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0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탈출 3,13-20
복 음 :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카데미 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혼 후 싱글맘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 두 아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남편이 언론에서 자기 험담을 할 때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평이야. 서러움이 있지 왜 없어.
그런데 그 서러움을 내가 극복해야 하는 거 같아. 나는 내가 극복했어.”
또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살아있는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겠냐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행복한 일이야.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지만 다 아프고 다 쉬워.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해.
난 웃고 살기로 했어. 인생 한번 살아볼 만해. 진짜 재밌어.”
윤여정 배우처럼 관점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관점을 바꿔보면, 사는 모습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로 재미있는 인생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점 바꾸기 어려워합니다.
관점은 다른 이가 바꿔주지 않습니다. 또 상황이 바뀌어야 관점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관점은 바로 나만이 바꿀 수 있고, 또 외부 상황이 변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이 변해야 바꿀 수 있습니다.
나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우리 힘이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커다란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덜어주실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까지 다 벗겨 주시면 좋으련만 그것은 그냥 씌워 놓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다 없애시면 좋지 않을까요?
바로 우리의 몫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사라지게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하지 않고서 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몫은 나의 관점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의 관점과 나의 마음을 바꿔서 주님을 향하는 것, 주님과 함께하는 것,
주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불공평하고 서러움이 많은 세상이라면서 불평불만 속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아닌,
스스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랫동안 절에 다니던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얘야 절에 있는 부처님은 풍채도 좋고 자비로운데
성당에 있는 예수님은 삐쩍 마르고 고통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느낌을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부처님 상은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예수님 상은 대부분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피를 흘리는 모습입니다.
부처님은 고통에 대해 ‘성찰’하였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꺼질지 모르는 욕망과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삼독에 의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고통,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고통은 ‘집착’에서 오기 때문에 그 집착을 버리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로 전파되었는데 큰 박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부처님이 말한 고통과 예수님이 말한 고통은 드러나는 현상은 비슷하지만, 그 원인은 달랐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고통은 그 원인이 ‘욕망’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고통은 그 원인이 ‘대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어리석은 것같이 보였지만
그 길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로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도 100년 정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바라는 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험담을 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운 말을 하면 사랑의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나쁜 말을 하면 원망의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치유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손을 높이 들어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 지친 친구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손을 가슴에 대고 나의 허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웃의 짐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도 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손입니다. 남을 때리는 것도 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주신 것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함께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의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셨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많은 사람들은 그릇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길, 재물의 길, 명예의 길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 희생의 길, 나눔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안내해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고 싶다는 뜻으로 ‘사명’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이 말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일상의 노고와 고통이 나의 십자가인가요?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을 얻는 방법은 당신 마음의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타인에 의해 지워지는 짐도 있고 나의 잘못으로 지는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무거운 짐이 십자가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일상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면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참 십자가의 의미를 잃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십자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래 이야기에서 이 사람의 진정한 십자가는 무엇인지 발견해봅시다.
마이크 블랙은 100억 대의 사업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잠시 접어두고 무일푼 노숙자로 시작해서
1년 안에 10억을 버는 챌린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도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과 도전의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판매할 수 없는
자신의 일상을 담아야 하는 카메라, 휴대전화, 그리고 옷 한 벌입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 사업을 하면 안 되고 자신의 인맥에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신용이나 가족, 친구, 현금, 자산, 전문 지식, 인맥,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진짜 리얼로 길바닥에서 맨땅에 아무것도 없이 그의 챌린지는 시작됩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조금씩 이 챌린지를 시작한 것을 후회합니다.
한 푼도 못 벌고 노숙 생활을 하며 음식도 먹지 못하여 말라갑니다.
그는 첫날 저녁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 며칠 재워주기도 하지만, 집이 없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면서도 한 푼도 벌지 못합니다.
그저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먹고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이크는 아이삭이라는 인상 좋은 사람의 도움으로
며칠을 카라반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슬슬 사업을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남이 버리는 가구를 팔아 이익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모으는 동안 그는 돈이 없어 오로지 콩만 먹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사업화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좀 모이자 집도 하나 월세를 내어 자신도 살고 나머지 방들은 세를 줍니다.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합니다. 자그마한 사무실도 임대합니다.
이 과정에 실패도 겪었지만, 그래도 돈은 조금씩 쌓여갑니다.
12주 차 6,600불의 현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사업은 그가 관심을 가지지 못하자 매달 25,000불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이제 인터넷으로 커피를 판매하려고 합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익 중 일부를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하는 형식입니다.
첫 판매도 이루어지고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32주가 지났을 때 그는 임대업으로 1,600불의 현금 흐름을 일으킬 수 있었고,
커피 사업으로만 34,000불을 법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전화를 받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는 얼마 못 삽니다.
그는 챌린지를 계속해야 할까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차피 시작한 것 끝까지 가보라고 합니다.
마이크는 아버지를 자신의 월세 집에 모시고 돌봐드리며 사업을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42주 동안 달려온 그도 건강이 악화하여 건강에 문제까지 발생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챌린지를 포기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42주 동안 맨땅에서 시작하여 그의 통장엔 64,000불을 찍었습니다.
노숙자에서 10개월 만에 8천만 원의 돈을 모으게 된 것입니다.
2개월 더 했다면 10억을 벌 수 있었을까요?
어쨌건 마이크 블랙은 자신의 건강도 챙기고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며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챌린지는 비록 실패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도 처음 사업을 할 때 5천만 원의 빚을 져서 고통스러워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면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이크 블랙의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사업이 월 3천만 원씩 적자가 나는 것?
아버지의 대장암? 친구들의 비웃음? 먹을 것이 없고 잠잘 곳이 없었던 인생 최대의 고통?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무것 없이 시작해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은 마음.”
이 마음 때문에 그는 그 많은 고통을 사서 겪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구원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은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통이나 어쩔 수 없이 받는 고통은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냥 무거운 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받아들여 멍에로 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십자가를 진 사람이고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려 사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이 질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깊다.
기초가 튼튼한 만큼 건물도 튼튼하게 지을 수 있으며 높이 올라간다.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갈등이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한다면 누구나 부정과 악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그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무게는 우리가 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멍에가 바로 나에게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나그네가 바랑을 지고 다니듯, 바랑이 없는 거지도 끼니를 챙겨야 하는 ‘짐’을 져야 하듯,
오늘도 우리는 삶을 ‘짐’으로 지고 살아갑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고,
수도자로서 스스로 짊어진 ‘짐’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자녀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가족으로서 함께 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질병과 육신, 상처와 나약함, 분노와 원망을 ‘짐’으로 지고 가기도 합니다.
형제를 ‘짐’으로 지고 가고, 세상을 ‘짐’ 지고 가며, 자기 자신을 ‘짐’으로 지고 갑니다.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짐’이 있고,
부당하게 떠맡겨지는 ‘짐’도 있고, 피하고 싶은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다른 이의 ‘짐’을 떠맡기도 하며, 함께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생명을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살면서는 죽음을 ‘짐’으로 짊어지고 죽어갑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그런데 나의 몸에서, 나의 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가?
사실 예수님께서도 ‘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니, 그 ‘짐’을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그 ‘짐’을 지고서야 가실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결코 그 ‘짐’을 지지 않고는 가야 할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북돋아 줍니다.
사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짐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오히려 ‘짐’으로 하여 우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짐’이 우리를 짊어지고 가는 까닭입니다.
정녕 ‘짐’을 지고서야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짐’이 없이는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짐’은 우리를 북돋아주고 도와주는 은총입니다.
그 ‘짐’은 저를 구원으로 이끄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고 그리스도와 함께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갑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몸소 우리의 ‘짐’마저 짊어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짊어진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십자가를 사랑으로 지고서 제가 갈 길을 사랑으로 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매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에 기로에 서서 슬픔을 갖지 말아요.
어차피 헤어져야 할거면 미련을 두지 말이요.
이별에 기로에 서서 미움을 갖지 말아요.
뒤돌아 아쉬움을 남기면 마음만 괴로우니까. 아무리….”
이 노래 제목이 뭘까요? ‘멍에’지요.
노래의 내용을 보자면 ‘사랑의 아픔’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멍에’는 아프고 힘든 상처라는 것이 노래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도 마땅히 머리 누일 곳이 없었습니다.
율법에 대해 옳은 말을 했다고 누명을 씁니다.
또 사랑하는 제자에 의해서 팔려 가는 신세가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가장 큰 멍에는 욕설이나 매질이 아니라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가볍다고 말하는 ‘멍에’입니다.
이것이 가볍다고 이야기하는 사랑의 상처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볍습니까?
우리의 멍에는 가벼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각 자의 멍에는 다 무겁습니다.
어떨 때는 버거워서 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도 없이 무거움과 외로움에 더욱 아파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나와 하느님만이 아는 멍에입니다. 절대로 가볍지 않은 상처이고 아픔입니다.
주님은 그 멍에가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잘 읽어 보면 그 무거운, 외로운 멍에가 가벼운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멍에가 가벼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는 꼭 갈대와 같은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고
또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뿌리째 뽑히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겸손은 내가, 내 마음이 첫째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 첫째 자리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나를 생각하기보다 하느님을 생각하게 되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고 있는 멍에는 버릴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이 부드러울 수 있는 온유의 은총을,
그리고 나를 생각하기보다 고통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겸손의 은총을 청하십시오.
입은 하나, 귀는 두 개
오늘 후배 신부님이
이곳에 방문했습니다.
그냥 얼굴 보고 싶어 왔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인 입은 최대한 조용함을 유지하고
두 개의 귀는 열심히 듣고 또 들었습니다.
가끔 역정과 따뜻함으로 격려도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식사를 나눈 후
후배 신부님은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출발하는 차의 창을 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오늘 들어줘서 고마워요.
힘이 좀 납니다.
역시 귀가 두 개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양심과 도덕, 풍습과 관습,
그리고 법률과 헌법의 조화로운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양심과 도덕은 좋은 풍습과 관습을 만들어 주며,
이는 또다시 情感과 平和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이 개인적인 差等을 보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률과 헌법이 등장한다.
법이란 몇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제정되는 것이기에 다 같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준법정신은 법을 실제로 지키려는 意志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한다.
先進 국민일수록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 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 수준을 높이자고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먼저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인간적이고 보편적이지 못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제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한편으로는 통탄해야 하겠지만,
이왕에 제정된 법은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준수해야 할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法이란 무릇 한자어가 뜻하듯이 ‘물(水)이 가는(去) 것’이다.
절대 거꾸로 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가며,
넘치면 다시 가는 물의 흐름이 곧 법이요, 법은 극히 자연스런 理致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럽게 법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법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어떠한가?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은 다 모아 놓았다고 한다.
독일, 미국, 일본의 좋은 법은 다 갔다 놓았다는 것이다.
법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양심과 도덕, 올바른 양심과 보편적인 도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法을 잘 몰라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蹂躪 당하고, 양심적 손해를 보며,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법은 이 국민 앞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법조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강한 자에게는 법을 피할 길을 가르쳐 주고 약한 자에게는 이 법, 저 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613가지의 율법을 짊어지고 살았다.(금령 365개, 명령 248개)
이런 율법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시께로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법의 멍에를 벗겨 주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워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법이 아니라 가르침이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이며,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관습과 풍습이다.
이는 자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황금률 : 마태 7,12)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동시에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사랑의 이중계명 : 마태 22,34-40)이다.
물론 이 사랑은 나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그 알맹이를 채우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은 법의 멍에든 십자가의 멍에든 하나를 지고 가며 살아야 한다.
법의 멍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수고하고 짐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이 릴리안 수녀
오늘 복음을 듣게 될 때면 늘 마음이 녹아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살았던 오늘 하루,
그리고 한 달을 위로로써
손수 채워주시는 손길을 느끼곤 합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위로를 얻기 위해
각자의 방법을 택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풀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며 해소를 하거나
운동을 하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의 위로자는 오직 한 분 주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돌아보며 그분의 손길과 따뜻함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보지 못한 곳까지
늘 그리고 항상 함께하시며 위로해주고 계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마태 11,28-30 연중 제15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