. 하나는 과학적 정신으로서의 모험이다. 이는 진리를 향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이며, (……)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의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인간 지성에 대한 겸허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싶다. 다른 위대한 유산은 기독교적 윤리인데, 여기에는 사랑의 실천, 모든 인류를 향한 형제애, 개인의 인간적 가치 등이 포함된다. 이는 ‘영적인 겸허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69~70쪽) 그리고 ‘비과학적인 시대의 한복판에서’라는 제목의 마지막 강연에서 파인만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한다. UFO는 정말 존재할까? 올바른 정치인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초능력 독심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흥미로운 예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파인만은 우리는 눈앞의 진실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가, 질문하면서 과학의 역사는 우리 능력을 맹신하지 말고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로 질문을 던질 때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학은 우리 모두의 교양이어야 한다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 읽기』의 저자 김보일은 현직 고등학교 교사이다. 그는 인문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은 눈치이다. 그는 인문학자의 눈으로 볼 때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흥미로운 소재들을 통해 제시한다. 단지 골치 아프게 외워야 할 지식이거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로만 과학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에게 과학이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자 하는 21세기 모든 인류가 알아야 할 교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가 과학을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을 사유할 때, 우리는 과학이 가져다 준 편리함과 빠름을 무조건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인류와 생태계의 공존을 모색하는 지혜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지혜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성찰적 지식이다. 과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고 생각해 왔다. 무지가 우리를 구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응당 ‘앎’이 필요하다. 이때의 앎은 (……) 과학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과연 정당하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성찰의 앎’을 뜻한다. 과학은 (……)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성찰적 지식이기도 하다. 세계의 시민이라면, 아니 생태계의 일원이라면 누구도 이 성찰적 앎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 읽기』 7쪽) 이 작가는 과학을 사유하기 때문인지 과학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 그는 글에서 ‘순수한 물은 독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유의 결과, 자연은 본래 순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자연은 온갖 생물들이 삶을 영위하는 터전이므로, 본래 순수할 수 없는 공간이다. 물 속에서는 수많은 생물들이 유영하고, 숲 속에서는 온갖 동물들이 먹고 배설하고 죽고 썩어가고 있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먹고 먹히는 공간, 죽은 동물 시체 위에서 구더기가 꼼지락거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연이 순수하다는 생각은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보일 작가는 자연이 순수하다는 생각은 단편적인 사유의 결과이고, 그 결과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는 생각을 전한다. 그 예로 우생학의 문제점을 들었다. 우생학이란 사람의 능력이나 성질이 선천적으로 유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가정하고, 이것을 잘 조절한다면 정신적 신체적으로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과학 논리를 근거로 탄생한 유전학의 한 분야이고,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할 생각을 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내 민족의 피만이 순수하고 타 민족의 피는 순수하지 않다는 ‘깨끗한 피’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이 같은 대량 살육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우리의 신만이 진리이고, 타민족의 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믿음 또한 역사상에서 숱한 종교 전쟁을 불러 왔다. 순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결국 비극으로 이어진다.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 읽기』 59쪽) 과학은 이제 우리 속에 들어왔다 『홍성욱의 과학 에세이』를 쓴 저자는 과학과 관련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바빠지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우리 시대에 과학이 불러오는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서 자기 소리를 내는 지식인이다. 그는 과학을 사회 속에 위치시키고, 사회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과 과학의 상호 침투를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문화적인 접근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사실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인문 사회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 역사 및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크고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기를 원한다. 그는 머리글에서 이 책을 “독자들이 과학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한 번 더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문가는 전근대적인 과학 개념을 운운하면서 국민이 느끼는 총체적 공포를 무지와 선동의 결과로 몰아간다. 과학에 대해서 조금 아는 사람들은 광우병 확률을 계산해서 각종 희귀한 병보다 광우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더 적다고 말한다. (……) 위험 커뮤니케이션은 확률 교육이 아니다. 위험은 정상적인 과학 커뮤니케이션으로는 설명도 되지 않는다. 지금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 하나만 아는 전문가들이 과학의 이름을 걸고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홍성욱의 과학 에세이』 167쪽) 그동안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과학이 우리 속으로 들어왔다. 천재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던 복잡한 과학이 우리들 모든 문제에서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문제는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이다. 그 생각에 따라 과학은 천국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고, 지옥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과학을 생각하는 범위는 고작 과학 기술의 발전이 무조건 바람직하고 국가 경쟁력을 키워 줌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소박한 믿음뿐인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나는 여러 사회 문제를 볼 때 과학은 소박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 이제 우리 모두 스스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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