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로 떠나는 나의 여정 (1)
1. 출발 — 1982년 11월 1일, 김포에서 뉴질랜드로
1982년 11월 1일 월요일 오전 11시,
나는 김포공항에서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짐을 챙기고,
아직 잠든 아들 종효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처와 장인·장모께 인사를 드렸다. 처삼촌의 차가
한강 바람을 뒤로하고 강변도로를 달렸다.
공항에서 김ㅇㅇ 사장님 내외를 만나
처음 경험하는 탑승 수속을 도움받았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서해안 바다와 서울이 멀어졌다.
홍콩에 도착해 하루를 묵은 뒤,
이튿날 저녁 Cathay Pacific으로
뉴질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홍콩 체류 중 하모니카 하나를 샀다.
'외로운 고향 생각이 사무치면 이것으로 달래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파푸아뉴기니 포트모르즈비를
경유해 총 열몇 시간의 비행 끝에
1982년 11월 3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닿았다.
2. Dunedin 도착과 녹용 건조 작업의 시작
오클랜드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해
늦은 오후 더니든에 도착했다.
John Scandrett와 Peter Townsend가
마중을 나왔다.
새로 지은 녹용 건조 공장에 들러 짐을 내려놓고,
한국에서 동행한 일행 5명이 렌터카로
Queenstown까지 약 310km
(총 실주행 900km)를 달렸다.
퀸스타운의 아름다운 호반과
눈 덮인 산봉우리에 감탄하면서도,
11월 초 봄바람은 속살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인근 대형 사슴 농장을 방문해 전기톱으로
녹용 자르는 장면을 목격했고,
흘러나오는 사슴 피를 양주에 타 마시며
'이것이 한국에서는 보약인데' 했다.
더니든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건조 작업이 시작되었다.
생 녹용을 스팀 찜통에 30초씩 세 차례 쪄서
터진 부분을 끈으로 동여매고 건조실에 넣는 과정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했다.
큰 선풍기 소리가 가득한 건조실에서
한 치의 실수도 부패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항상 신경이 곤두선 작업이었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스카이블루 작성시간 26.06.19 청산에 맞습니다 25년전 까지만해도 한국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정도로 경제력과 수만가지를 들어봐도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이었고 호주나 뉴질랜드중 한곳을 선택해야 하는데 뉴질랜드는 경찰청 고위직 에세 퇴직한
친구가 먼저 이민을 갔고 나를 곁에 두고픈 마음이 대단했구요 그래서 호주엔 선배가 불러 줬으며 투자 이민은 재산이 15억 이상을 한국감정원 평가 증빙이 있으면 15점 인정으로 가능 하지만 사감도 아니고 한국감정원 감정은 어찌나 까다로운지
실가격보다 한참 높아야 하는등 이민 자체가 참으로 힘든 시기였지요!
나는 미8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생활영어 회화가 가능하지만 아내가 힘들것 같다니까 딸친구가 있는데 자기엄마도 괜찮다며 안심도 시키는 바람에 90%는 이민쪽으로 굳힌상태 에서 접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상상을 초월하는 삶을 즐기며 살고있어서 후회는 안하고 살아갑니다 -
작성자새벼기 1 작성시간 26.06.18 82년도면
한국이 한참 어수선할땐데
나가셨군요
녹용사업을 시작했나 보네요 -
답댓글 작성자청산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새벼기 형님
1982년 당시 한국은 아직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사회 분위기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지요.
다만 제가 녹용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고,
뉴질랜드 취업이 우선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녹용 관련 회사에서 근무 조건으로
현지에 정착하게 되었지요.
당시 뉴질랜드는 사슴 농장 녹용 산업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라
저도 그 흐름 속에서 일을 하게 된 셈입니다.
덕분에 지금 생각해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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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우두머리1 작성시간 26.06.18 말로만 듣던 녹용 사업을 하셨군요 ..
그런대 녹용은 한방인대요 뉴질란드에서 하셨다니 의외입니다.
고생 좀 하셨겠네요
그걸 판매하는것도 쉽지 않았을텐대요
동물 보호니 이런거 ...걸리지 않았나요.
다음이 기대댑니다. -
답댓글 작성자청산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우두머리님
뉴질랜드는 의외로 사슴 산업이 매우 발달한 나라입니다.
사슴을 목장에서 사육하며 녹용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산업이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지요.
동물 보호 문제도 엄격한 규정 아래 관리되었고,
녹용 채취 역시 정부의 감독과 수의사의
관리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에는 한국과 아시아 시장의 수요가 많아
산업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앞으로 글을 이어가면서 그 시절 이야기도
조금씩 풀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