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과외수업...

작성자달밤|작성시간24.09.23|조회수583 목록 댓글 5


수필

눈물의 과외수업

이달밤


바람이 코스모스를 하늘거리게 하던 가을이었다. 나는 익산의 한 초등학교 오학년 북 치는 소년이었다. 작은 몸에 옹이 항아리 같은 큰북을 매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시는 한창 어린이 야구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우리 학교는 조금 떨어진 중앙초등학교로 야구시합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 북 중심의 리듬 밴드가 함께 응원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시내 중심가를 가로질러 중앙초까지 연주 행진하였는데, 작은북의 경쾌함과 큰북의 힘찬 울림은 장관이었다. 구경꾼들이 길을 메워 도열 하고 어린이들은 뒤를 따랐다. 환호와 박수 소리가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우리 팀이 안타를 치거나 주자가 홈인하면 북도 신들린 듯 쳐야 했다. 우리는 용기백배하여 승리하였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올 때 높고 파란 하늘은 온통 우리의 세상이었다.
어린 추억을 오롯이 함께 한 단짝 친구가 있다. 어릴 적 초등학교 때 만나서 중학교를 같이 들어간 사이였다. 내가 북을 치며 행진할 때 친구는 뒤에서 책가방을 챙겨 항상 같이 다녔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놓치지 않고 같이 어울리며 함께 살아온 오랜 친구였다.
육학년이 되었다. 문교부는 1964년의 중학 입시를 다른 해와는 달리, 공동출제로 국어와 산수 딱 두 과목만 시험을 치른다고 발표하였다. 새로운 입시제도에서 경쟁이 치열해질 것을 예상한 학교는, 오전 오후 육 교시 정규수업이 끝난 후에 두 시간의 과외수업을 실시하였다.
문제는 두 시간의 과외비였다. 친구는 홀어머니가 작은 농사로 많은 식구를 거느리는지라 궁핍하였고, 나 역시 집인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과외비를 낼 수가 없었다. 돈을 못 낸 학생은 반 칠십오 명 중에 친구와 나 그리고 또 한 명 셋뿐이었다. 선생님은 정규수업이 끝난 후, 과외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서 돈을 챙겨 오라고 학교에서 내보냈다.
학교 가기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결석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선생님 눈 밖에 난 불량학생처럼 요시찰 학생이 되었다. 바램은 오직 선생님 눈에 띄어 혼나지 않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선생님께 불려가 훈계받았고, 또한 맞기도 많이 맞았다. 한번은 어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무슨 잘못인지 알 수도 없는 일로 엄청나게 맞았다. 너무나 억울했다. 그것은 훈육하는 매가 아니라 우리에게 화풀이하는 매였다. 그때의 억울함과 분함을 잊을 수가 없다. 눈물로 고개를 떨구며 빠져나오던 학교. 울먹이던 바람이 등을 밀치며 서럽게 불고 있던 그 날을.
친구와 나는 정규수업이 끝나는 즉시 화장실 가는 척, 책가방을 안 보이게 몸으로 가리고 슬그머니 교실을 나왔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선생님과 마주칠세라 교무실을 멀리 돌아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운동장 사잇길로 학교를 벗어났다. 그것은 너무도 어색한 일이었다. 도둑처럼 숨어나오는 동안, 비애감이 가슴을 치밀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들조차 울음을 삼키고 울지 않았다.
갈 곳이 없었다. 동네 또래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신작로의 돌멩이를 걷어차 누가 더 멀리 보내는지 내기를 했다. 점심시간에 먹은 도시락은 이미 뱃속에서 사라지고 마냥 허기지기만 했다. 어느 날은 시장을 기웃거리다가 운 좋게 풀빵을 얻어먹은 적도 있고, 어떤 날은 길에서 주은 동전으로 만화 가게에서 죽치다가 주인에게 쫓겨난 적도 있었다. 자연스레 눈치가 빠른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오학년의 천국에서 육학년의 지옥에 떨어진 꼴이었다. 마음은 철없이 서글펐다.
마침내 중학교 지원서를 쓰는 날이 돌아왔다. 이리동중은 공립학교 중에서는 제일 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과외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평상시에 성적은 상위권 이어서 중학교 지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친구에게 동중 지원서를 써 주지 않았다. 친구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가 울면서 강력히 항의했다. 선생님은 떨어져도 자기 책임은 아니라면서 마지못해 원서를 써 주었다.
드디어 시험날이 다가오자 학교에서는 마지막 시험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선생님은 친구를 교무실로 조용히 불러 불합리한 행동을 지시했다. 마침, 시험 보는 자리 뒤에 앉은 우리 반 학생에게 시험지 답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친구는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힌다는 듯 내게 하소연을 하며 소리쳤다. “흥! 언제는 떨어지니까 원서 못 써준다고 큰소리치더니, 이제는 답을 보여주라고?” 너무 속 보이는 것 아니냐고 울분을 토하였다.
준특대. 순위 18번째에 이름이 아슬하게 붙어있었다. 등록금을 반절 면제받았다. 친구도 무난히 합격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꼭 무언가에 복수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그때의 무진하게 아팠던 서러움을 기억한다. 철없는 어린 가슴에 가증스러움으로 남은 선생님. 졸아든 가슴으로 먹먹하게 돌아서던 학교의 교정을 잊지 못한다.
‘스승이란 무엇인가? 제자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 선생님은 비정한 세상을 일찍 가르쳐주신 것 같다. 어쨌거나 그것도 큰 교육이었던가. 사는 동안 어떠한 과외수업도 받지 못했다. 아니, 받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과외수업을 넘어서는 서러운 눈치를 배워버렸기 때문이다.
‘보고 배우고, 듣고 배우고, 가르침을 받고 배우고, 가르치며 배우고,
해보고 배우고, 느껴서 배우고.’ 중에,
당해보고 배우는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으니 큰 공부였다. 되짚어 생각하니 선생님도 가르치면서 무언가 배웠을 터. 그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지금도 오학년의 북소리는 친구와 나의 가슴에서 천국의 음악처럼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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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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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인천놀부 | 작성시간 24.09.23 와 소설같은 이야기네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맨바리(獨) | 작성시간 24.09.23 토도당~ 토도당~ 작품 이후 최고의 수필 명작
    눈물의 과외수업을 두번이나 정독
    잘 읽고 갑니다 달밤 형님~
  • 작성자카이저 | 작성시간 24.09.24 달밤 형님 늘 건강하십시요.
  • 작성자bluesky1004 | 작성시간 24.09.24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까지 학교를 다녔던 저로서도 불의를 일깨워주는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님에게서 불의를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한 시간이었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던 때에 달밤 형님의 수필을 통해 그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기에, 많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작성자쏜살같이 | 작성시간 24.09.26 시행착오 뒤에 오는 교육이 잊혀지지가 않죠.
    교육의 정의를 살펴보니 . 지속적이고 반복적 인것!
    그래서 군대서 반복훈련을 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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