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말은 사람이다

작성자해피 Banker|작성시간23.01.17|조회수41 목록 댓글 0

글은 사람이다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습니다만 그 속뜻에 대해서는 딱히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든 글에는 각기 자기 얼굴이 있어, 글을 보면 누가 쓴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라는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거기다 인간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존재다’라는 생각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글은 사람(되기)이다’로 진화한 셈입니다.
글쓰기에 있어서의 ‘나르시시즘’ 문제도 그런 진화의 한 과정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르시시즘은 모든 글쓰기에 동력(動力)을 제공하는 것이면서(프로이트) 동시에 그것의 미학적 수준을 제고하고 제어하는 이중적인 요소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유치한 글이 되고, 그것을 적절히 승화시키면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제 잘난 맛’ 없이는 ‘자기 표현’은 없습니다.
페이스북에서도 그 ‘제 잘난 맛’에 휘둘리는 포스팅은 강호 제현의 제대로 된 호응을 받지 못합니다.
‘제 잘난 맛’이 아름다운 경지를 획득할 때에만 '귀명창'들의 적극적인 격려를 받습니다.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쌍방향 소통’이 ‘글은 사람(되기)이다’라는 명제를 더욱더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글(표현)은 일종의 자기 투쟁이고 자기 극복입니다. 역설적인 인정 투쟁입니다.

크게 보면,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본성에 속합니다.
상처에 대한 반응이 만들어낸 보호색입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것들은 인성(人性)을 구성하지 못합니다.
숨어 지내거나 위장막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인성에 저항합니다.
글쓰기의 동력이 되는 나르시시즘은 그래서 긍정적입니다.
인성에 저항하는 것들을 어루만져 인성 속으로 들어오도록 순치시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글 쓰는 자의 나르시시즘은 그 과정에서 두 갈래 경로를 택합니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상처)에 ‘사로잡힌’ 글쓰기, 다른 하나는 나르시시즘(상처)을 ‘다루는’ 글쓰기입니다.
일반적으로, ‘글은 사람(되기)이다’를 지향하는 글쓰기는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갑니다.
그래야 전문적인 글쓰기가 가능해집니다.
보통 시인(지망생)이나 작가(지망생)들은 그런 경지에 도달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정해진, 공적인 인정을 받습니다.
한 예로 작가 신경숙의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물론 사견(私見)입니다.
그 경우가 제게는 그런 경지를 잘 보여준 예가 됩니다.
데뷰작 「겨울우화」에서 출세작 「풍금이 있던 자리」로 나아가는 궤적이 제가 보기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전자에서는 ‘사로잡힌’ 차원이었던 것이 후자로 가면서 ‘다루는’ 차원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 뚜렷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수준에서의 ‘사로잡힌’ 글쓰기와 ‘다루는’ 글쓰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신경숙은 ‘경지 이동’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케이스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이동’은 절차탁마의 소산일 것입니다. 미숙한 정신이 토해내는 ‘나르시시즘 글쓰기’와 성숙한 정신이 만들어내는 ‘나르시시즘 글쓰기’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글자 몇 자의 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절반은 고양이 새끼고 절반은 양인 별난 짐승 한 마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 소유였다가 상속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으로 된 것은 내가 데리고 있는 동안이고, 전에는 고양이 새끼보다는 훨씬 양에 가까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쪽 요소를 같게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고양이로부터는 머리와 발톱을, 양으로부터는 크기와 모습을, 양쪽 다로부터는 가물가물하면서도 야성적인 눈, 부드러우면서도 착 달라붙은 털가죽, 폴짝폴짝 뛰면서도 살금살금 걷는 몸놀림을 물려받았다.
창턱에 내린 햇볕 속에서는 몸을 동그랗게 오그리고 골골거리고, 풀밭에선 정신없이 내달려 통 잡히지를 않는다.
고양이들 앞에서는 도망치고, 양들은 공격하려 들지 않는다.
달 밝은 밤이면 처마가 제일 다니기 좋아하는 길이다.
야옹 소리는 못 내고 쥐는 싫어한다. 닭장 곁에서 몇 시간이고 매복할 수 있기는 하지만 잡아죽일 기회를 이용한 적은 아직 없다.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 『변신․ 시골의사』, 민음사, 2004]

인용문은 카프카의 「트기」라는 작품입니다.
작가가 자기 안의 ‘부조화와 불안’에 대해서 쓴 짧은 글(손바닥 소설)입니다. 언젠가부터 거의 양(羊)의 모습이었던 자신의 성정(性情)이 그 절반을 고양이 모습에게 내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양보다는 고양이 쪽에 무게가 좀더 실린 자기동일성이 엿보입니다.
고양이가 무엇을 표상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세련되고 이기적인 태도, 유전적인 공격성’ 같은 그것의 속성이 전경화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앞서 말한 ‘부조화와 불안’을 드러내기 위한 모종의 수단인 것 같습니다.
본래 고양이는 능숙함, 지혜로움, 주도면밀함 등과 같은 것들과 가까운 동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지켜내는 ‘자기만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그 놈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합니다. 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습니다.
그것도 불안의 요소이고 그런 생각도 불안의 표징입니다. 그러니가 이 짧은 소설은 그저 ‘나는 불안하다’를 길게 늘여놓은 글에 불과합니다. 물론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서 쓴 글이고요. ‘고양이’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환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줍니다. 대체로 횡설수설입니다. 아직은 자기 분석(나르시시즘 분석)이 완료되지 못한 느낌입니다.

인간을 이루는 부품은 본디 조악(粗惡)합니다.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제 각각이지만,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정말이지 한 마리의 개미, 한 줌의 흙먼지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미물스러운 것들이 홀로 제 몫을 다하고 혹은 서로 연결되어 우주의 작용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볼 때면, 신통방통, 놀라운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부품은 조악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있는 완성품 인간들을 볼 때면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몸에서도 그렇고, 정신에서도 그렇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모든 ‘경탄할 만한 것’들의 존재 역시 그나마 나르시시즘이 있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 잘난 맛이 없이는 어떤 넘어섬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것 없이는 글쓰기도 애초에 없습니다.
문제는 나르시시즘입니다. 내 것 네 것 가릴 것 없이 나르시시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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