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제1독서 : 지혜 12,13.16-19
제2독서 : 로마 8,26-27
복 음 : 마태 13,24-43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에는 체벌이 없어졌지만, 저 때만 해도 무서운 선생님께 체벌당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자율학습에 졸았다고 맞고, 반성적이 떨어졌다고 연대책임이라며 맞고,
수업 태도가 좋지 않다고 맞고, 때로는 예의 없다면서 맞는 일도 있었습니다.
체벌 도구도 다양해서 마대, 당구 큐 대, 아니면 두툼한 몽둥이 등이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20명의 학생이 10대씩 맞는 상황입니다.
20명의 학생 중에서 가장 아프게 맞은 학생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학생이 가장 아플 것 같습니다. 선생님 체력이 제일 좋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지막에 맞은 아이가 제일 아프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자기 앞 19명의 맞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불안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나쁜 감정을 극대화하기에,
불안을 자기 안에서 치워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이 사라지는 순간은 나를 지켜 줄 커다란 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자신 넘치는지 모릅니다.
평소보다 말도 잘하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합니다.
부모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나’를 지켜 준다면 어떨까요?
불안을 가질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부모보다 더 큰 힘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불안이 사라지고, 하고자 하는 용기와 의욕이 가득해질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센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악이 더 힘센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에서 묵상하게 됩니다.
우선 밀과 가라지는 모두 커서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식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구분이 되기 시작했을 때, 가라지가 보인 것입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기에 가라지가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주인은 원수가 했음을 알아챕니다.
종들은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고 묻습니다.
주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잡초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즉, 밀보다 더 탄탄하게 더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밀이 뽑힐 수도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지상에서 자라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 안에는
인내로써 견뎌야 할 악의 씨앗이 뿌려져 있음을 상기시키고,
하느님 나라의 자녀들은 악마 졸개의 기세에 눌려 고생하지만
역시 하느님의 심판은 선인들의 편임을 확신케 합니다.
최후의 승자는 악마가 아닌 선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붙어야 할까요?
가라지로 표현되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악의 힘이 하느님보다 센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우리에게 당신을 믿고 따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의 유혹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철저히 하느님 편이 되어 ‘밀’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작년까지는 신문사에서 주방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제가 혼자서 주방 일을 하고,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고추, 오이, 상추의 모종을 심었는데 돌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방 자매님은 수시로 텃밭에 나가서 물을 주고, 졸대를 세워 주고, 잡초를 뽑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 직원이 먹고도 남아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을 때는 물을 주고 있지만
외부 출장 일이 많아서 올해는 모종들이 많이 말라 버렸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들이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땅과 모종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땅에 거름을 주고, 모종에 물을 주면서 잘 키우는 사람의 정성이 문제였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도 비슷합니다.
거짓과 쾌락과 비판의 거름을 주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온갖 악취가 풍기기 마련입니다.
나눔과 희망과 격려의 거름을 주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사랑의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난 6월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하면서 첫 미사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주제로 강론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아껴주고, 격려한다면 성지순례라는 나무에서 기쁨
과 희망의 열매가 열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짜증 내고,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어내면
성지순례라는 나무에서 갈등과 분노의 열매가 열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성지순례의 목표는 ‘멈춤, 만남, 변화’입니다.
일상의 삶을 멈추고 성지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행객으로 순례를 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례자로 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례의 여정 중에 분심과 짜증이 생기곤 합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의 습관과 성격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날씨가 덥다고, 자유시간이 적다고, 물건 구입할 시간이 없다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두가 감사의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마칠 수 있는 것은 매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동 중에 묵주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기도 시간이 길어지면 불평의 말들이 줄어드는 것을 봅니다.
오직 기도만이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이해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가능성의 나라입니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는 나라는 아닙니다.
지금 부족한 사람도, 지금 잘못한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아주 작은 양이지만 빵을 커다랗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시작은 비록 작을지라도 끝은 아주 풍요로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작은 겨자씨는 자라면 새들이 깃들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생명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커다란 코끼리도 그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크기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움이 함께하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읽으면 ‘아메리카 원주민과 손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있단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대답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파란 늑대가 이기고,
검은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검은 늑대가 이긴단다.”
손녀는 할아버지의 말을 곧 이해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겸손하면 나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쁜 일을 하고, 교만하면 나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적과의 동침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걱정도 되고, 힘들게 만들어 놓은 공동체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버림받은 이들, 잘못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관대함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끝없이 기다리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형제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조금은 거창하지만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던가?
곰곰이 돌아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가난하고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부모님 사랑 듬뿍 받으면서 걱정 없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공감했습니다.
신학적 지식도, 수도 생활에 대한 경험도 일천하던 지원자 시절,
비록 몸은 고달프고, 때로 춥고 배고프고, 다방면에 걸친 결핍된 생활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또 한 번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럭저럭, 설렁설렁, 마지못해 살아가지,
그때 당시처럼 마냥 설레고, 마냥 행복하고, 그렇지가 못하다는 데 깊이 공감했습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결론 역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가라지’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 인생의 밭에 가라지들이 슬슬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라지들과 맞서느라 삶의 많은 에너지들이 빠져나갔습니다.
삶의 피로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반비례해서 행복지수는 낮아져만 갔습니다.
내 안의 가라지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별것도 없으면서 ‘내가 누군데’ 하는 쓸데없는 자만심이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과 우월감이었습니다.
내가 그쪽보다 나이가 많은데, 내가 그쪽보다 수도 생활을 얼마나 더 오래 했는데,
내가 이 분야에 얼마나 오래 종사했는데...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순간순간 분노하시고, 강력한 처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우리 가운데 과연 남아있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
단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고 막차라도 타게 하시려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일일이 다 통제하신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아버지께서 엄격한 아버지,
단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쉽게 보복하고, 쉽게 진노하는 아버지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면 죽음인데, 돌아가면 무시무시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데,
객사하면 객사했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는 늘 당신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우리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열려계시는 하느님,
늘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환대의 주님,
우리가 돌아갈 때마다 그저 용서하시고 등 두드려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하든 그저 묵묵히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 너무나 나약해 보이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동의 극점에 서 계신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도 참아내시는 분,
우리의 악행을 끝까지 견뎌내시는 분,
우리의 불효를 끝끝내 인내하시는 분,
끝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 밀과 가라지, 겨자씨, 누룩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는 가라지와 겨자씨 그리고 누룩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가라지의 비유만 보기로 하자.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원수가 악한 뜻으로 거기에 가라지를 뿌린다.
그런데 가라지는 꽃이 필 때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을 보고 종들이 주인에게 알리며,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 한다.
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버려두었다가 가라지와 밀을 가리도록 하고 있다(29-30절).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악은 바로 잡을 수 있고 회복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선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메시아 시대는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기에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라지가 밀과 같이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지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악은 죄의 의미보다 그것이 극복되기 위해 하느님의 현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세주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존재임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악은 실제로 마지막 추수 때(30절) 극복될 것이다(41-42절 참조).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 승리를 즉시 보고 싶은 마음에
그 가라지에 대해 참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세는 열심한 자세라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태도이다.
그것을 뽑아버리면, 잘라버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선과 악은 마음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억센 거라지를 뿌릴 수 있다.
이 가라지를 제거하는 노력과 수고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는(참조: 교회 5) 교회도 가라지에 의해 침해되어 황폐화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비유의 후반부에서 선과 악의 현실적인 공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으로 강조점이 옮겨지고 있다(38-42절).
마지막 구절인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도 종말론적 관점을 말한다.
이렇게 강조점이 심판에 두게 된 것은 공동체가 처음에 가졌던 열심을 다 잊어버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도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기준이 되지는 못하며,
반드시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선과 악이 공평하게 드러나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제 사랑의 법에 불충실하면 모두가 단죄를 받을 것이며,
사랑의 법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하느님 앞에는 어떤 특권도 없다. 신앙에는 특권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모두 심판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지혜서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권능으로 하실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참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지혜 12,18-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우리들의 회개를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에
악을 너그러이 참아주시는 하느님을 또다시 대하게 된다.
이러한 당신의 행동을 그분의 백성인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신다(참조: 지혜 12,19).
회개한,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가라지에서 풍성한 결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로마 8,26)
성령의 기도는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갖게 해 주며, 세상의 악이 존재하는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그 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의 능력과 세상이 희망으로 차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라는 표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결국은 역사의 마지막 장에 가서는 보다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약점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을 잘 보지 못하면서,
또 나 자신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는 선악도 보지 못하면서
쉽게 다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약점을 판단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또 나도 그런 약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느끼고,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볼 때, 가라지는 회개하여 언제든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 주어야 한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중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고,
오늘은 '가라지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지혜 12,18)고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를 위하여 간구”(로마 8,27)하심을 말해줍니다.
곧 ‘나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르는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 하시며’(로마 8,26)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는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안에서 혹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는 순간에는 하찮은 것 같지만,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5)
이는 우리 안에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놓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나라의 씨앗이 뿌려진 밭이요, 우리의 삶이 하늘나라의 농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농장을 일구는 농부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마치 십자 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그처럼 ‘누룩’이 부풀어 빵이 되고, 빵은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립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오히려 가장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겨자씨’의 모습, ‘누룩’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겸손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우리 마음 안에서 조용히 자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나라는 세상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실은
하늘나라의 ‘겨자씨’는 이미 나 자신이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은 나 자신이라는 ‘밀가루’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이제 밭에 뿌려지고,
밀가루 안에 넣어진 이 “하늘나라”를 잘 가꾸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비를 뿌리시어 씨앗이 돋게 하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어 싹을 틔우시고, 햇살을 비추시어 튼튼하게 자라게 하시고,
꽃을 피우시고 열매 맺게 하십니다.
또한 밀가루에 누룩을 물로 섞으시고 온도를 맞추시어 부풀리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닐 것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내 안에 뿌려진 이 “하늘나라”의 씨와 누룩이 잘 자라도록
정성과 열성을 다해 돌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열심히 사랑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밭에는 나쁜 씨도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안에는 온갖 나쁜 생각, 온갖 악한 생각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또한 세상에도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부패, 온갖 악과 부조리가
어디든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곧잘 좌절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내심이 끝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계시듯이,
세상 안에서도 가라지들이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가라지들이 판을 친다하여도,
“하늘나라”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라지들이 기승을 부린다하여도, 결국 “하늘나라”는 성취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내가 그것들을 한데 모아 불살라버릴 것이니,
너희는 열심히 “하늘나라”를 가꾸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나에게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려서 세상에 가라지들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죄인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주고,
의인에게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함’(지혜 12,19 참조)을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가라지들이 섞여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도, 세상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마저도 가라지들이 섞여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결국 어둠 속을 파고들 뿐, 어둠이 결코 빛을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오히려 물러갈 뿐입니다.
물론 저항하거나 공격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빛을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가라지가 지금 뽑혀지지 않는다 해도,
결코 협조하거나 방조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가라지를 뿌리 뽑을 수는 없을지라도,
가라지가 번지는 것을 막고 선을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온 세상을 향해 뿌려진 하늘나라의 '씨앗'인 까닭입니다.
씨앗은 열매 맺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가라지가 이 세상에 판을 친다 해도,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가라지들이 마구 기승을 부릴수록
촛불을 켜들고 세상이라는 밭을 밝게 밝혀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촛불은
등불이 되고, 등불은 횃불이 되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꽃을 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땅을 골라주고 꽃씨를 뿌리고 물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렸습니다. 예쁜 꽃이 나오길 말입니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드디어 자그마한 싹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꽃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싹이 나왔습니다.
급기야 어떤 것이 꽃이고 어떤 것이 풀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꽃이 피는 것이 꽃이고 꽃이 피지 않는 것이 바로 풀이기 때문이지요.
그동안은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태양을 받도록 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현상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같이 두는 것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을까 봐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묻습니다.
“왜 좋은 씨앗만을 뿌렸는데 밀만이 아니라 가라지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뿌렸구나.”라고 말입니다.
밀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좋은 마음이고
가라지는 그러한 밀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하느님의 좋은 마음을 방해하는 유혹들, 어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께 조금 더 나아가고,
사람을 조금 더 사랑하기 시작하면 악마는 우리에게 더욱 큰 유혹을 만나게 합니다.
‘왜 하느님을 믿기 시작하니까 힘든 일이 그리도 많은지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유혹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떠나도록 더 이상 씨앗이 못 자라도록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유혹하는 악마, 혹은 유혹자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넘어갈 만한 것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주님의 씨앗이 잘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튼튼하고 예쁘게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동병상련
미사가 끝나고
성당에서 나오시는 분들에게
인사합니다.
이곳에 자주 오시는 한 자매님과도
인사를 하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내 그 자매님이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 내내
어떤 자매가 울더라고요.
마음에 걸려서 못 가겠어요.
그리고는 다시 성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압니다.
다시 돌아오신 그 자매도
참으로 아프고 상황이 어려운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레자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밀과 가라지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라는 말로써 가라지는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밀이 잘 자라는 데에 피해를 주는 가라지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秋收 때에 뽑혀 불에 던져질 가라지의 운명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선하신 하느님이 하실 일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옛날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낮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집안에는 높은 사람, 곧 家長이 있습니다. 가장은 가솔들 위에 군림합니다.
로마 제국 내의 가장들은 가솔들을 죽이고 살릴 권한까지 가졌었습니다.
나라에는 왕 혹은 황제가 있었고, 그들이 임명한 관리들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그들이 만든 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생존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의 통촉하심을 입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높은 사람들보다 더 높은 분으로 상상되었습니다.
가뭄, 홍수, 태풍, 지진 등 자연재해는
모두 하느님이 노하셔서 주는 벌이라고 그 시대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왕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치며,
하느님이 노여워하지 않도록 또 백성이 그 혜택으로 잘 살 수 있도록 빌었습니다.
우리나라 강화도 마니산에도 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있습니다.
중국의 泰山에도 황제가 祭天의례를 행하던 제단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만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에게 선생님, 직장인에게 직장의 上司, 운전하는 사람에게 교통순경,
진단 받으러 병원에 간 환자에게 의사, 사업하는 사람에게 세무서원,
그런 사람들은 오늘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세상에서는 하느님도 우리에 대해, 임의로 판단하는 무서운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불에 던져지는 가라지의 운명에 더 관심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밀이삭과 더불어 가라지도 자라게 두는 주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뿌려서 우리를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고 쉽게 버립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고 오늘 비유의 일꾼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밀도 가라지도 살리고 자라게 하는 분이십니다.
가라지가 추수 때 뽑혀서 불태워지는 것은, 끝까지 가라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땅의 양분을 흡수하여 스스로 살고 자랄 궁리만 합니다.
가라지는 주변의 다른 생명을 위해 전혀 기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善과 惡의 차이입니다.
밀은 양식이 되어 사람을 살게 합니다. 선은 주변의 생명에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선하신 것은, 그분이 세상 만물을 존재하게, 또 성장하고, 발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을 생명이라 부르기도 하고, 하느님을 아버지 혹은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이 생명을 아끼고, 돕고, 성장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존인데, 주변의 생명들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것을 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는 우리의 생명이 지닌 양면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밀과 같이 우리 스스로를 제공하여 주변의 생명을 살리고 또 발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녀들을 낳고 보살펴 키우며,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니면서 인간 생명을 위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가라지와 같이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돕는 데에 인색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과소비하고 사람들에게 횡포도 마다하지 않는 생명들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뿌리신 생명들입니다.
밀로 자라서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되게 살라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15,22)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생활의 한가운데에 미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례합니다.
미사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내어 주고 쏟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로 살지 않고 밀로 살아서 다른 생명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 다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6,31-32)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풍부하여 보람 있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습니다.
주변의 생명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밀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생명을 뿌리고 자라게 하는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배워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한 사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가라지의 安全對策입니다.
신앙공동체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한 사람 행세하는 길을 찾는 것도
밀로 위장한 가라지의 행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 한 사람 獨也靑靑하는 길을 찾는 가라지가 되지 말고,
주변의 생명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는 좋은 밀이 되어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제노 수녀
오늘 1독서 지혜서는 하느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좋은 씨를 뿌린 밭에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보고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라고 물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느님은 힘의 주인이시고 만물을 다스릴 주권을 갖고 계시지만
당신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너그럽고 관대하게 다스리십니다.
주님은 당신이 좋은 씨를 뿌린 밭에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보시고도
밀과 가라지가 수확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십니다.
가라지는 시간이 지난다고 밀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고 체험할 때
회개의 은총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루카 15장의 ‘자비로운 아버지’ 비유의 작은아들처럼
아버지의 자비를 깨달을 때 우리는 다시 아버지의 아들 자격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 번도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그 자녀 됨을 포기하거나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도, 우리의 의로움 덕도 아닙니다.
온전히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기다림과 자비와 사랑 덕분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회개를 향한 우리의 작은 발걸음도 신앙으로 받아주시고,
사랑을 향한 우리의 적은 노력도 겨자씨처럼 큰 나무로 자라게 하십니다.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인자해야 함을 배우고.
지은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그분께로 매일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가라지는 밀이 되는 꿈을 꿉니다.
[출처] 마태 13,24-43 연중 제16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작성자 베네지기