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제2탄을 올리며
이제 청산에의 이야기 제2탄을 올립니다.
20여 년 넘도록 불지방 회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눈팅만 해 오던 제가, 2025년 12월 무언가에
이끌려 처음으로 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청산에 남창균, 남 1949년 서울"
이라는 자료만 덩그러니 회원 명단에 걸려
있었으니, 여러분 입장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유령 회원이었을 것입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두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듯, 저 역시 회원이라 부르기
민망한 처지였지요.
더구나 얼마 전 6월 초에
"이실직고를 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올리면서도 사는 곳조차 밝히지 않았으니,
버르장머리 없는 아우 오빠인 것만은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잠시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올린 글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어,
이 제2탄에서 제가 살고 있는 곳도
자연스레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제1탄에 이어 앞으로 몇 편이
더 올라갈 것은 충분히 자료가 예상되는 일이나—
얼라들도 엉석 깔고 앉으면 못 일어난다 했듯—혹여
회원님들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제 정신이 돌아와
조용히 몇 편에 접을 수도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회원님들 모두 평안하고
청량한 6월 되시기를 두 손 모아 소망하며,
제2탄의 인사를 이것으로 마칩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청산에 남창균 드림
추기 :
웬만하면 이런 창에 사진 올리기 어렵지 않은데
불지방 안방에 글 올리며 사진이 제대로 들어 가지
않아 못 올린 적 있습니다.
다음 카페에서 이런 지원에서 착오가 있는지
제가 너무 그것을 모르는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의 글은 컴퓨터에서 올리는 것 입니다.
*** *** ***
계절을 바꿔 살다
— 대한민국에서 뉴질랜드로, 두 삶의 기록 —
첫 번째 삶 · 1949–1982, 대한민국
내가 태어나 자란 1949년부터 1982년까지,
서른세 해의 한국 삶은 격동의 세월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과 전쟁의 폐허,
그리고 산업화와 재건,
수출의 물결 속에서 이른바 '빨리빨리'
정신이 온몸에 배어들었다.
해마다 새해는 한겨울 눈보라와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정월에서 시작되었다.
설날의 떡국과 새 옷인 설빔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 오면
산천초목의 싱그러움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먼 산자락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내 어린 꿈과 함께 속삭이던 시절이었다.
낮이 길어지는 여름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집 주위로는 잠자리 떼가 날개 짓을 하며 맴돌았다.
참외와 수박의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기다려지는 계절이었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면 풀벌레 울음이 들리고,
찬 서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매서운 겨울로 접어들었다.
동지를 지나 크리스마스 성탄 노래를 들으며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매년의 리듬이었다.
이러한 사계절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나는,
1982년 10월 말 조국 대한민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왔다.
두 번째 삶 · 1982–, 뉴질랜드
떠나기 전 서울 주재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소개 책자를
얻어 이 나라에 대해 미리 읽어 두었건만,
도착 당시는 봄 시즌이어서 가볍게 잠바 하나 걸치고
남섬의 더니든과 퀸스타운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높은 산 정상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고,
봄옷 차림으로는 추위를 이겨내기 어려워
첫인상이 혹독하게 다가왔다.
11월, 12월이 되자 낮이 점차 길어졌다.
12월 22일, 해가 넘어간 저녁 아홉 시 반에도
하늘이 훤했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이상했다.
한국에 남은 가족은 흰 눈 날리는 추위 속에서
성탄을 즐길 텐데,
이곳은 낮이 길고 기온마저 차차 오르고 있었다.
내 몸은 아직 이 낯선 계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2월 31일 짧은 밤을 보내고
1983년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도 묘했다.
33년간 새해란 한겨울의 시작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한여름 한복판이었다.
달력은 분명 1월 1일이고 한 살 더 먹는 것도 분명한데,
그 느낌이 도무지 스며들지 않았다.
설상가상, 12월부터 길가의 가로수에는
붉은 체리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고,
1월과 2월에는 온갖 과일과 활짝 핀 화초들이
새 세상의 빛깔을 내 눈 앞에 펼쳐 보였다.
그것은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3월에 들어서자 큰 잎사귀의 나무들이
살짝 노랗게 물들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의 가을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빗소리는 멀리 떨어진 가족—처와 아들 종효—
이 그리운 마음에 스며들어,
내 마음도 흠뻑 젖게 하였다.
기억 속의 계절들
한국에서의 1월은 곧 구정을 기다리는 설렘이었다.
달력마다 달라지는 음력 설날—
1월 말이거나 2월 초—을 손꼽아 기다렸다.
제삿상이 치워지고 떡국 한 그릇을
먹어야 비로소 한 살이 더해지는 셈이었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오곡밥을 먹고,
연 날리기와 깡통 쥐불 놀이를 했다.
늦은 밤 훤하게 뜬 보름달 아래,
어머니는 단지 위에 맑은 냉수 한 그릇을 떠 올리고
가족 모두의 한 해 안녕을 빌었다.
그 보름날엔 재미난 기억도 있다.
큰누님이 선물로 사 준 새 나일론 양말을 신고
쥐불 놀이를 하다가, 높이 던진 불꽃이 그만
양말에 닿아 구멍을 뻥뻥 내고 말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큰누님이 새삼 떠오른다.
그 시절, 새로 나온 나일론 양말 하나가 얼마나
큰 설렘이었는지—
지금의 눈으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2월 말의 졸업식에서는 보내는 이와 떠나는 이가
함께 부르던 졸업가의 선율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3월 새 학기의 첫날, 새 학년이 주는 설렘과
각오는 모두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4월과 5월은 이른바 보릿고개였다.
겨우내 말려 두었던 배추·무 시래기에 보리를
섞어 죽을 쑤어야 했던 춘궁기, 배고픔을 참으며
버텨야 했던 그 시절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의 자녀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때 나라는 그만큼 가난했다.
6월 6일 현충일에는 조국의 강산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어린 가슴에도 새겨졌다.
6월 25일이 되면 200여만 명이 목숨을 잃고,
1000여만 명의 이산 가족을 남긴 6·25전쟁의
상처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7월과 8월은 뜨거운 여름이자 여름방학의 계절이었다.
살구, 오이, 토마토, 참외, 수박, 밤, 사과, 배—
그때의 과일은 몇 가지 없었지만,
제철 과일 하나하나가 얼마나 반갑고 맛있었던지.
뇌염이나 태풍 소식이 들려와 가슴을 철렁이게
하던 것도 그 시절의 여름이었다.
9월이 되면 벼 이삭이 누렇게 익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추석이 찾아왔다.
음력 팔월 보름, 강강술래의 노래와 함께
조상 대대로 내려온 명절의 풍요로움이 온 가득했다.
10월에는 단풍이 붉고 노랗게 물들고,
학교 소풍과 운동회가 기다렸다.
11월부터는 추위가 피부로 느껴지고,
12월 22일 동지를 지나 크리스마스와 겨울방학이 오면
한 해의 마지막을 정리하게 되었다. 12월 31일,
방송국의 제야 중계방송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것—
그것이 내가 33년간 살아온 1년의 리듬이었다.
에필로그
이곳 뉴질랜드에서의 삶이 이제 44년을 넘어.
한국에서의 33년과 이곳에서의 44년—
두 삶은 계절로 보자면 정반대의 세계다.
이제는 이 남반구의 계절이 몸에 익어,
오히려 조국 한국의 계절 흐름이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기억들—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봄 산,
잠자리 떼 맴돌던 여름날,
보름달 아래 어머니의 기도—은
오늘도 마음 한켠에 선명하게 살아 있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청산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7 영은님
언제나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만큼 이야기 보따리도 제법 쌓인 것 같습니다.
기쁘고 웃었던 일도 있었고, 힘들고 아팠던 일도 있었지요.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제 삶의 반 이상이 흘렀으니,
그 세월 속에 담긴 이야기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보따리를 한꺼번에 풀어 놓았다가는 읽으시는 분들이 지치실까 봐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천천히 풀어 보려 합니다. ㅎㅎ
안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낯설고 배우는 중이지만,
영은님을 비롯한 여러 회원님들의 따뜻한 관심 덕분에
조금씩 정을 붙여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며 좋은 인연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가을나라 작성시간 26.06.17 뉴질랜드의 이민사는 어떤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아름답고 자연 친화적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많은분들이 한국이 싫어 이민을 떠났는가 궁금해합니다만,
저의 경우는 대학에 갈 형편이 안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
택한 이민입니다. 물론 저의 어머님이 정하셨고 저는 따르는
입장이였지만, 어머니의 큰 뜻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욱 기대가 되네요. -
답댓글 작성자청산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7 가을나라님
관심 있게 읽어 주시고 따뜻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분들이 "왜 이민을 갔을까?"
하면 한국이 싫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저마다의 사연과 꿈,
그리고 가족을 위한 선택이 더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가을나라님께서도 대학 진학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어머님의 큰 결단으로 새로운 길을 선택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안에는 자녀들의 미래를 위한 부모님의
깊은 사랑과 용기가 담겨 있었겠지요.
어느덧 뉴질랜드에서 보낸 세월이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훨씬 길어졌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이민 역사와 교민 사회의 변화,
그리고 제가 처음 정착하며 겪었던 시행착오와
웃지 못할 이야기들도 앞으로 기회가 되면
조금씩 풀어 보겠습니다.
그 시절의 이민은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으니까요.
가을나라님의 이야기도 언젠가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민자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어도,
지나고 보면 비슷한 고민과 희망을 품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함께 추억을 나누며
재미있게 이야기 이어가겠습니다. ^^
(호형호제에 찾아 봐도 가을나라님은 없어요 -
답댓글 작성자콕언냐 작성시간 26.06.17 청산에 가을 나라님도 재 가입하면서 닉이 바뀜...전에 닉은 봄나라 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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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청산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콕언냐 잘 알겠습니다.
새로움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