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창세 18,16-33
복 음 : 마태 8,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과연 내 삶의 순도(純度)는 몇%쯤 될까?
-신뢰, 겸손,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날마다 교황님의 강론을 읽는 것도 저에게는 일과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황님의 매일 강론뿐 아니라 기회될 때 마다 많은 연설을 대하는 데
모두가 늘 새롭고 깊은 통찰과 영성을 반영합니다.
쉽고 단순하고 깊으며 본질적이며 핵심을 잡고 있습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이처럼 강론 잘 하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제 강론과 견주어 보며 항상 배우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교황님 강론 평에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매력은 무엇보다 그가 뛰어난 설교자라는 데에 있다.
단순히 말을 매끈히 잘해서가 아니다.
전임 교황들이 보여준 것과는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과 연설은
단순히 교리와 신학적 지식의 배경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신앙과 삶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성찰에서 나온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어는 현학적이지 않고 추상적이지 않다.
그의 언어는 복음의 언어처럼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단순하고 정직하고 구체적인 언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교황의 말과 행동과 태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교황님의 강론에 대한 평이었습니다.
삶이 좋아야 삶의 열매인 강론도 좋습니다.
삶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울 때 강론도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어제도 교황께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시는 것을 동영상으로 보면서,
또 후에 강론을 읽으며 교황의 신선한 강론에서 또 배웠습니다.
순간 떠오른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과연 내 순도(純度)는 몇%쯤 될까?
어떻게 하면 교황처럼 순도 높은 강론을 할 수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삶의 순도, 강론의 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순도의 뜻을 알아봤습니다.
-‘순도(純度, purity)는 물질의 화학적 순수함의 척도이다.
순도가 높은 물질은 다른 물질(불순물)의 함량이 작으며,
일반적으로 순도가 높을수록 제작 공정이 복잡해지므로 가격이 상승한다.’-
순도는 물질의 화학적 순수함의 척도지만 저는 이 단어를 삶에 적용시켜 봅니다.
삶의 순도는, 강론의 순도는 어느 정도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 순복음, 순두부, 순금이란 말도 듣습니다.
본래의 순수를 지칭하는 단어들입니다. 사람역시 순수한 사람을 진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주님 역시 순도 높은 마음 깨끗한 이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시며 하느님을 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100% 순도의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홀로 100% 순도의 삶이겠고, 하느님의 벗이라 칭하는
엊그제 대축일을 지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삶 역시 순도 높은 삶일 것이고
무수한 성인들 역시 하느님은 순도 높은 그들의 삶을 아실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는 순도 높은 삶인지요.
하느님은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되 뇌이며
자기의 속내를 아브라함에게는 전부 드러내십니다.
이어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비는 모습에서 아브라함의 삶의 순도가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깊은 신뢰와 겸손,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백성을 살려보려는 간절한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주님의 반응을 탐색하는 하느님과의 대화 과정의 기도는 얼마나 흥미진진한 감동인지요.
마지막 여섯 번째 물음과 답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기도의 대화가 끝나자 하느님도 아브라함도 각자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순도 높은 의인 열 명이 없어 파멸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과연 우리 몸담아 살고 있는 세상에는 얼마나의 순도 높은 의인들이 살고 있을까요?
우선 의인을 찾기 전에, 의인이 없다 탄식하기 전에 나부터 순도 높은 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순도 높은 의인의 삶을,
성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자주 대하곤 합니다.
곳곳에서 순도 높은 의인의, 성인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이 존속되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추종 자세에서도 우리 삶의 순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의 순도, 희망의 순도, 사랑의 순도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이 모두 순도 높은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음 세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침과 치유에 목마른 가난한 이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율사처럼
예수님의 행적에 놀란 이들이 호기심이 발동해 따른 경우도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참 순도 높은 제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안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듣는 우리가 듣고 생각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순도를 헤아려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오로지 주님께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이런 온전한 무소유의 순도 높은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우리 각자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 삶의 순도를 그대로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죽은 이들은 살아있으나 실상 영적으로 죽어있는 참 순도 낮은 이들에게 맡기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이 뜻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요구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생각 없이, 영혼 없이 욕망 따라 살아가는 참으로 삶의 순도 낮은 무사유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기생하는 죄악입니다. 죄악이 무엇인지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타고난 삶의 순도는 없습니다. 삶의 순도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답입니다.
시종일관, 초지일관, 예수님을 따라 가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삶의 순도, 즉 믿음의 순도, 희망의 순도, 사랑의 순도도 높아져
주님을 닮은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과연 내 삶의 순도는 몇%쯤 될까요?
주님 앞에 갈 때 ‘몇 %’ 순도의 삶이겠는지요?
세월 흘러 나이 들어 심신은 노쇠해 가도 삶의 순도는, 영혼의 순도는 날로 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순도 높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끊임없는 주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가 순도 높은 삶을 보장해 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늘 경제적으로 풍족하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던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돈이 최고라고 늘 말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우연히 로또복권 집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게에 들어가서 복권 한 장을 구입했습니다.
일주일 뒤에 복권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했는데, 글쎄 1등에 당첨된 것입니다.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행복감에 취해있던 형제님께서 병원 검진 결과가 들으러 병원에 갔습니다.
로또 복권도 당첨되는 행운을 얻은 나이니까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암입니다.”
바로 이 순간 돈의 의미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 이런 상상도 해보지요.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축하해주었고 또 부러워했습니다. 런데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큰 병에 걸렸습니다. 한 달을 넘기기 힘들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른 것 역시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분이 “돈만 많이 벌면 지금 죽어도 좋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죽는다면 많이 번 돈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세상 것에 대한 의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또 다른 삶,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뿐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를 알지도 못하면서도 지금의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욕심을 부풀리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입니다.
한 순간의 의미만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기에 앞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
당연히 들어주실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매몰차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무엇이 더욱 더 중요한 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어떤 일보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예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해야 할 의미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느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의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나 편안했을 텐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녀의 결혼, 출산 문제, 재물이나 교육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어중간이나 양다리 걸치기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분명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녀출산과 교육에 대한 관심도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너감’ 곧 새로운 파스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죽은 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언제나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먼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따름의 본질입니다.
따름의 본질은
받아들임의 체험입니다.
따름의 체험이
삶을 깨닫는
진정한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하시는
이 모든 일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온전히 신뢰하는
간절한 사랑의 일상입니다.
따름은
결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현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따릅니다.
따름은 사랑이며
따름은 생명입니다.
따름은
생명이신
하느님 나라의
가장 강렬한 선포입니다.
문을 좁히는 것이 잘못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
“해군 특수부대는 장시간 수영에 완벽해야 합니다. 그중 하나는 야간 수영입니다.
교관은 물에 들어가기 전, 훈련생들에게 즐겁게 설명을 합니다.
수많은 상어들이 득실거리는 센클렌이라는 바다 안에서요. 하지만 그들은 장담했습니다.
아직까지 상어에게 잡혀 먹힌 훈련생은 없었다고요. 적어도 그들이 기억하기엔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은 상어가 우리 주변을 빙빙 돌더라도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헤엄쳐 도망가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만약 야식에 굶주린 상어가 당신에게 돌진한다면 모든 힘을 모아서 상어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세요.
그러면 돌아서서 도망갈 것입니다. 이 세상엔 수많은 상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수영을 완벽하게 하고 싶다면 상어도 다룰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상어에게 등을 보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으세요? 침대 정돈부터 하세요.”라고 한 해군 대장의 유명한 연설 중 일부분입니다.
이 연설 안에는 상어와 정면으로 맞서 얼굴을 때릴 용기가 없다면
해군 특수부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보통 훈련병 중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수가 30%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잘 모르고 그 부대에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훈련을 견딜 능력이 있다고 잘못 판단하고 지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특수부대에 들려는 지원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도회들이 입회자가 없다고 난리지만 마지막까지 지원자가 있는 곳은 엄격한 봉쇄수도원들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힘든 곳에서 버틸 때, 그만한 보람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다보면 길거리에서 잘 일도 많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한 제자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당신을 따르기로 했으면서 아버지 장사는 왜 지내려고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율법학자가 함께 듣고 있었다면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에 따라 아버지 장사도 지내지 않는 아들은
율법학자의 시각으로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로써 율법교사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율법의 고정관념까지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살고 싶어 결혼을 해도 많은 수가 이혼을 합니다.
좋은 사람을 고르고 골라 함께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어떤 것까지 견뎌야하는지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명확히 말씀하셨고 감당할 수 있겠거든 따르라고 하십니다.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골목상권 살리기 프로그램을 보면
가끔 전문가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가게들을 만나게 됩니다.
손님에 대한 예의나 장사를 위한 기본적인 가격책정,
혹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음식 실력도 안 되는데도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잘 될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100% 망할 수밖에 없는 가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장사에 뛰어들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한 기본규정을 알려준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알아야 망하지 않을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주일미사도 나오기 힘들어 냉담 하는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을 잡기 위해 그 규정들을 더욱 낮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냉담 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더욱 잘못 알고 들어오는 신자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 들어가려면 십일조를 철저하게 내고
주일엔 반드시 가게 문을 닫고 쉬어야한다는 것쯤은 명확히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그들의 주일 예배 참례율은 80%를 넘었습니다. 천주교는 30% 이하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그들보다 더 엄격한 규정을 지켰고
오랜 기도와 희생극기를 하여야 했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바쳐야했습니다.
현재 수도자들 수준으로 평신도들이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교세는 커져만 갔습니다.
들어오는 문이 좁더라도 일단 들어오면 철저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도록
규정과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더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과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느슨하게만 해서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면
너도나도 그 정도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모두가 다 느슨해질 수 있습니다.
수도회는 수도자처럼 살아야하고, 성직자가 되면 또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오늘 복음말씀에서 하신 것처럼
집도 없을 것이니 알아서 자야한다고 하고
아버지 장례에도 갈 수 없다고 한다면 누가 따르려고 할까요?
그러나 그런 것까지 따르겠다고 함께 모인 이들의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많이 들어오도록 문을 넓히는 것만이 꼭 좋은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복음말씀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새벽 미사를 마치면 간단히 아침 먹고 산책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는데 제가 가는 길에 저를 보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자모회 자매님이 출근길에 제가 지나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고 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신독(愼獨)은 대학 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군자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던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충실하게 가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면 선을 행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악을 행한다면 이는 군자의 길이 아닙니다.
시편 139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를 달아 바다 맨 끝에 자리 잡는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잡으십니다.
하느님, 저를 살펴보시어 제 마음을 알아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모를 거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살았습니다.
공기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었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몰라서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용서를 청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슨 명예나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시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는 가운데 2019년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죽은 것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미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며 7월의 첫날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