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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선교

창세기 4장 -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갑바도기야 데린구유)

작성자한갈렙목사|작성시간19.07.25|조회수666 목록 댓글 0

창4. 갑바도기야 데린구유

갑바도기야 데린구유.

 

 

창세기 4장 -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갑바도기야 데린구유)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은 눈이 밝아져 하나님이 선하다 하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으로 구분하여 선과 악을 판단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선과 악을 기준해 놓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악하다 하는 것을 선하다 하고 내가 선하다 하는 것을 악하다 하며, 나는 정말 싫어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정말 좋아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 적대하게 되고 그렇게 사람들은 갈라지게 되고 서로 싸우고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모든 것을 주면 사람이 변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격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인격체는 내가 아무리 선하게 대하더라도 그는 나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오직 그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움직입니다.

나는 산을 좋아하지만 산을 오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은 인격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말은 단편적이고 단순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복잡하고 입체적입니다. 같은 한국말을 하지만 의사소통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좋다.’ ‘싫다.’는 말은 알아듣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과 네가 좋아하는 것의 실체가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글과 말과 뜻이 어렵다.’합니다.

성경이 어려운 이유는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버지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내가 아직 젖을 먹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고 그 뜻을 이해하고 알고 배우기 위하여 힘써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이러합니다.

 

[가인의 형제 살인]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1절.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땅에서 허리가 아프도록 일을 합니다. 한편 하와는 해산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제 회개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고난과 고통과 눈물 가운데 하나님을 구하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던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을 구할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성경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얼굴을 대면하며 서로 몸을 부대끼며 산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했던 영적인 사람이라 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아이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희망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 때문에 죄 없이 죽어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었던 양을 기억하고 동일하게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그 가죽을 새로 태어난 가인의 옷을 만들었습니다.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2절.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 가인에 이어 둘째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이 태어났을 때와 같이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주고 자기들이 에덴에서 했던 악한 일들을 생각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를 따라 농사하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양치는 일을 했습니다.

가인도 아벨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를 지켜보던 가인의 생각이 달랐고, 아벨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3절. 가인의 생각은 땅에서 농사지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복을 비는 것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복을 구하였습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을 섬기고 순종하며 열심히 일하여 많은 소출을 내었습니다.

가인은 오랫동안 제사를 준비하고 큰 제단을 쌓고 정성을 다하여 소홀함이 없이 자신의 소출 중에 가장 귀하고 좋은 것들로 준비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많은 소출을 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고 축복을 구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8:11-12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가인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이 들립니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절.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과 함께 그것을 드리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배가고파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자의 죄를 덮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제사 드리는 ‘사람’입니다.

성전에 불을 밝히기 위하여 사용하는 올리브기름은 올리브를 억지로 짠 기름을 사용치 않고 잘 익은 올리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름으로 성전의 불을 밝힙니다. 즉 사람들이 성전에 드리는 모든 것들이 자원하는 자의 마음으로 드린 것으로 사용합니다.

드리는 물건이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드리는 것이 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이라도 다른 의도를 품고 억지로 드리는 것이라면 가인의 드림과 같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를 따먹은 일과 죄 없는 양을 잡아 아버지 아담의 죄를 가리는 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야기와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아버지 아담의 모습을 두 아들은 보았습니다.

아벨은 아버지를 따라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며 아버지의 죄를 덮어주신 가죽 옷과 자신이 입고 있는 가죽 옷을 보며 아버지의 죄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눈물을 흘리며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린양을 드리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긍휼을 구하며 아버지의 죄와 온 가족의 죄를 회개하며 어린 양의 피로 아버지의 죄를 덮으신 것과 같이 나의 죄를 덮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죄가 아닌 아버지의 죄를 보았고 자신은 아버지를 섬기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고 순종하고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더 많은 것을 받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누가복음 18:13-14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아벨의 제사에는 세리의 기도가 보입니다.

아벨의 제사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제사에는 하나님의 불이 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6-7절.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터키에 와서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분하여 함’과 ‘안색이 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중동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거래를 하거나 만남을 할 때 서로의 안색을 살핍니다.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대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진실을 이야기 하는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리 잘 속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터키사람들과 중동의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족을 정말 사랑하고 도우고 보호하는 레일라 아줌마는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오면 그 사람 옆에 붙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를 하고 좋은 의도로 온 사람인지 나쁜 의도를 품고 있는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우리에게 주의를 줍니다. 한 번도 레일라의 판단이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돈을 구하는 사람, 호기심으로 잠시 온 사람, 여행자, 진짜 믿기를 원하는 자 레일라는 사람들의 안색을 보고 단박에 알아봅니다.

중동에서는 사람의 안색이 달라지면 그날로 거래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중동에서는 이동하는 문화로 만나는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가장 먼저 확인을 합니다. 안색이 달라지면 적군인 되는 것입니다. 성격에 여러 번 ‘안색, 낯빛, 얼굴 빛’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특별히 왕을 섬기는 자의 안색이 바뀌면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죄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죄가 우리를 다스리게 되어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갈 것입니다.

죄의 다스림을 받지 말고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는 방법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면 됩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구함으로 구속함을 받고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구하며 십자가 은혜를 구하면 나의 죄를 다스려 주십니다.

 

바리새인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리는 죄인이고 악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잘 드리는 자이었습니다. 세리를 선하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세리가 선하다 하는 것은 선의 기준을 무너트린 것이며 질서를 깨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요? 나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 인가요? 아니면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세리 인가요? 나는 죄를 다스리는 자인가요? 죄에 사로잡힌 자인가요?(눅18:9-14)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절. 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인은 선의 기준을 지키고 질서를 위해서 아벨을 들에 불러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습니다.

안식일을 어기고 정결의식을 어기고 죄인들과 같이 어울리고 먹고 마시고 병자들을 만지고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무시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는 세상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자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십자가에 달아 죽여 마땅한 자이었습니다.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9절.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을 찾으신 하나님. 동일하게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는 소리, 가인을 부르는 소리는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자신을 벌주시기 위해 부르시는 심판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우를 지키는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형이고 큰 자로 작고 약한 아우가 자기를 섬겨야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법은 크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0절. ‘핏소리’ 장화홍련전이 생각이 납니다.

 

장화홍련전

 

세종조에 평안도 철산에 배무룡이라는 좌수가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선녀로부터 꽂송이를 받은 태몽을 꾸고 장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태 후 홍련을 낳았다. 홍련이 다섯 살 때에 부인이 죽으니, 좌수는 후사를 얻기 위하여 허씨에게 재취하였다. 허씨는 용모가 추할 뿐 아니라 심성이 사나웠으나 곧 삼형제를 낳았다. 허씨는 소생이 생긴 뒤 전실의 딸들을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장화가 정혼을 하게 되자, 혼수를 많이 장만하라는 좌수의 말에 재물이 축날 것이 아까워 장화를 죽이기로 흉계를 꾸며, 큰 쥐를 취하여 장화의 이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좌수에게 보이고 장화가 부정을 저질러 낙태하였다고 속여, 아들 장쇠를 시켜 못에 빠뜨려 죽였다. 그 순간 범이 나와 장쇠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잘라가 장쇠는 병신이 되었다. 이에 계모는 홍련을 더욱 학대하고 죽이려 하였다. 홍련은 장쇠에게서 장화가 죽은 것을 알았고, 또 꿈에 장화가 현몽하여 원사한 사실을 알고, 장화가 죽은 못을 찾아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로부터 그 못에는 주야로 곡성이 났으며, 원사한 두 자매가 원정(寃情)을 호소하려고 부사에게 가면 부사는 놀라서 죽었다. 이런 변고로 부사로 올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정동우(鄭東佑)라는 사람이 자원하여 부사로 부임하였다. 도임 초야에 장화 · 홍련이 나타나 원사한 시말과 설원(雪寃)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튿날 부사는 좌수 부부를 문초한 바, 장화는 낙태하여 투신자살하였고, 홍련은 행실이 부정하더니 야음을 틈타 가출하고 종무소식이며, 장화의 낙태물이라고 증거물을 제시하는 것을 본 바 낙태물인 것 같아서, 좌수 부부를 훈방하였다.
그날 밤 꿈에 두 소저가 나타나 계모가 제시한 낙태물의 배를 갈라 보면 알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이튿날 부사는 다시 그 낙태물을 살피고 배를 갈라 본즉 쥐똥이 나왔다. 이에 부사는 계모를 능지처참하고, 장쇠는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좌수는 훈방하였다. 그리고 못에 가서 자매의 시신을 건져 안장하고 비(碑)를 세워 혼령을 위로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두 자매가 다시 나타나 설원해 준 일을 사례하며, 앞으로 승직할 것이라 하였다. 그 뒤 그 말대로 부사는 승직하여 통제사에 이르렀다.(국어국문학자료사)

 

‘네 아우의 핏소리’ 아벨의 핏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었습니다. 그 핏소리가 ‘장화홍련’이 원통하게 죽어 하나님께 자신의 죽음을 앙갚음 해 달라는 소리로 들린다면 가인과 같은 자입니다.

아벨의 핏 소리는 아버지 아담을 용서하신 하나님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신 하나님 동일하게 형 가인도 용서해 주기를 눈물로 호소하는 소리이었습니다. 형 가인을 위해 피를 뿌리며 대신 형을 용서해 주기 원하는 눈물의 호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33-34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사도행전 7:59-60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히브리서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십자가 고난당하시며 주님이 하신 기도이며, 스데반집사가 돌을 맞으며 드리는 긍휼의 기도이며, 아벨이 형 가인에게 돌을 맞아 죽으며 형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긍휼의 핏 소리기도’ 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인을 구원하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귀에는 ‘아벨의 핏소리’는 장화홍련의 원통함으로 저주와 복수를 원하는 한 맺힌 아벨의 핏 소리로 이해하였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가인에게 묻는 하나님은 가인으로부터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는 대답 듣기를 원하셨지만 가인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1-12절. 하나님은 가인이 가려는 길이 저주의 길이며 땀을 흘려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일이며 사람들을 피해 세상에서 방황하는 길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이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3-14절. 하나님은 가인이 가려는 길이 저주의 길임을 가르치고 하나님께로 돌아 올 것을 간절히 전하였지만,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저주를 내리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인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탄이 들어와 우리의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가치관을 미혹시켰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눈에는 동생 아벨의 핏 소리는 장화홍련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여 자신의 존재를 보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생각은 ‘사람이 어찌 자신을 죽이는 자를 위해서 용서를 구하며 기도할 수 있단 말인가?’입니다.

 

나는 가인입니까? 아벨입니까?

나는 가인입니다. 주여.

내가 가인임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인임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그 결국은 죽음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5절.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알아듣지 못하자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은 자신의 행위를 보고 그 행함으로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에스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가인의 눈에는 저주하고 벌주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이해하는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이 말씀이 가인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자는 하나님 벌주셔서 망하게 해 주세요.’ ‘나를 괴롭게 하고 나쁜 짓 하고 잘 되는 사람 하나도 못 봤다.’ 우리가 매일 하는 소리입니다. 나는 가인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보았습니다.

말씀대로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병자를 고치는 주님을 틀렸다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다고 하는 자가 맹인입니다. 청개구리는 엄마 개구리의 말을 들었지만 엄마의 마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늘 오해하고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입니다.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겠다는 것이니 어떠한 주장을 강하게 펴거나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들 때 쓰는 말입니다. 손가락에 장을 지지는 것으로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해야 우리는 오해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가인의 자손]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6-17절. 가인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땅을 유리하던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가인이 결혼을 하였으니 땅에는 아담의 가족 외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 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를 만드시고 그 대표로 아담을 세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노아의 홍수로 전 인류가 죽고 노아부부와 노아의 세 아들의 부부 즉 8명 4가정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다시 인류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5:3-5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아담의 자녀는 가인과 아벨과 셋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800년간 자녀를 낳았습니다. 2년에 한 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400명입니다. 그 400명이 20살이 넘어 서로 결혼을 하여 동일하게 800~900년을 살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담이 930세에 죽을 때 이미 인류의 수는 헤아릴 수 없는 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아부부와 노아의 세 아들의 부부 즉 4가정이 전 인류가 되었듯이, 아담과 하와와 그 아들의 부부가 노아와 같이 4가정이 되는 시간은 불과 100년도 지나기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10자녀를 낳고 100년을 산다면 100살이 되었을 때 그 자녀와 손자와 증손자의 수는 최소 20가정 100명의 자녀는 넘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볼 때 동물들도 이러할 것입니다.

터키와 중동에는 지금도 친족 간의 결혼이 많습니다. 이는 재산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유럽 왕실들은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왕족가족 간 결혼을 하여 왔으나 최근 들어 가족 간 결혼으로 되 물림되는 질병과 유전이상으로 인하여 외부에서 아내를 맞아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류를 만드시고 대표로 아담을 삼으셨는지 아니면 아담과 하와로만 인류가 시작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는 후자에 마음이 갑니다.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원죄의 대표성 원리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죄로 인하여 전 인류가 죄 아래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죄를 지은 아담 만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 죄에 빠졌는데, 하나님을 보지도 못한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 만 선택하며 살 수 있을까요?

나는 날마다 선악과를 따먹는 자입니다.

아담의 죄는 전 인류의 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 예수님을 보내시어 그 피로 구속하여 전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대표성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는 자들입니다.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18-19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와 씰라는 세상 ‘사람의 딸들’의 대표명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섬기는 셋의 후손들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0-24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고 야발은 목축하는 자 곧 유목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씰라의 아들은 청동기로 칼과 농기구를 만드는 자이었습니다.

가인이 만든 에녹성은 라멕의 대에 와서 막강한 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라멕의 뜻은 힘센 자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저는 선교사이고 목사이지만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아주 완악한 자입니다. 날마다 예배드리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과 형제사랑을 외치지만 내 마음에는 나를 괴롭히고 내게 악하게 한 자들은 7배가 아니라 70배의 벌로 갚아주기를 원하는 완악한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가인이며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완악한 라멕이며 성령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무시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한 걸음도 걸어갈 수 없는 자입니다.

 

[셋과 에노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26절. ‘셋(Seth. 세스)’은 ‘대신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전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아벨의 핏 소리를 배운 셋과 에노스는 드디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 아니면 구원의 방법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 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찾을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 때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세상을 떡으로 살고 돈으로 살고 명예와 힘으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부르고 찾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을 더 가지고 더 높아지기 위하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떡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살고 내 힘과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담의 죄악 된 모습을 닮아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며, 동생 아벨이 형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용서와 구원과 사랑의 핏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피 묻은 어린양의 가죽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셨습니다. 셋은 아벨과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어린양의 피 뿌림을 아는 아들이었습니다. 셋은 에노스를 낳았습니다.

에노스도 아벨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만 가득하던 에덴이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선과 악으로 이원론적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 아닌 것인가?

세상은 복잡하고 참 많은 것이 있지만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 둘 뿐입니다.

가인과 가인을 따르는 사람들과 아벨과 아벨의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가인의 길인가? 아벨의 길인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호는 중국집에 가면 50가지의 메뉴를 2개의 메뉴로 읽습니다.

짜장면과 짜장면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지만 그 길은 결국 두 가지 길입니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것 세상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http://cafe.daum.net/happymaker.turkey

이스탄불중앙교회

 

 

 

아다와 씰라 이야기(생명의 말씀)

 

아다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지난밤에도 남편 라멕은 아다의 침실을 찾아주지 않았다.

(또 그 여자의 집에 갔을 거야.)

그 여자란 뭇 남성을 현혹할 미모를 가진 씰라였다. 에녹성에서도 소문난 미인인 씰라를 벌써부터 라멕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만, 요즈음은 아예 터놓고 그녀의 집을 찾았고 번번이 밤을 지내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다는 표면적으로 나타내서 반발을 할 수 없었다. 라멕의 포악한 성품이 발동하면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다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혼자 고뇌를 하면서도 라멕 앞에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다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씰라보다 더 아름다워져서 라멕의 마음을 끄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몸매나 얼굴로는 씰라를 당해낼 수 없으니 아다는 아름다운 의상으로 자신을 꾸미기 시작했다. 보통 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아다 였지만 아름다운 의상으로 몸을 가꾸어 놓으니 딴 사람같이 아름답고 뭇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라멕도 아다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선정적인 의상으로 그의 눈을 끄는 날이면 라멕은 아다의 방을 찾아왔다. 이렇게 아다로부터 시작된 선정적인 의상은 온 에녹성에 유행이 되었고, 그것은 노아의 대홍수로 온 땅이 멸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한 여성의 육정적인 생각에서 시작된 사치스러운 의상문화는 사회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 이유는 선정적으로 아름답게 몸을 꾸미는 의상은 남성들의 눈을 끌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부터 온갖 퇴폐적인 문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라멕의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게 된 씰라도 아다에게 질세라 자신의 육체를 가꾸기에 온 신경을 다 썼다.

씰라가 육체를 가꾸는 데 이용한 것은 의상이 아니라 보석이었다. 의상 대신에 보석을 온몸에 감고 자신을 과시하는 씰라. 그녀는 보석의 소리만 들어도 그것이 무슨 보석인지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보석을 좋아했다.

반라(半裸)의 몸을 보석으로 장식하고 교태를 부리는 씰라를 통해 에녹성의 여성들은 너도 나도 보석을 구하며 자신들도 씰라와 같이 꾸미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러한 아다와 씰라를 닮고자 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에녹성은 퇴폐해져 갔다.

이처럼 한 여인의 그릇된 사치와 시기, 질투가 에녹성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뿌리를 뽑을 수 없는 독소를 심어 놓았던 것이다. 한번 사치와 향락을 맛 본 여인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며 스스로 죽음의 함정을 만든다.

아다와 씰라가 그러했다. 이 여인들의 사치는 서로의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되어 멈출 줄 모르는 경쟁으로 치달았고, 그렇게 되어 이 두 여인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육체를 아름답게 꾸밀까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 두 여인은 각자 아들이 있어서 어머니로서의 막중한 책임이 있었지만, 이들의 의식 속에는 어머니로서의 사명보다는 라멕을 사이에 놓고 경쟁하는 육정으로 가득했다. 둘은 어떻게 하면 라멕의 마음을 자신에게 기울게 할까 하고 불꽃 튀는 경쟁을 계속했다.

이 두 여인은 라멕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꾸미고 가꾸었지만, 그 선정적인 차림은 뭇 남성의 눈길을 끌었다. 옷차림과 더불어 이 두 여인이 창안해 가는 화장법과 머리모양 등은 늘 에녹성에 새로운 유행을 낳았고, 이러한 멋쟁이 여성에 대하여 남성들은 호기심과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아다와 씰라는 이러한 남성들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만족해했다. 남성들의 욕정을 유발하면서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만족하는 그러한 단순한 감정 안에 그들의 끊임없는 욕정이 한 곳에 머물러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다는 기어이 한 젊은이와 정을 통하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아다의 화려한 모습에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있던 그 젊은이는 라멕과 함께 사냥도 하며 일을 돕는 부하였다. 건장한 몸과 싱싱한 젊음이 넘치는 이 부하는 또한 용모도 수려해서 여성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다는 이 젊은이와 관계를 맺으면서 색다른 향락을 맛보았다. 그 맛을 한번 알게 되어 도저히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만일 이 사실을 라멕에게 들킨다면 무서운 보복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아다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불장난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온 영혼을 황홀케 하는 젊은이와의 향락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마음도 몸도 불타는 향락을 맛본 후에 현실로 돌아오면 밀려오는 두려움으로 마음이 떨렸지만 그들의 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젊은이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아다는 라멕을 향한 마음마저 시들해져서 씰라가 라멕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아다의 변화를 먼저 안 것은 씰라 였다. 씰라는 경쟁자로서 민감하게 아다의 심리나 행동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다가 라멕에 대하여 그 마음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재빠르게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씰라는 아다의 행동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아다가 라멕의 젊은 부하와 더불어 정을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나이먹은 라멕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젊고 싱싱한 몸, 수려한 용모, 이 멋있는 젊은이의 몸과 마음을 아다가 차지하고 있다니 씰라는 불타는 질투를 누를 수 없었다. 씰라는 아다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형님 혼자만 재미보지마세요.”

씰라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잘 아는 아다는 움찔했다. 젊은이와의 관계를 씰라가 안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씰라와 공범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도 살고 젊은이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다의 말을 듣고 젊은이는 두말없이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젊은이는 자신에게 손해날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그동안 관심을 쏟고 있었던 또 한 여성을 정복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만족했다.

그리고 두 여성 모두가 라멕의 아내이니 기회를 보아 라멕을 제거할 수 있다면 두 여성과 더불어 라멕의 것은 모두 자기 손에 들어오지 않겠는가 하고 젊은이는 은밀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다와 씰라는 이렇게 하여 라멕 외에 또 한 사람의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번 경쟁 상대는 라멕의 경우와는 또 다른 욕정의 싸움이었다.

라멕에게서 맛보지 못하는 향락이 이 두 여인을 사로잡았다. 목숨 걸고 비밀리 맺는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 달콤했다. 두 여인의 마음은 이제 라멕에게서는 완전히 떠나 있었다. 그리고 젊은이에게 향한 욕정은 날로 뜨거워져 갔다.

이러한 아내들의 변화를 라멕이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다. 더 화려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두 여인은 자신의 육체를 씻고 닦으며 다듬고 있으나 그것이 결코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녀석이 누구일까?)

라멕은 미칠 듯한 질투와 분노에 떨면서 아내들의 불륜의 상대를 찾았다. 그는 자신의 가장 가까이 있는 젊은이가 아내들의 상대라는 것을 눈치 챘다.

(저 놈이 틀림없어.)

라멕은 이렇게 확신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밝혀낼까 궁리했다. 섯불리 말했다가 이 젊은것도 아내들도 완강히 부인하면 자신만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분노를 누르면서 불륜의 현장을 잡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라멕이 눈치 챘다는 것을 안 젊은이는 호시탐탐 라멕을 해칠 기회를 엿보았다. 이젠 라멕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에녹성은 피로 세워진 성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에녹성을 세운 조상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도피 생활을 하다가 정착한 곳이 에덴의 동쪽 놋땅이요, 에녹성은 가인이 동생을 죽인 자신에게 보복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운 성이기 때문이다. 에녹성은 이렇게 피 흘려 생명을 죽인 자가 하나님께 등 돌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배신의 성이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세워진 에녹성은 바로 인간의 도시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하나님의 간섭을 거부하는 도시 에녹성. 이 성이 세워짐과 함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노아의 대홍수를 통해서도 그 뿌리가 제거되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의 도시 문명의 뿌리가 되고 있다.

사치스러운 의상 문화, 호화스러운 액세서리, 육정적인 화장, 질투와 시기의 끊임없는 경쟁, 인간 스스로 인간을 지키려고 쌓은 성과 건물 - 그것은 바로 인간 불신의 산물이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을 나타냄이니, 이런 것들이 바로 현대 도시 문명의 본질인 것이다.

말하자면 가인으로부터 뿌리내린 후 라멕의 대를 거쳐 오늘날 현대물질 문명사회가 지니고 있는 모든 독소가 고루 싹을 낸 것이다. 이 독소들이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자라고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세력이 되고 있는가는 젊은이를 죽이고 난 뒤의 라멕의 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라멕의 두 아내와의 불륜 관계가 드러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젊은이는 기회를 노려 라멕을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라멕의 손에 먼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 날 사냥을 갔을 때 젊은이는 라멕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다가 등 뒤에서 라멕을 창으로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젊은이에 대해 항상 경계를 하고 있던 라멕의 재빠른 반격에 의해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그 때 라멕은 어깨에 창상을 입었으나 생명은 무사했다.

라멕은 젊은이를 죽인 이유를 그가 자신에게 창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아내와의 불륜 때문이라는 것을 표면에 내세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멕의 분노가 얼마나 크며 두 아내에 대한 보복이 얼마나 철저했던가는 그의 말이 잘 나타내고 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말을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의 창상으로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인하여 젊은이를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 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 이리로다.”

라멕의 이 말은 아다와 씰라에 대해 손톱만큼의 긍휼이나 용서가 없는 잔인성과 철저한 보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칠 배라는 수효는 완전수인데 그 칠십칠 배라 하면 엄청나게 큰 수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이 보복에 사용될 때는 더할 수 없는 철저한 보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경쟁적인 사치와 향락으로 인해 아다와 씰라는 결국 라멕에게서 버림받되 철저히 보복을 받는 극한의 고통 속에 그 일생을 무참히 끝내는 여성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녀들의 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시기와 질투, 사치와 향락에서 오는 그칠 줄 모르는 경쟁과 철저한 보복을 되풀이함으로써 지금도 수없는 생명이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과 개인의 죄악이 결코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아다와 씰라의 죄가 말해 주고 있다.

 

그 여성이 참으로 아름다운가는 그 여성 개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낳은 핏줄로 알 수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을 통해서는 아름다운 생명, 즉 거룩한 핏줄이 태어난다. 거룩한 핏줄은 바로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아다와 씰라는 그 육체를 가꾸기에 정신이 없었고 자신의 향락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인생의 삶의 목적을 찾지 못했던 여성이었다. 그러므로 그 여성들이 낳은 핏줄이 생명을 위하여 존재할 리 없다.

아다는 야발과 유발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들에게 보여준 것은 사치와 향락뿐이었고, 아들을 위하여 생명 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어머니였다. 그러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란 아들들이 바라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될 리 없다.

야발은 목축을 업으로 삼는 자가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좋아하는 삶을 사는 자가 되었다. 이들을 통해서 오늘날의 생활 문화와 예술 문화가 시작되었으니, 이 문화가 인본주의적 생활의 뿌리가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과 인간적 감성에 의지하도록 하고 있다.

씰라 또한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두발가인이라 했는데, 그는 동과 철로 각종 날카로운 도구를 만드는 자였다. 이 두발가인이 만든 무기가 아버지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게 했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해치게 하는 살인 도구가 되었다.

두발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이 도구가 오늘날의 과학 문명을 낳아 인류를 회복 불가능한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아다와 씰라 이 두 여인은 에녹성에 있는 한 가정에서 개인적 갈등이 많은 무명의 여성들이었지만, 그녀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이토록 큰 영향을 훗날의 역사 속에까지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들이 뿌려놓은 그릇된 씨앗은 더 많은 불행의 열매를 인류로 하여금 거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다와 씰라가 뿌려놓은 사치문화는 그 시대의 모든 여성들에게 미쳐서 여성들의 사치 풍조와 그 육체적 화려함이 건실해야 될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성경은 증언해 주고 있다.

“사람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이 말씀에서 사람의 딸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거부하고 육체만을 위해 사는 자의 딸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가인의 후손으로 에녹성에서 번성한 가인의 후손과 그 딸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다와 씰라와 같이 남성의 눈을 현혹하는 육체적 아름다움만을 생각한 여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속의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라고 탄식하셨다.

육체만을 자랑하고 육체만을 장식하며 육체만을 원했던 아다와 씰라, 그리고 그녀들에게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고 육체적 아름다움만을 위해 살며 육체적 욕구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 그 시대 시대의 아다와 씰라가 존재하는 한 남자들의 범죄의 악순환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결국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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