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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2. 의지 현상 - 생각 2. 잘못된 믿음은 차라리 믿지 아니한만 못하다.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6.08.08|조회수197 목록 댓글 0

철학이야기 : 다시 쓰는 유레카
(1부. 우주 / 10장. 생명자)



   102. 의지 현상 - 생각 2.  잘못된 믿음은 차라리 믿지 아니한만 못하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명상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욕심이 개입된다면 우리는 가장 위선적인 우리의 자아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된 명상은 자신과 세상을 더욱 혼란시킨다.

   칸트는 마음의 선험적인 원리가 대상에 적용됨을 설명함으로써 [마음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에 따른다]고 이야기 하였다. 즉, 인간은 대상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명상 중에 욕심이 개입되는 순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본질이 아니라 욕심에 일그러진 창조한 자아( 신(神))와 만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과 유리와 같다. 순수하다면 유리와 같아 유리 너머의 본질을 볼 수 있겠지만, 욕심이 있다면 거울과 같아 욕심에 일그러진 자아의 모습만이 튕겨져 보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일그러진 형상을 본질의 모습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흔히 사이비로 규정되는 종교의 교주들 중엔 이런 유형들이 많다. 그들은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을 조작하고 이용한다. 문제는 가짜인줄 알고 남을 속이기 위해 신을 조작해 내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이 진짜인줄 알고 스스로에게 속고 다른 사람도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그들과 추종자들에게 열렬한 신앙을 가져오게 하고 때로는 죽음을 불사한 테러나 집단 자살 등의 극단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때로 사회에 큰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잘못된 믿음은 차라리 믿지 아니한만 못하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일탈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얼마 전 파란 눈의 현각 스님의 기복신앙에 대한 한국불교 비판은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최근 보수화되어가는 천주교도 교황님의 고군분투만이 안스럽게 보인다.

    자신의 믿음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없다. 그것은 삶의 결정을 결국 스스로 하듯이 종교적 신앙을 가질지 말지, 또 가진다면 어떤 종교가 좋을지는 자신만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머릿속 생각이 활동하는 공간이 정말로 머릿속의 공간일까? 그 공간은 무한히 작을 수도 무한히 넓을 수도 있다. 분명 3차원의 공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바로 나와 함께 있는 이 공간. 온갖 생각, 상상, 지식 등이 제 마음대로 놀고 있는 내 머릿속의 공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무슨 공간일까?

    그것은 의지체인 생명자의 본질의 공간이다. 데카르트는 뇌 속에 있는 솔방울 샘의 역할이라고 하였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아무튼 그 공간은 우리 우주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이다. 의지는 외부에서 온 힘임을 상기하라. 우리 우주의 외부는 1,000억 광년으로 추정되는 삼차원 공간의 멀고 먼 우주 경계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 우주가 시뮬레이션 우주임을 상기한다면 이는 아주 이해하기가 쉽다. 우리가 컴퓨터를 통하여 시뮬레이션을 실행한다고 하면, 그 시뮬레이션의 의지로 작용하는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컴퓨터의 모니터와 자판이든, 3D 입체 시뮬레이션이든 바로 시뮬레이션의 눈앞에 혹은 시뮬레이션 안에 함께 있을 것이다.


(저 그림은 무한히 확장할 수도 있지만 관찰자는 항상 바로 앞에 있다. 우리 우주의 밖은 무한한 공간의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우주의 외부와 통하는 공간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는 우리 본질의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큰 깨달음은 이 독특한 공간을 통하여 프로그래머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합일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생명자와 생각의 차이는 육체의 내면과 겉모습의 차이이고, 생각은 마치 자연의 물리현상을 인간이 만든 수학으로 표현하듯, 생명자의 의지를 뇌라는 생체장치와 전기에너지라는 에너지시스템을 거쳐 내가 아는 언어로 바뀌어 출력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 한국어로 생각하고, 일본 사람은 일본어로, 중국 사람은 중국어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생각은 생명자와 육체의 통역기 역할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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